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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신세대 그리고 한국의 현실

by 격암(강국진) 2011. 1. 10.

대학원생시절 공대대학원친구들이 하는 비슷한 불평을 자주 듣던 일이 있었다. 그것은 소위 프로젝트에 대한 일이었다. 프로젝트란 정부나 외부기업이 의뢰하는 일을 대학교에서 연구하는 일을 말한다. 외부적으로 보면 이것은 어떤 연구사업에 대학교수들이 참여를 신청하고 그에 대한 연구비를 받고 연구를 수행하는 일로서 하등 문제가 될것이 없는 대학의 일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 일상적인 일이 변질되면 그것은 거대한 착취구조로 변하게 되고 만다. 먼저 고질적으로 있었던 일은 공식적인 연구비의 사용과 실질이 다른 일이었다. 그중 제일 큰 것이 연구비중 임금부분인데 연구비 사용내역서에는 대학원생들에게 임금을 지불한다고 되어 있지만 대학원생들은 그중 극히 일부만 받거나 가끔 인심한번 쓴다면서 교수가 고기나 사주고 마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대학이나 정부는 뭘 원할까. 그들은 실적을 원한다. 그 실적이란 대한민국의 학문적 발전처럼 추상적인 것을 잘 소화한 형태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숫자 즉 고등학교가 서울대 입학생 숫자를 자랑하듯 숫자가 필요하다. 대학의 경우는 주로 국제학회에 논문을 얼마나 썼는가를 따지는 일이 많다. 무엇보다 정량적이기 때문이다. 


교수들은 뭘 원할까. 그들은 연구비와 실적과 인력을 원한다. 시스템에서 인정받는 것을 원하니까 어느정도는 그들도 위에서 요구하는 것을 원한다. 그들은 물론 정도차이긴 해도 위에서 말하는 실적과는 별로도, 위에서 인정받는 것과는 별도로 개인적 연구의욕이란게 있다. 그런데 그것도 대개는 돈과 인력이 드는 일이다. 무엇보다 실적이 없으면 현상유지가 안된다. 


그 돈과 인력은 연구비를 여기저기서 타내는 것으로 대학원생이나 박사후과정 연구원을 고용하는 것으로 만들어 진다. 그런데 여기서 약간의, 교수에 따라서는 정도이상의 왜곡이 일어난다. 교수가 만약 대학원생을 자기 자식처럼 생각하면서 교육에 임한다면 교수는 사실 그 돈과 인력을 구하기 매우 힘든다. 교수가 대학원생을 정글속의 먹이처럼 생각한다면 그일이 훨씬 쉬워진다. 그럼 현실에는 무슨일이 있을까. 


연구실적이라는 건 어떤 의미로는 인력을 투입하고 밀어부치면 항상 나오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 연구실적이란게 얼마나 장기적인 가치가 있는가, 그 연구를 하는 대학원생과 교수에게 장기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은 장기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는 연구를 하면서 실적을 뽑기가 더 쉽다. 장기적으로 의미가 있는 연구란 무슨 종이학접듯이 시간쓰면 나오는게 아니다. 처음 나올때부터 반드시 네이쳐나 사이언스에 나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실적에 대한 압박이 있고보면 일단 숫자를 맞춰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장기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어보이는 쉬운 주제에 손이 간다. 이걸 누가하는가. 거의 대학원생이 한다. 교수는 여러가지로 바쁜데다가 솔직히 말해서 큰 관심이 없으며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칫솔질 하는 것처럼 관리차원에서 하는 일이지 돈과 시간의 압박이 없다면 스스로는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학원생에게 주제를 정해주고 가끔 대화상대로 지시를 하면서 지루한 부분을 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실적을 만들어 낼뿐만 아니라 연구비를 만들어 낸다. 이것은 물론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이다. 


