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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의 부흥이라는 화두

by 격암(강국진) 2010. 12. 6.

최근 누군가 (^^) 중소기업의 부흥이라는 주제에 대해 저에게 질문을 하더군요. 사실 처음에는 이 주제에 대해 내가 글을 쓰거나 길게 말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해야 할말을 해야 할따름인데 그 주제를 중소기업의 부흥 이라고 말해버리면 이것은 법과 제도를 고칠 위치에 있고 그런 분야에 식견이 있는 분이 이야기해야 할 주제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세금이나 자금융자, 정보제공, 운영노하우 전수등 여러가지 아이디어에 대해 기업경영에 경험있는 분들의 지원이 있어야 겠지요. 

 

그런데 이 주제가 잠시 머리속을 맴돌다가 보니 그게 꼭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하게 말해 법을 바꿀 필요없이 시행할 수 있는 것은 행정부에서 하고 법을 바꿔야 하는 것은 국회에서 하는데 과연 단순히 그들이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뭐가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중소기업의 부흥이란 뒤집으면 사실 대기업 규제입니다. 중소기업 부흥을 위한 확실한 제도가 있다면  그것은 대기업규제를 위한 확실한 제도라는 뜻도 됩니다. 대기업이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현실에서 행정입법에서 뜻을 관철하는 것은 물론 중단할 수 없는 일이지만 동시에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결국 힘겨루기로 결과가 나온다면 힘없는 비주류가 지겠죠. 힘이 생기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닭과 달걀같은 순환이 시작되는 셈입니다. 

 

더구나 물론 중소기업의 부흥이란 더 큰 그림의 일부로 우리 국민문화, 생활방식에 대한 변화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경우는 제도 이전에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하겠지요. 여기서 제가 말하는 중소기업이란 자영업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어떤 삶이 가능하며 어떤 삶이 안전하고 즐거운가에 대한 생각이 필요한데 한국사람들은 다수가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즉 피곤해도 자유롭게 사는 것보다 크고 강한 집단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편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달까요. 이것은 틀리다 맞다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나라 역사, 사회적 현실에서 평가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동시에 객관적이기만한 문제는 아니고 자유에 대한 가치를 어느정도 매기는가에 딸린 주관적인 가치판단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중소기업부흥이라는 화두의 근원에 닿아있는 문제는 사회적 투명도라고 생각됩니다. 집단적 담합이 결국 소수파 작은 힘을 가진 사람들을 살지 못하게 합니다. 그 담합에 참여하는 큰 손들이 작은 사람들의 이익을 빼앗아 잘먹고 잘살자는 것이 바로 담합이니까요. 담합을 막는 것은 법과 제도이지만 결국은 그것은 대부분 투명성을 위한 것입니다.

 

저는 반드시 중소기업은 선이고 대기업은 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규모가 낳는 이득은 분명히 있으며 따라서 이세상에는 대기업에서 작은 자영업자까지 골고루 공존하는것이어야지 대기업을 무찌르고 중소기업의 세상이 와야 한다 뭐 이런 것은 아니닙니다. 

 

다만 투명해야 강자가 약자를 부당하게 핍박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한나라당이 극명하게 반대한 사학법도 그 핵심이 사학재단 운영 투명화였죠. 왜냐면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모두가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공동체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는 말로만 공동체라고 하면 공동체가 되는게 아니라 정보가 제대로 흘러서 이쪽에서 아픈것을 저쪽에서 제대로 느껴야 공동체입니다. 이쪽은 썩어 죽어가는데 다른 쪽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이쪽은 배불러 죽을 지경인데 엄살좀 부리면 국민모두가 거길 도와주겠다고 설치는 상황이면 공동체가 아닌것이죠. 

 

투명성은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지식인집단의 존재 그리고 정보를 제대로 순환시킬 언론매체에 크게 좌우될것입니다. 제가 항상 꿈꾸는 일입니다만 바람직한 시민들이 모여서 바람직한 삶의 방식을 이야기하고 사회를 보는 시점을 제공하고 그것을 퍼뜨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숫자가 적거나 각론은 있으나 총론이 없는 상태, 선의는 있지만 방법에 대한 의견은 전혀 다른 상태로 하나의 큰 집단으로 문화개혁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법과 제도의 정비, 사회적 문화, 특히 투명성제고를 위한 정보채널의 개선등을 이야기했습니다만 그러한 것들은 한가지로 확대, 축약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경제문화생활 기반의 조성입니다. 이것은 국민통합과 새로운 철학의 보급을 포함합니다. 애매한 말입니다. 그래서 애매하지 않은 한가지에서 시작해 보겠습니다.

