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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세상보기

SSM을 통해서 생각해 보는 한국 사회.

by 격암(강국진) 2010. 9. 9.

나는 슈퍼슈퍼마켓 (SSM)의 문제를 아주 중요한 문제로 생각한다. 이문제가 단지 슈퍼마켓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당면한 선결과제와 깊게 연관되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문제이고 무엇이 해법이 되어야 하는지를 다시한번 여기서 정리해 보려고 한다. 


SSM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사업의 체인화 거대화는 앞으로 계속 일어날 것이고 현재시점에서 그런 변화를 법적으로 강제적으로 막을 방도는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런데 한국의 자영업자 비율이 OECD국가중 최고수준이라고 한다.이 말은 이런 변화가 매우 커다란 사회적 분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다. 가게문 닫을 자영업자가 많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일본에 사는 사람으로서 나는 전에 SSM의 문제가 어떻게 보이는지 일본사회는 어떻게 그것에 대처하고 있는지에 대해 쓴적이 있다 (http://blog.daum.net/irepublic/7887493). 다시 정리하자면 일본소상인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3가지가 있다. 하나는 낡은 거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관광명소화 하는 방법, 또하나는 단골들과 강하게 결합하여 생존하는 방법 마지막은 고급화, 차별화를 하는 방법이다. (자세한 것은 위에 링크된 글을 참조하라.)


SSM같은 것을 접하고 우리가 먼저 이해하고 인정해야 하는 것은 SSM은 그 자체로 문명의 발전의 결과라는 것이다. 커다란 조직이 효율적으로 돌아가는데는 그에 상응하는 조직능력 -배송, 관리, 물품조달, 자본조달등- 여러가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SSM을 무조건 거부하고 비인간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기계가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면서 기계를 부시던 영국노동자나 자동차는 비인간적이라면서 걸어다닐것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같은 실수를 하는 것이다. SSM은 그자체로는 아름다운 인간의 성취고 인간이 만들어 낸 사회적 기계, 시스템이다. 분명 많은 경우 우리가 잘 사용해서 이득을 보게 될수 있는 좋은 것이다. 


당장 소상인들의 입장은 그렇다고 해도 장사와 상관없는 많은 시민들은 동네에 SSM이 들어오면 반기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편리하기 때문이며 솔직히 친절도에 있어서나 청결도, 가격에 있어서 훨씬 경쟁력이 높은 경우가 대다수다. 많은 지역주민들은 SSM같은 것이 동네를 좋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즉 심지어 지역사회 공헌도도 SSM이 크다고 생각하는 쪽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SSM의 비인간성이나 그들이 미래에는 지역주민을 배신할 것이라던가 지역의 돈을 빨아들여 외부로 돌리니 지역을 가난하게 만들것이라는 논리등을 펼치는 사람은 많다. 예를 들어 한겨례 기자가 쓴 이 블로그도 인간적인 자본주의를 주장하면서 대기업의 자비를 요구하고 있다. (http://blog.hani.co.kr/catalunia/34455 )


나는 이런 주장들에 찬동하는 편이다. 그러나 SSM에 반대하지도 않으며 위에서 이야기한 여러 주장에는 뭔가 결정적인 것이 빠져있거나 충분히 강조되지 못하는 것 같다. 각론은 있는데 총론이 없는 느낌이다. 그래서 여러가지 논리들이 설득력이 크게 떨어진다. 빠져있다는 것이 뭘까. 그것은 바로 다양성, 공동체를 기반으로한 거시적 시각이다. 


우리가 하나의 동네슈퍼를 보고 또하나의 SSM을 보면서, 그것들을 지역사회와 결합된 공동체의 일부로 보지 않으면서, 주변환경과 무관하게, 어느쪽이 좋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당연히 SSM이 좋다. 거대회사는 머리좋은 사람들 써서 온갖 최적화를 거치고 규모의 경제를 달성해서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SSM이 동네슈퍼보다 안좋겠는가. 이렇게 묻는 다면 대부분의 경우 당연히 SSM이 좋다. 


그렇다고 SSM이 좋은 건 알지만 인간적으로 그럴수 있냐면서 자비를 요청하는 논리는 말이 안된다. SSM보다 동네슈퍼가 좋은 경우만 동네슈퍼가 살아남을 자격이 있다. 그건 불가능할까? 불가능하다고 믿는다면 모두 SSM에 의해 대체되도 할말이 없다. 그건 거지처럼 기생해서 살겠다는 이야기와 다를바가 없다. 장기적으로는 설득력이 없다.


