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흥선대원군이라고 하면 조선말 쇄국정책을 폄으로서 나라를 망하게 한 사람으로 주로 기억합니다. 그 역사적 세부사항과 진실을 따지기 전에 이러한 시각에는 기본적으로 개방과 쇄국에 대해 지극히 유치하고 잘못된 견해가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개방이냐 폐쇄냐의 문제가 마치 슈퍼에 가서 어떤 라면을 살것인가 같은 문제와 같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 인것처럼 생각하는 태도, 개방의 문제를 마치 노약자를 보호해라라던가 폭력은 나쁜 것 같은 단순한 윤리적 규칙을 지키는 문제처럼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이에 따르면 역사는 흥선대원군이라는 일개개인이 개방이냐 쇄국이냐의 두개의 스위치중 하나를 누름으로서 크게 방향을 틀게 됩니다. 역사는 일개 개인에 의해 결정될뿐만 아니라 그 선택은 당연히 개방이어야 했는데 쇄국을 누른 잘못된 선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개방의 문제에 항상 직면하고 있습니다. 개발의 문제도 일종의 개방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사는 고향을 이러저러하게 개발하는 것에 대해 항상우리는 열린자세여야 하는가 , 아니면 우리 지역공동체의 정체성유지라는 측면에서 보수적 시각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시각이 있을수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문제, 다원화 사회의 문제, 세계화의 문제, 소위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쟁도 물론 개방의 문제입니다. 경제, 사회적 개방의 문제는 오늘날 조선말엽을 연상시킬정도로 우리에게 절박한 문제로 대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상당히 폐쇄적이었던 과거의 한국은 이제 경제규모가 달라지고 세계정세가 달라짐에 따라 개방되었고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쇄국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자유로 갈까요 아니면 조선을 망하게 했다는 쇄국정책으로 가야 할까요. 이도 저도 물론 아니니 적당히 잘하자는 문구하나를 던지면 그걸로 답은 나온 걸까요?
개방이냐 폐쇄냐의 문제는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닌 능력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발견해야 하고 자기를 봐야 합니다. 그럴때 개방을 할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며 그럴때 개방을 해도 자기를 지킬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개방은 자살과 같은 일에 불과할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론적으로 개방이냐 폐쇄냐 어느 쪽이 좋은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개방적일수 있는 능력, 자기를 발견, 인식, 유지할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방의 문제를 사회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먼저 개인의 차원에서 생각해 봅시다. 자기찾기의 핵심은 자기가 살고 싶은 방식을 자기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삶을 자기가 선택한다고 한다는 이 단순한 이야기는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적인 권위에 대한 저항이기도 합니다만 더 어려운 것은 내적인 권위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우리안에는 그다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은 상식, 문화적 관습, 과학주의등 여러가지 것들이 가득차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한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일을 사실은 우리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다른 사람의 생각대로 선택하고 행동하고 있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기성품처럼 살고 배우처럼 반응합니다. 진짜 우리의 삶을 산다기 보다는 이렇게 해왔으니까 그렇게 살고 남들이 이렇게 하니까 그렇게 반응합니다.
우리가 먼저해야 하는 일은 자기가 가진 것들을 지워가고 그 한계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찾는 것입니다. 그냥 습관적으로 살고 행동하는 그 모든 것이 '나'인지 아니면 어떤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바꿀수도 있는 것이고 어떤 것은 매우 소중히 지켜야 할 가치인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합리적으로 산다는 것이 뭔지, 자신은 어떻게 선택을 하고 가치판단을 내리는지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인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차원이 아니라 개인차원에서도 개방은 필요한 것이며 단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입니다. 자기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전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자기세계에 갇히는 폐쇄적인 인간이 되거나 두서없이 자기를 개방하고 자기를 잃고 결국 유령처럼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남들과 좋은 친구가 될수도 없습니다. 자기가 없는 인간은 다른 사람을 흉내내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로 거기에는 친구로 삼을 인간이 존재하질 않습니다.
역사나 사회에 있어서 어떤 수학적이고 과학적 원리를 말하는 것은 곤란한 것입니다만 부국을 이룩한 나라들은 다 이런 능력이 있었기에 개방적일수 있고 남의 좋은 것을 배울수 있고 그래서 부국을 이룩한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가 그랬고 미국이 그랬고 일본이 그렇습니다. 유태인들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단순하게 개방적이기만 한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폐쇄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바로 자기를 지키면서도 최대한의 개방성과 유연성을 보일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것입니다.