보다 본격적으로 연구비를 위한 일도 있다. 그것은 기업이 의뢰하는 프로젝트를 하는 것인데 표면적으로보면 기업이 연구비를 내고 대학이 연구를 하는 좋은 일인것 같지만 이것이 변질되면 대학원생의 싸구려 인력팔기가 된다. 대학원생이란 우수한 학부졸업 인력이다. 이들은 기업에서 정상적으로 고용하고 임금을 줄경우 훨씬 비용이많이든다. 그런데 대학교에다 의뢰하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면서 비용이 싸게 든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해 지는 것은 대학원생의 무지와 권위주의, 불투명성 그리고 학위나 장래를 볼모로 한 교수들의 권위때문이다. 그런 것들 아래서 대학원생들은 착취당하는 것이다. 이런 착취는 물론 학위를 하고나면 나도 교수가 될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아래서 정당화되는 면이 있지만 그같은 희망은 많은 실적을 내기위한 피라미드구조하에서 매우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역시 대학원생들의 무지가 큰 원인을 차지하는 일로 대학원에는 대학원에 와서는 안될 사람이 많이 생긴다. 그들은 열심히 프로젝트를 하고 공부를 하며 실적도 내고 연구비도 벌어다 주지만 실은 한명의 독립된 연구자로서 살기에는 좀 힘들어 보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교수들은 적어도 한때는 무조건 학생을 많이 받았다. 석사생이나 박사생을 배출한다는 것자체가 교수들에게 실적이 되는데다가 학생은 돈과 인력적 측면에서 무조적 교수에게 수지맞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내가 몇줄의 글로 묘사한 한국의 대학원풍경은 어떤 의미로는 동서양다 차이가 없는 면이 있으며 100% 한국은 지옥이고 선진국은 천국이라는 식으로 말할 생각은 없다. 더구나 한국 사람이 이렇다 일본사람이 이렇다라고 말할때처럼 집단에 대해 말할때는 개인적 차이도 크다는 점, 상황과 입장과 사람의 차이가 커서 분포가 매우 광범위할때는 평균이라는것이 약한 의미를 가질수도 있다는 점을 언급해 두도록 하자. 이런 글로 교수들에게 적개심을 품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내글을 잘읽어보면 교수들도 결국 희생자 체인의 한부분이라는 것을 알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장 큰 희생자는 먹이체인의 마지막에 있는 대학생과 대학원생이라는 것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인것 같다. 


내가 여러번 말한 대학원생의 무지란 흔히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이제 성인인 그 학생이 선택한 결과라는 것으로 설명되는 일이 많다. 그런데 실은 그 무지는 사회적으로 만들어 지는 경향이 크다. 즉 윗세대, 교수들이 작정하고 학생들을 무지하게 만든다. 나는 이것을 고의로 실패한 한국의 교육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학생들이 무지할수록 교수들은 유리하다. 본래 피라미드구조에서 아래층의 사람들이 무지하면 할수록 윗층이 이용해 먹기 좋은 것이다. 합법적이고 자율적인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세상 물정에 무지한 사람들을 이용해 먹는게 쉽다는 것쯤은 누구나 아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그 세상물정이라는 것을 아랫세대가 모르면 모를수록 좋은 것이다. 


사회경험 좀 한 사람은 잡다하기만 지식이 있고 진짜 돈이되고 권력이 되는 정보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정보는 누군가의 밥줄이며 누군가의 약점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석학으로 불리는 교수가 있다면 학부생들은 그들을 석학으로 알것이다. 그런데 세계수준으로 보면 뭐하나 연구실적이 없으며 도대체 어떻게 학문적으로 의미있는 일을 했다는 것인지 알수 없는 경우가 있다고 하자. 이럴경우 위에서 말한 무의미한 실적의 치장속을 들여다볼 눈이 적어도 대개의 학부생에게는 없다. 이러한 실정을 아는 동료 교수는 그 교수의 대학원생이 되고 싶다고 자기자식이 말한다면 은밀하게 다른 것을 권할지 모른다. 그러나 남의 자식들이 그런 선택을 하고 거기로 걸어들어갈때는 모든 것은 그저 개인의 선택이라며 대개 눈을 감고 간섭하지 않는다.  