그럼 SSM이 동네슈퍼보다 못한 경우들을 보면서 돌파구를 찾아보자. 일본에서 작은 가게들이 살아남는 방식들은 좋은 예가 된다. 예를 들어 에도시대의 거리를 표방하면서 존재하는 반찬가게가 있다고 하자. 이 거리는 이걸 관광상품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서 지역 특산품인 반찬들이나 된장을 팔고 옷을 팔아 먹고 산다. 여기에 현대식으로 비까번쩍한 SSM, 에도시대에 있을리 없는 유명체인점 이름 붙여놓은 SSM을 들여놓자고 하면 지역주민들이 그러자고 할까?


당연한 예이지만 이 당연한 예에 돌파구가 있다. 동네슈퍼가 전국적으로 표준화된 SSM을 이길수 있는 방법은 바로 강력하게 지역과 결합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지역과 결합한다는 뜻은 그 지역이 지역적 특색을 가진 문화를 가졌다는 것을 전제한다. 반드시 무슨 민속촌같은 곳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전국에 똑같은 모양을 한 아파트를 짓는 것처럼 전국의 모든 동네가 지역적 특색없이 똑같다면 표준화된 SSM이 전국을 뒤덮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다. 사람들이 지역적 특색이 가지는 소중함, 차별화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표준화, 규격화된 쪽이 이기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언제나 SSM이 나쁜게 아니다. 당연히 많은 경우는 SSM이 좋다. 


나는 글의 서두에 이 문제가 아주 중요한 사회문제라고 말했는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게 FTA의 문제고 중국산 제품수입의 문제며 관광산업의 문제, 나아가 교육시장의 문제등 당면한 거의 대부분의 문제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문제라는 것을 알수가 있다. 


한국인의 삶자체가 표준화 규격화되면 세계적인 규모로 표준화되고 거대화된 자본들로 부터 무방비로 노출되며 경쟁력을 상실한다. 일단 표준화가 더욱 강력해지면 일종의 악순환이 일어날수 있는데 표준화 규격화된 삶때문에 더욱 경쟁력을 가지게 된 거대한 표준화 물결이 사람들을 더욱 표준화 시키게 되고 이것이 다시 더더욱 표준화된 거대자본의 힘을 강력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사람들은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며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을 잃고 결국은 매우 대체되기 쉬운 싸구려 인력으로 모든 사람이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경제속에서 개인의 가치는 희소가치로 나타나는데 삶이 표준화되면 될수록 당신은 희소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열심히 아파트를 지으면서 전국을 표준화한다. 교육도 표준화된다. 전국이 똑같이 똑같이 한다. 한국인의 삶은 위험할 정도로 표준화되어 있다. 중국이나 미국같은 거대한 나라는 그만두고라도 일본과 비교해도 한국인의 삶은 엄청나게 표준화되어 있다. 일본인들이 보다 조직에 제약을 많이 받고 한국인들이 보다 자유분방하다고 생각해서 일본인들이 보다 표준화되어 있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국가전체로 보면 일본인들은 훨씬더 다양한 집단들을 가지고 있다. 한국은 모두가 같은 유행, 같은 시험의 점수, 같은 직장, 같은 가치판단으로 생태학적 다양성을 잃어버린, 생태학적 재앙을 가져오기 쉬운 환경에 있다. 


표준화, 규격화는 일자리를 감소시키고 국민들의 희소가치를 떨어뜨려서 결국 임금도 떨어뜨린다. 우리는 영어배우려 야단이지만 미국사람이면 누구나 영어를 한다. 외국인 노동자를 불러서 한국 사회에서 바로 아무 문제없이 쓸수 있는 환경이 한국에 조성된다면 한국인들의 임금은 자동적으로 하락한다. 나는 외국인 노동자를 배격하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한국 사회와 결합한 존재로서의 한국인의 모습, 문화적 다양성을 잃어버리면 한국인 모두의 희소가치가 증발되고 모든이의 삶이 위험해진다는 것을 말하는것이다. 


서울대 연고대 하는 식으로 나가는 대학서열화를 많은 사람들이 비판해 왔다. 그런데 그문제는 기묘하게 해결되어 나가는 것같다. 바로 미국에서 주립대학만 나와도 한국에서 서울대나온것 보다 인정받는 사회로 해결되어 지는 것이다. 한국대학의 하향평준화랄까. 사실 한국에서 직장을 잡는데 서울대나온것보다 하버드대학 나온것이 더 인정받는 다는 것은 일정부분 위험한 면이 있다. 나는 지금 학벌옹호론을 펼치거나 배타적 민족주의를 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거듭강조하고 싶다. 


