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2.21
대학교 축제때면 대동제라는 것을 합니다. 대동이란 모두가 하나된다는 것이죠. 지금 우리사회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대동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서진 자아가 하나되고 부서진 가족이 하나되고 부서진 나라가 하나되고 나아가 세계와 하나되는 대동이 필요합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되기위해, 대동을 위해 뭐가 필요한걸까요. 그건 바로 느끼는 마음,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입니다. 각각의 개인이 그것을 깨닫고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정론이고 정도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느끼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이나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함께 살아가는 자세를 가진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거나 그걸 실천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뭐든지 그렇지만 거기에는 고민이 필요합니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가진 걸 모두 남에게 줘버리는 사람은 그것으로 남을 위하는 마음을 가진것일까요? 달마가 중국의 황제를 만났을 때 많은 돈을 시주하고 절을 지어주면 이제 난 어떤 복을 받겠는가하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달마의 대답은 전혀 없다는 것이었죠.
함께 살아가는 마음이란 선한 규칙을 지키는 것 이전의 문제입니다. 즉 그저 도덕적 반성을 해서 더 착한 사람이되어야 겟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의 문제입니다. 자연을 보호하자는 규칙을 지키는 것과 돌과 나무를 보고 그것의 가치를 느끼고 공감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후자가 진정한 자연보호로 아니 자연과의 공존으로 가는 길이며 그렇게 되기위해서는 능력이 필요하지 그저 반성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흔히 오늘날 지식을 많이 알고 학벌이 높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느끼고 함께 살아가는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사람들은 그걸 능력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능력입니다. 오늘날의 사회환경과 학교가 죽이고 있는 능력이죠.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이런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형의 규칙을 세워야 하고 효니 예니 하는 이름을 만들며 문화를 발전시킵니다. 하지만 유형의 것은 시간이 지나면 썩습니다. 성인이 말한 것은 다른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 것인데 그것을 관습화하고 악용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공자도 예수도 소크라테스도 부처도 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말을 하시고 자기 말을 부정합니다. 본래의 뜻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공자나 예수나 부처이름을 팔아 사리사욕 채우는데 쓰는 사람이 세상에 한국에 많습니다. 지식인의 사명중 하나는 낡아진 말들과 개념을 닦아서 현실사회에 맞게 만들고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런 엉터리가 없도록 말입니다.
함께 살아가기의 근본은 무형의 것이라는 것을 지적했으니 현실적 임시처방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임시처방이 뭐가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 하기전에 한두가지 미국과 일본의 예를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사회를 통합하고 있는 것은 자유의 정신과 기독교 윤리입니다. 케네디 링컨 킹목사등이 계속해서 교육되는 나라, 선진국이면서 유일하게 기독교 신자가 많은 나라가 미국이며 이 바탕위에서 특유의 실용주의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미국사회입니다.
일본사회를 통합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봉건적 질서인것같습니다. 물론 천황에 맹세하고 신하로 생각하고 그런 사람이 대다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천황제의 존속은 일본사회의 윤리적 중심을 지키려는 면이 있습니다. 즉 다수의 사람들이 천황가족을 보고 일본적 윤리를 지켜낸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형식은 민주국가지만 의원자리를 세습하다시피하는 일이 흔합니다. 정가엔 할아버지때부터 정치가였던 사람이 흔합니다. 이것은 일본이 이런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면이 여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오해를 피하고자 말하자면 저는 이런 장치들이 옳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아닙니다. 저는 궁극은 결국 개개인이 스스로 서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라고 이미 이 글의 첫머리에서 말했습니다. 또한 미국사회나 일본사회를 뭉치는 힘이 제가 말한 것만 있다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그들이 가진 장치를 우리도 똑같이 가져야한다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다만 남을 보고 그 안의 장치를 인식하고 이제 우리를 보고 우리의 장치를 인식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뭔가를 느끼는 계기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죠.
한국사회를 유지시켜오고 동시에 한국사회가 가진 문제점을 발생시킨 근원은 무엇일까요? 저는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한국을 발전시킨 원동력이자 한국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사회를 가족의 확장으로 대치합니다. 그 말은 가족윤리가 사회윤리가 된다는 것이죠. 쉽게 호형호제하고 세대가 다른 사람들은 부모자식같은 관계를 형성하며 특히 나이든 세대는 그렇게 되지않으면 믿을 수 없다며 의심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통령이나 직장상사를 아버지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문화적 압력이 있습니다.
온통 나쁜것만 말한 것같은데 실은 그런 것이나마 상호신뢰를 가능하게 만드는 문화가 있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신뢰가 힘을 만듭니다. 자식을 100%믿으니까 노후자금같은거 생각하지 않고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게 한국사회발전의 근본적 원동력이었으며 다른 후진국이 탈출하지 못한 극빈을 탈출하게 만들어준 능력이었습니다.
문제는 가족적 질서의 확장만으로 이 이상의 대동이 가능한가하는 것입니다. 지역감정이니 인권유린이니 독과점문제 재벌회사 운영문제등 한국 사회문제 대부분의 뿌리에는 이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결국 가족윤리의 확장문제는 사회적 신뢰의 문제입니다. 도대체 뭘보고 너와 내가 믿는가 하는 것이죠. 그래서 가족윤리는 골치아프면서도 소중한 것입니다. 한국발전의 원동력이었기도 했던 것을 문제가 있다고 간단히 파괴하는 일은 되지도 않고 해서도 안됩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이 문제로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새로운 해결책은 없는가운데 이미 가진 재산도 다털어먹는 상황입니다. 가족적 질서의 외부확대는 당연히 합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회와 맞질않죠. 그러므로 사회적 압력이 발생하는데 따로 사회적 융합력을 발생시킬 힘이 부재한 가운데 가족파괴는 이제 진짜 가족에게 까지 도달합니다. 패륜가족이 늘어나서 이제는 부모와 자식도 서로를 의심합니다. 사람이 좋고 나쁜 것을 떠나 게임의 법칙이 혼동되었기 때문이죠. 부모와 자식에게 각자 적당한 권리와 의무는 어디인가가 혼동된 가운데 자기 권리만 무한히 행사하고 의무는 최소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부당한 의무에 짖눌리는 경우도 나타납니다.