 

저는 인터넷의 보급, 핸드폰의 보급 그리고 스마트폰과 아이패드의 보급이 한국 사회에 변화를 가져올 힘이 되었으며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변화는 이미 기득세력이 뿌리를 박은 분야에서는 일어나기 힘듭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닭과 달걀의 순환문제처럼 돌고 돌뿐입니다. 힘이 생기자면 변화해야 하는데 변하자면 힘이 필요하다는 순환이죠. 힘이 생기자면 법을 고쳐야 하는데 법을 고치자면 힘이 있어야 한다는 순환말입니다. 이 순환의 돌파구는 어디에 있는가. 그건 바로 게임의 법칙이 완전히 굳어지지 않은 신천지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의 주력산업이 변한다면 그것은 동시에 사회, 정치적 변화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인터넷, 핸드폰, 스마트폰과 아이패드인가. 첫째로 그것들은 매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줍니다. 그래서 사회적 투명성이 증대하고 전에는 뿔뿔히 흩어져 서로 존재도 몰랐던 사람들을 이어줍니다. 둘째로 그 것들은 그 자체가 새로운 삶의 플랫폼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인터넷 쇼핑몰이라는 것, 사이버공간에 존재하는 가게라는것, 사이버공간에도 목이 좋은 곳이 있고 대박 터지는 곳이 따로있다는 것등은 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GPS의 보편화, 스마트폰의 대중화는 증강현실기술같은 것을 말하지 않더라도 이미 현실과 사이버공간을 결합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목좋은 거리에 가게 있는 것도 좋지만 검색이 잘되는 가게, 맛집 검색에 잘 걸리는 가게가 장사가 잘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강력한 기술의 힘에 도취되어 모든 것이 저절로 잘될것이라는 낙관에 취해서는 안됩니다. 새로운 기술환경은 변화를 위한 기회지 결코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인터넷도 초기에는 자유해방공간같은 곳이었지만 자본과 권력이 밀려들면서 이제는 게시판에 글쓰면 북한찬양같은 문제가 아니라도 잡혀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변화를 따라서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가운데 주류세력이 쫒아온것입니다. 강력한 기술은 기회를 주고 그 기회를 놓치면 오히려 더욱 강력한 획일화가 일어날수 있습니다. 위기가 기회라는 말이 있지만 기회도 위기라는 말이죠. 

 

사람들을 잇는 통신선의 끝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궁극은 결국 사람하나 하나의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시스템이 사람을 바꾸는 것도 있지만 사람이 시스템을 바꿉니다. 다른 사람이 같은 시스템안에서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사람이 절대 바뀌지 않는다면 변화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새로운 돈벌이의 기회라는 것만으로는 변하는 것은 없고 다시 새로운 큰손이 등장하고 다시 담합이 계속되는 시대가 올것입니다. 

 

결국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계기가 될뿐이고 그 안에서 공동체가 탄생해야 합니다. 삶의 방식에 대해 서로 공감하고 서로를 믿을 수 있으며 서로에게 아 이세상은 그래도 이런 저런 상식은 지켜지는 세상이야 이런 저런 것에 대해서는 똑같이 가치를 느끼는 공동체, 진정한 한국 사회공동체가 그 안에서 자라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약자가 강자에 의해 핍박받지 않는 방법입니다. 

 

미국문화는 링컨, 케네디, 마틴 루터킹 같은 사람들을 끝없이 강조하고 찬양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잘난인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미국 사회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것입니다.우리는 이런 가치아래서 하나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대 일본사회의 출발점은 메이지유신입니다. 최근 일본에서 료마전의 방영이 끝났습니다. 료마전도 단순하게 료마가 잘났다재밌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료마가 상징하는 가치아래서 우리는 하나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게 없습니다. 한국공동체의 실체가 어느정도 유령같습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식민지 역사때문이요 부분적으로 해방이 미군의 힘에 의해 이뤄졌고 해방이후 일본시대의 기득권이 그대로 기득권으로 남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김구를 존경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세종대왕도 마찬가지일것이며 이순신도 그럴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드라마나 영화는 드물며 있어도 여러가지 논란을 낳습니다. 이승만이나 박정희가 한국정체성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공동체의 실체가 어느정도 유령같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우리역사안에서 어떤 것을 가치로 강조하고 그 안에서 뭉쳐야 하는지 제대로 결판짓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돌아가신 노무현과 김대중이 과연 역사안에서 한국의 혼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부질없는 물결로 남을 것인가 하는 것도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의 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기술적 발전은 새로운 삶의 형태가 생겨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그 기회속에서 새로운 공동체, 진정한 한국이 보다 더 확실한 모습을 드러내 자기정체성을 확고히 할 때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지고 약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가 있고 보다 안전하게 고민하지않고 불안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만들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위해서는 기술만이 아니라 경제적 인문학적 힘의 발휘가 필요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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