다만 그런 사회에서 능력이 되는 엘리트는 모두 미국으로 갈것이며 아마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 적응하면서 성장한 최고의 엘리트가 그사회의 요구에 더욱 최적화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다. 세계화란 이름으로 표준화가 진행되는 한국은 한편으로 존재근거를 상실하고 만다. 미국의 하류층으로 편입하는 셈이랄까.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는 대원고니 민사고니 하는 학교들은 이제 서울대 연고대 몇명하는 것위로 미국 유명대학에 학생을 입학시킨 것을 자랑으로 삼지 않는가? 


공동체의 붕괴라는 측면에서 이문제를 보라. SSM에 관련된 논의와 연관시켜서 생각해 보라. 국제화라면서 모든 대학에서 영어로 강의하는 열풍이 불고 될수있으면 미국대학과 똑같은 환경을 만들려고 하는 흐름이 과연 좋기만 한것일까? 국민모두가 잘해봐야 미국의 3류 4류대학 출신자취급을 받는 길로 가는 것이다. 얼마전 리영희가 요즘이 일본을 미국으로 바꾼 경술국치 직전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이런 방향에서 들었을때 의미심장하다. 


FTA에 찬성하냐 반대하냐 하는 것은 시야를 좁게보면, 기간을 단기적으로 보면, 사실 경우마다 다른, 어떻게 하는가의 문제다. 그러나 더 시야를 넓히면 이건 찬성하냐 반대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반대는 SSM에 대해서 무조건 증오를 생산하고 인간적이어야 한다는둥 하면서 폭력시위하는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차피 한국이라는 사회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뭉쳐서 생존의 의미를 발견할수 없으면, 이웃이 의미가 없듯이 한국인들이 서로에게 별 특별한 의미가 없으면, 한국인들의 삶은 한국인의 삶에 별로 관심없는 사람들의 손에 좌지우지하게 된다. 표준화되고 규격화된 세계적 자본이 한국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 방법이 그리고 어쩌면 막아야 할 이유도 없다. 


공동체로 뭉친다는 것은 배타성을 의미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거듭말하고 싶다. 다시 에도시대 전통거리를 만들어 가게를 유지하는 사람들, 단골손님과 결합해서 가게를 유지하는 사람들, 전문화로 살아남는 가게들을 생각해 보자. 


전문화의 경우는 좀 다른 경우지만 살아남는 방식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를 일정부분 버리고 주변과 강하게 호흡하고 맞추는 것이다. 공동체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어떤 동네가 에도시대 거리를 보존하는 거리로 먹고 산다고 해보자. 거기에는 합의가 당연히 필요하다. 적어도 대단한 성공을 하기전까지는 불안한 미래에 대해 이런 저런 이견이 있을 것이고 손해보고 이득보는 것에 대한 산수가 여러가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상호간에 강력한 신뢰가 없다면 결코 어떤 거리가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특정한 특징을 가지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가지 않는다.원칙적으로 말해 정답은 없다. 어느쪽으로 갈것인지는 지역주민들의 단합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그 정체성이 식민지를 거치면서 본래 미약해 져있는데 일본과 중국같은 부자고 거대한 나라옆에서 미국이나 유럽같은 강력한 문화선진국의 영향을 받으면서 매우 매우 미약해져가고 있다. 나라안에는 신뢰가 없다. 법을 지키는 것은 약자들이 어쩔수 없이 하는 것이고 공정사회는 농담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냉소가 퍼진다. 국민들의 분노를 살만큼 부끄러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무 문제의식도 없이 공직에 나와서는 사회적 지도층 운운하면서 사회를 지도하려고 한다. 인터넷에서 빌게이츠나 스티브잡스 혹은 오바마 대통령과 우리나라 대통령중 어느쪽이 한국인들에게 공정하게 대할것 같냐고 물어보라. 압도적으로 한국대통령이라고 나올까? 


불친절하고 가게는 불결하게 운영하고 조금이라도 더 손님에게 더 많은 것을 주려고 하는 서비스 정신이 없는 그런 주인, 지역민들이 어떻게 사는지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만 생각하는 그런 불량가게주인이 SSM의 물결이 닥쳐오자 공동체가 어떠니 지역사회가 어떠니 하고 외치는 모습은 공감이 갈수가 없다. 