미국에는 실용주의적 태도가 있었습니다. 실용주의란 보통 일상에서 남용되어 마치 배금주의처럼 생각되는 일이 많은 오렴된 단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인들의 정신은, 적어도 그들이 강조하는 정신은, 결코 배금주의적이지 않습니다. 미국의 전통은 청교도적인문화로 만들어진것이며 미국의 유명대학들과 공익재단들은 미국의 부자들의 아낌없는 기부에 의해 만들어 진것입니다.
미국인들에게는 유럽인들에게 부족했던 절차와 형식을 무시하고 그 핵심을 곧바로 찌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단순하게 이렇게 해보고 안되면 또다르게 저렇게 해본다는 식의 미국인의 태도, 평등사회를 추구하는 비 권위주의적인 사회, 추상화로 나가기 전에 그 핵심은 무엇인가를 따지는 미국인의 태도,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위해 전쟁을 치루고 사회의 기본적 질서로서 그 가치를 강조하는 사회를 만들면서도 즉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굳건히 하면서도 그 질서를 제외한 것에 대해서는 큰 개방성을 이룩한 나라를 만든 능력이 오늘날의 미국을 만든 것입니다. 언젠가 로마가 망했고 유럽이 1등국가에서 물러나 앉은 역사가 있듯이 미국도 흔들릴 날이 올지 모르지만 그들의 성공경험이란 결국 단순히 개방을 선택한 현명함이 아니라 개방을 할수 있는 철학, 삶에 대한 태도, 바로 그런 능력이 뒷받침 되었던 결과입니다.
일본도 어찌보면 절대 변하지 않는 자기를 지키는 폐쇄적인 나라입니다. 그런데 어찌보면 끝없이 개방적인 나라입니다. 일본사회도 자신들의 전통을 바탕으로 꼭지켜야 할 자기를 선택했고 그것을 확실히 했기에 반대로 그것이외의 것은 개방할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것입니다. 로마도 마찬가지이며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있기에 개방이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고 해봅시다. 이여자가 한복을 입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알기를 우습게 압니다. 한 여자는 노랑머리로 물들이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습니다. 그런데 매우 효녀입니다. 어느 쪽이 한국인다운 것입니까? 이 예를 통해 저는 한복을 강조하려는 것도 효를 강조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우리의 알맹이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이나 전통적 미덕은 그 수가 무한히 많습니다. 우린 그걸 모두 지켜야 할까요? 아니면 어느하나 중요한게 없으니까 다 자유일까요? 그냥 미국이나 일본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걸로 지켜낼까요?
자기를 확립하지 못하는 폐쇄적 보수주의자는 과거에 있던 것이라면 모든 것이 한국인의 정체성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선시대사람처럼 먹고 입고 그렇게 말하며 살아야 하고 뭐하나 고친다면 그것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행위가 됩니다. 모든 것이 자기의 정체성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있어 정말로 핵심적인 것이 뭔가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그저 관습이 그렇다, 원래 그렇다라는 게으른 생각으로 삽니다. 따라서 보다 중요한 것, 지금 지켜야 할것에 대한 의견이 없으니 결국은 허둥대다가 뭐하나 지키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를 확립하지 못하는 자유주의자는 민족적 국가적 정체성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은 자유로이 개방하고 섞으면 그안에서 저절로 좋은 것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제 생각에 그런 의견은 마치 달팽이와 인간의 DNA를 맘대로 섞은 잡종을 만들어도 한두세대만 지나면 그 양쪽의 장점을 모두 가진 초인간이 탄생할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21세기의 인간은 잘난척을 하지만 2천년이상전에 존재했던 공자, 예수, 노자, 부처, 플라톤들의 통찰력을 압도하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 개개인의 능력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확실히 한국사회, 한민족의 문화집단이란 역사속에서 사멸하고 없어질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천년의 기간동안 수많은 천재와 민중들에 의해 교정되고 발전되어진 그렇게 진화한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별거 아닌것같아보여도 김치같은 음식하나, 제사를 지내고 장례를 지내는 절차하나, 새해에 부모님에게 세배하는 전통하나에도 긴 고민과 다른 수많은 사회적 행동들과의 조정을 거친 진화가 있습니다. 그걸 다 가져다 버리고 우리 완전히 빈손에서 다시 처음부터 우리의 삶을 구축해보자고 한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자신의 삶을 구축해 낼수 있을까요? 그저 사회의 파괴가 될 뿐일 것입니다.