이것은 지나치게 가족윤리에만 의존하고 그것을 사회로 확장한 결과 바깥에서 가족적 질서가 공격당하고 무너지기 시작한 결과입니다. 대통령을 부모로 생각하면 거꾸로 국민에게 사기치는 대통령을 보는 것이 부모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예로 작동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믿지 않고 부모도 그런 자식을 이제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다음세대에 대한 투자도 별볼일 없어집니다. 형식적이 되고 내모든걸 던져넣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표면적으로만 자기 할일을 다합니다. 아이들도 어른을 속이지만 어수룩한 아이들을 어른이 속이는것은 더 쉽습니다. 그리고 서로간에 불신은 더욱 커집니다. 그렇게 큰 그들은 이제 직업찾기와 행복찾기가 힘듭니다. 88만원세대가 탄생하는 것이죠.
우리는 가족윤리에 테두리를 그어야 합니다. 이 안쪽은 가족윤리가 통용되는 곳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그 안에서는 가족윤리의 강화, 명확화가 필요합니다.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살으라는 것이죠. 그러나 그 테두리를 넘어서면 가족윤리는 통용되어서는 안됩니다. 모두가 평등한 것입니다. 불필요한 차별을 만들어내는 호칭을 전부없애야 합니다. 이걸 하지 않으면 사회와 가정이 계속 영역싸움으로 서로를 죽일 것입니다.
사제지간에서도 테두리를 긋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부와 지적동료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물론 나이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미적분 가르쳐주고 영문법가르쳐준다고 자신을 부모에 버금가는 자리로 쉽게 올려서는 안됩니다. 특히 그에 따르는 의무는 별로 생각지도 않고 말이죠. 많이 알건 적게 알건 모든 사람은 지적 동료일 뿐입니다. 이건 단순히 아이들을 더욱 인격적으로 대하자는 말만은 아닙니다. 권리가 있으면 책임도 더 큰것이죠. 떼쓰는건 통하지 않는게 동료간의 규칙입니다. 서로 동등하다면 말이죠. 그러나 물론 이런 선긋기는 임시처방전입니다. 궁극에는 다 필요없는 것이죠. 선을 긋되 모든 사람이 필요하다면 이 선을 무력화할 수 있는 수준에 올라 선따위 필요없어지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애초에 필요없는 선을 제가 그었습니다. 그 선은 하나의 기계로 할 일을 할지도 모릅니다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숙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럼 그 선바깥인 사회는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이죠. 모두가 평등하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선은 합리주의를 확장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투명성을 높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족이 아닌데 어떻게 믿는가? 믿기 힘들죠. 그러니까 투명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평가에 있어서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역할을 하는 집단이 필요하고 올바른 지적 분석을 내놓는 집단을 키워야 합니다. 썩어빠진 언론을 전부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유주의적인 생각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것만으로는 우리는 그저 홀로 날으는 고독한 원자일 뿐이며 감각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기적으로 움직이는 기계나 짐승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회적 대동은 사회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제시하는 정체성과 사상을 필요로 합니다. 기독교적 대동은 신의 피조물로서의 위치를 제시하는 것이고 천황제는 천황아래의 일본의 일부라는 자신의 위치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다 더 보편적인 그림이 필요합니다.
저는 우리는 모두 도반이라는 말로 이 대동의 선긋기를 마감하고 싶습니다. 도반은 본래 불교용어로 함깨 도를 닦는 벗이란 뜻이지만 저는 불교적인 의미로 이 단어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우리는 이런 저런 구분이 필요없고 모두가 함께 공존하고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삶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고 있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에 상관없습니다. 카톨릭이건 기독교건 훌룡한 도반이 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생각하면 보다 탈불교적이고 탈 종교적인 단어를 생각해 낼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소위 웰빙열풍이 분다는 말이 들린지도 한참이지요. 저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웰빙합시다. 그런데 진짜 웰빙이 뭔지 생각해 보고 합시다. 한국에서 어떻게 웰빙할수 있을지 생각해 보고 합시다.
우리는 모두 도반이라는 것은 우리가 모두 평등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며 삶의 목적은 도에 이르는 것,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걸 위해 서로 돕고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위치와 우리가 해야할 일들이 나옵니다. 물론 도니 목표니 하는 것도 우리가 극복해야할 부질없는 선긋기 입니다만 제가 이 글의 서두에서 근본은 본래 형태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임시방편이라고 말했다는 점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겠습니다. 모든 말은 시스템입니다. 시스템은 사람이 있어야 돌아갑니다. 기독교에서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런 소금과 빛이 될 사람이 있어서 문화를 전파해야 그것이 비로소 대동으로 번질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런 저의 대동 플랜앞에서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분들 하나 하나가 대동의 기둥인 셈입니다. 이들이 바로 새로운 대동의 문화집단을 이루는 씨앗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잠시간 산책을 하고 일필휘지로 그림그리듯 -제가 사실 그림은 그릴줄 모릅니다만- 이 글을 썼습니다. 저도 대동이라는 주제로 글을 시작했을뿐 이 글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줄은 몰랐습니다. 따라서 언젠가는 더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그려진 대동이 괜찮게 보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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