한국 사회가 하나의 공동체의 정체성을 가지고 서로 강하게 돕는 사회를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떤 지역에 살고 있는데 그 지역의 문화적 특성에 아무 기여하는바가 없다면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다면, 서울과 대전과 부산과 밀양과 해남이 모두 꼭같이 느껴진다면 우리는 세계화의 태풍이 불어닥칠때 딱 위에서 말한 불량한 슈퍼주인과 같은 대접을 받게 될것이다. 왜 당신은 인도나 인도네시아나 중국인 노동자보다 높은 임금을 받아야 하는가? 학벌이 길어서? 인도최고 대학과 중국최고대학이 서울대보다 못해서?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은 지금 열심히 4대강 공사같은것을 하면서 역사와 다양성을 지워버리고 있다. 한국국토가 가지는 신비성을 지워버린다. 모든 곳을 똑같이 만들어 버린다. 자칭 사회지도층은 철학도 없이 외국과 똑같아 질려고만 하고 시민들은 한복같은 것은 입지도 않으며 명절도 없고 유교적 철학은 어떤 것인지, 우리의 문화전통은 어떤 것인지 발전적으로 외국것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것을 그냥 통째로 밀어버린다. 


민속씨름같은 것은 이제 인기가 없다. 연예인들은 너나 할것없이 외국에서 자라거나 시간쓴 사람들이라는 느낌이다. 인사동에 가보면 우리가 전통문화를 즐기기 위한 거리라기 보다는 완전히 외국인 관광객 특히 일본인 관광객을 위한 거리다.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때 이젠 일본사람들이 좋아할 것같은 것을 만든다. 가수들은 돈되니까 너나할것 없이 일본시장에 진출한다. 우리는 정체성 위기의 임계점 근처에 있다. 


물론 문제의식을 느낀 사람들도 많고 여러가지 반대되는 노력도 하는 것같다. 그런 예에는 한살림 같은 생활협동조합이 있을 것이나 사실 실패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실패의 근원에는 철학적 편협함, 권위주의의 만연함이 있다. 한살림운동의 발제문은 훌룡한 것이지만 동시에 합리주의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합리주의의 폐해를 설명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책없는 낭만주의나 반문명주의로 이해되기 쉽다. 한국문화안에 있는 권위주의를 한살림같은 곳안에서는 타파했을까? 그들은 동시에 과학문명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일단 권위주의를 치워야 한다. 그냥 느끼는 대로 자유롭게 말하고 즐기게 둬야 한다. 한국문화는 이것이다라는 선입견도 필요없다. 진정한 자유가 있는 한국사람이 느끼는 것, 즐기는 것이 한국문화다. 인사동에 있는 상업화된 것들만 한국문화가 아니다. 한국사람들이 가기 좋아하는 곳이 한국 문화가 있는 곳이다. 전에 한 일본인이 미사리 까페촌을 가보고 너무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박물관에 있는 문화는 문화가 아니다. 전통 한국문화를 즐기고 발전시켜야 하지만 한국문화라고 하면 무조건 한복입은 여자, 사물놀이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국민이 자유롭게 즐기게 하라. 


한국사회가 탈권위화가 진척된 것은 민주정권이 들어섰던 김대중, 노무현 시대다. 이 시기에 한류열풍이 불었고 가장 한국적인 드라마인 대장금이 전세계적인 히트를 쳤던 것을 생각해 보라. 한국의 온라인게임이 세계적 화제가 되고 세계의 첨단 IT 국가로 유명세를 탓던 것을 기억해 보라. 


거기에 정부와 거대기업이 끼어들면 모든 황금이 돌이된다. 배금주의만 전파하는 드라마, 귀하게 태어난 왕자만 잘나가는 영화들이 만들어 진다. 아파트 열풍은 지역공동체라는 개념을 농담같은 것으로 만든다. 


SSM의 문제는 자영업 전체의 문제고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다. 한국 사회는 SSM문제가 가지는 본질적 내용과 같은 것을 경험하면서 위기의 벼랑 바로 앞에 서있다. 다양성을 증가시키고 소수파가 살아있을 자리를 주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수 있고, 권위주의를 타파해서 이사람 저사람 차별하지 않고, 무엇보다 우리가 좋아하는것을 추구해서 한국사회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그런 노력을 해야 한다. 지역인들이 고민하고 각자의 방식대로 지역을 키워나가야 하며 거기에 애착을 가져야 한다. 특징이 있어야 한다. 과학이 뭔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과학에서 도망가지도 않고 과학의 희생자가 되지도 않는 능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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