문제는 정말 솔직한 투명성이다. 자신에게 오는 대학원생에게 자신은 정말 투명할수 있는가. 교수를 비판할 일만은 아니다. 이쯤되면 알겠지만 세상일이란 어디까지나 어느정도는 비지니스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희생정신만 있는게 아니다. 수박팔고 만두팔고 닭팔면서 원가 공개하고 얼마 버는지 자세히 설명하고 파는 사람있는가? 다들 자신의 강점만을 선전하고 팔고 있지 않은가? 학생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학교가 줄수있는 장점만을 설명하면서 광고하는 일이 비도덕적이랄수는 없지 않는가? 


다시 문제는 투명성과 무지의 원인이다. 즉 사회적으로 투명하고 신세대가 가진 무지의 원인이 부분적으로라도 구세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말은 옳다. 거기에 더하여 권위적인 사회가 아니라 위에서 말하듯이 모든 사람들이 독립적이고 평등한 인격체로 살아가는 사회라면 우리는 찜찜한 죄책감을 던져버릴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 문제다. 권위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정보를 왜곡하고 권위를 행사하고 위아래를 열심히 나누면서 신세대에게 너희의 판단의 결과는 너희가 져라라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는 일이 아니다. 거기에 더하여 심지어 은인처럼 행동하는 경우도 있는데 어떤 경우는 이건 마치 노예와 주인이 연상된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노예를 착취하는 주인이 그래도 나는 좋은 주인이니 너는 나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발상법이랄까. 


내가 이글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 불투명성과 권위주의가 착취의 구조를 만들어 내는가, 어떻게 각자 자리보전만 생각하고 실적에만 신경쓸때 전체 시스템은 무의미한 것으로 바뀌는가 하는 것이다.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교수도 일이 많아서 불행할 뿐만 아니라 교수된것이 애초에 연구가 좋아서였다면 이렇게 돌아가는 현실이 불만 스럽다. 또한 교수들도 좋은 사람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사람으로 살고 싶지 누군가를 착취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 관행에 눈감는 일이 있다고 해도 그래 행복하지만은 않다. 정부는 돈은 많이 쓰는데 한국의 학문적 발전은 왜이리 더딘가하고 불만이다. 공포와 권위는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본래의 목적을 망각하게 만든다. 


불투명성의 극복은 본래 사회적 소수자를 대변하는 언론을 통해 그런 사람들에게 힘이 되주고 싶어하는 기성 지식인들을 통해 행해지는 것이 크다. 그러나 역시 권위주의가 팽배하고 돈이 모든 정보채널을 지배하는 상황이라면 소수자를 위한 목소리는 알아서 줄어든다. 그럼 무지한 소수자는 무지한채로 어둠에 팽겨쳐지는 것이며 특히 신세대 교육이란 그저 말잘듣는 로보트, 딱 등쳐먹기 좋은 인간을 만드는 일이 되고 만다. 구세대가 하기 싫은 일을 댓가는 조금받고 미친듯이 하는 신세대 말이다. 


나는 질문하고 싶은 것도 있다. 내가 말한 대학원의 현실이란 과거일까 아니면 현재진행형일까. 어떤 사람들은 다 과거의 일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권위주의와 불투명성이 존재하고 신세대의 무지가 여전하다면 희생과 착취와 욕망의 메커니즘은 반드시 작동하고 만다는 것이다. 다만 무지한 신세대와 눈을 감은 관행에 익숙한 사람들의 눈에만 잘 보이지 않을뿐이다. 