이런 논의가 해묵은 미래에 대한 논쟁인 이유는 김구도 정인보도 이 문제의 중요성을 이미 백년전에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구의 나의 소원을 다시 읽고 정인보의 양명학원론을 다시 읽어보면 우리 자기를 가지자라는 말을 하는 목소리가 똑똑히 들립니다. 한국에는 자기가 없습니다. 자기가 없어서 생기는 문제가 점점 심화되어갑니다만 여전히 자기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쇄국이냐 개방이냐를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선택의 문제, 혹은 어떤 단순한 윤리적 악덕의 문제로 생각하는 태도는 모두 틀린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원화사회를 만드는 것이 옳다 그르다하는 질문은 질문이 잘못된 것입니다. 하고 싶어도 능력이 없어서 할수 없을수 있고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될수도 치명적 독이 될수도 있습니다.
이런 민족적, 국가적 정체성찾기라는 주제는 흔히 폐쇄적 민족주의로 단순히 가치절하당하고 마는 경우가 많은 것같습니다. 서양의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동양의 저항은 그저 무식한 폐쇄주의로 주장하는 시각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단순히 민족적, 국가적 자기찾기에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지역적 자기찾기를 해야하고 가족적 자기찾기를 해야 하고 개인으로서의 자기찾기를 해야 합니다. 모든 차원에서의 자기찾기가 필요하며 개인으로서의 자기찾기를 한다는 것이 가족적 지역적 국가적 정체성의 부정으로 반드시 나아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사회에는 자기찾기가 안되기 때문에 무수한 혼란과 병폐가 일고 있습니다. 자기찾기가 안되는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윤리가 없고 자신의 가치판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주어진 규칙을 지키려고 합니다. 남의 판단을 복제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 과학, 교육 모든 분야에서 혼란이 끊이질 않는 것입니다. 왜냐면 일본, 독일, 미국, 프랑스 모두 서로 다른 자기의 자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여기를 흉내내고 내일은 저기를 흉내내서 뒤죽박죽으로 섞어봐야 잘되지 않으며 다 때려치고 하나만 흉내낸다고 해도 잘되지 않습니다. 그들과 우리는 가진게 다르고 입장이 다르며 무엇보다 바라는 것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음악은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고민하고 우리가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노래하는 것을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밥먹을 돈도 없는 가난뱅이가 돈이 너무 많아서 삶이 권태롭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한탄을 그대로 흉내낸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지요.
그러나 한국의 방송을 가득채우는 노래들이 과연 한국인들의 문화와 삶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요? 거지가 자신을 재벌로 생각하는 착각에 빠져있는 그런 상황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요? 걸그룹들이 잔뜩 나와서 부르는 노래들로 채워진 방송은 과연 누구의 입장, 누구의 정서를 노래하고 있는 것일까요?
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보다 훨씬 많은 돈을 투자하고 인적 물적 자원이 넘치는 선진국과 똑같은 주제를 생각한다면 한국의 과학, 한국의 공학은 그저 삼류하청업자의 위치를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과학도 자기를 가져야 일류가 될수 있습니다. 철학을 가지고 가치적 세계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국도 과학과 공학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할수 있는 것이지 남을 흉내만 내고 있어서는 곤란합니다.
교육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가치적인 기준이 흔들리는 사회에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뭘 가르치려고 하는 것일까요? 한국 사회는 이제 돈밖에는 남은게 없는 것같습니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배금주의, 출세가 최고다라는 것 이외에는 가르칠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대안사회가 없는 데 대안교육이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와 교육은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가 무조건 미국을 추종하려고 할때 미국의 교육이 진짜 교육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초등학생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가르치기 보다는 워싱톤이나 링컨의 이야기를 가르치는 일에 몰두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가져야 합니다. 남에게 배우는 것 이전에 스스로의 것을 배우고 익혀여 합니다. 이런 저런 남의 이야기를 더듬거리면서 하기전에 자신안에 있는 것을 검토하고 지우고 단순화하고 그 한계를 알아서 자신의 생각을 말해야 합니다. 일단 그렇게 되면 그렇게도 대단해 보이는 많은 말들이 실은 당연한 것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것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는 스스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두의 지식과 경험은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트기를 어린애가 몰면 매우 위험합니다. 한국은 물질적으로 지식적으로만 풍요로워졌을뿐 자기를 가진다는 문제에 있어서는 지난 백년간 별 진전이 없는 듯합니다. 때문에 한국은 오히려 전보다 더 큰 위험에 빠져있습니다. 한국이 가난했을때 외국인 노동자문제는 없었습니다. 한국에 SSM이니 재벌의 문제니 하는 것이 벌어지는 것은 거꾸로 그만큼 한국이 물질적으로 지식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가야할 미래는 정해져 있습니다. 해묵은 미래입니다. 한국사회에는 깊은 저력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젠 그만 가야할 길을 가야 할것입니다. 백년이상 미뤄둔 길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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