내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또 있다. 이것이 과연 대학원의 현실이기만 한것일까 하는 것이다. 진실을 확인하는 한가지 방법은 당신이 기성세대라면 당신의 아버지가 기성세대라면 묻는 것이다. 나는 과연 내 자식과 남의 자식에게 똑같은 조언을 해주고 있는가. 약간 다른듯하면서 결국은 결과는 100% 다르지 않는가? 참고로 자식을외국으로 보내는 교수들이 한국에 엄청많다. 대학교육을 상품으로 생각하자면 한국국민들에겐 국산품쓰라고 선전하면서 자기자식들에겐 그런건 몸에 안좋으니 꼭 미제쓰라고 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글을 쓰고 있는 사람은 자기만 천사고 양심있으며 신세대를 걱정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현실은 우리는 한국 사람이지 일본사람도 미국 사람도 유럽사람도 아니다. 나는 결코 유럽이나 미국이나 일본과 다르다고 해서 모든 사람을 싸잡아 비도덕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어느 나라나 어떤 기준으로든 나쁜 사람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다. 우리나라도 있고 외국도 있다. 다만 권위주의와 불투명성, 기성세대의 암묵적 묵인아래 행해지는 관행등이 만들어 내는 어둠속에서 그 나쁜 사람들은 유달리 칼을 휘두른다는 것이다. 


집안에 쌀이 없으면 다들 부자인 옆집보다 궁하게 살도리 밖에 없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것을 체념하라는 뜻은 아니지만 나는 왜 옆집 부자아이처럼 비싼 옷이 없냐고 투정해서는 안된다. 소용도 없다. 다만 그 집안이 불투명하고 권위적이어서 누구는 잘먹고 잘사는데 누구는 정도이상으로 굶주리고 있다면 이것은 문제다. 나는 기성세대에게는 관행에 둔감해진 가운데 우리의 아이들이 말라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을 말하고 싶다. 나는 신세대에게도 둔감해지지 말고 눈을 크게 뜨라고 말해주고 싶다. 사회가 코앞만 보라고 재촉하는 사회이긴 하지만 그래서는 삶의 비밀을 뭐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크게 보지 못한다면 당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현실은 당신에게 주입된 환상에 지나지 않을수 있다. 


어떤 사람은 그렇다고 정부가 프로젝트를 발주하고 연구비를 주는게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라던가 그런 일을 막기위해 이런 저런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일단 기본적으로 학문의 발전이란 정부가 물주고 관리하고 키우는 것이라는 발상자체가 틀려있을수 있다고. 학문적 발전이란 학문하는 문화가 있어서 그것이 자생적으로 클때 결국 열매가 맺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학문이나 과학이란 한국에서 학문에 관심있는 사람, 과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의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그것자체에는 별 관심없는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거기에 손을 뻣치고 시스템을 만든다. 자신이 학문에 대해, 그 가치판단에 대해 깊은 고민이 없었던 사람들이 어떤 시스템이 되어 간섭할때 그것은 종종 학문의 근본을 파괴하는 일이 되고 만다. 겸허하게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각각의 개인이 가진 가치판단과 우리 사회가 가지는 가치판단에 대한 고민부터 하고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해야 한다. 제발 정부든 언론이든 도레미도 잘 모르면서 오페라 극장타령하듯 노벨상 노벨상 타령좀 하지 말고 기본에 충실했으면 한다. 과학이나 학문은 노벨상 타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다. 명성과 돈을 위해서라면 노벨상 타는게 로또복권 사는 것보다 가능성이 낮을 것이다. 자신은 한국과학발전에 한팔 거들고 싶은 열정이 있다고 말하는 언론인이나 정치인들이 있다. 그러나 이 열정에 차서 한국과학을 키우겠다는 사람들이 망친 위대한 과학자적 자질을 가진 인재들이 한국에 널려있을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과학이 뭔지 학문이 뭔지 전혀 생각도 해보지 않았을수도 있다. 모든일이 그렇듯 좋은 세상은 역시 자연스런 관심과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다. 싸구려 이데올로기와 세계관에서 나오는 의무감따위는 하찮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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