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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자본주의와 노동 그리고 자기찾기

사회적 신용의 붕괴 2 : 개인으로서의 문제

by 격암(강국진) 2011. 1. 26.

11.1.26
지난번 글에서는 사회적 신용이라는 분야에서 생기는 일이 경제분야에서의 카드돌려막기와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기반으로 해서 온갖 유형 무형의 도움을 받습니다. 부모님이 자식을 믿는게 그렇고 상사가 부하직원을 믿는게 그렇고 반대로 자식이 부모를 믿는것도 그렇고 부하직원이 상사를 믿는 것도 그렇습니다. 


믿기때문에 사회적 관계에 신용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저런 도움을 빌려올 수 있습니다. 그런 도움을 받고 그것을 돌려주고 하는 일은 그런데 마치 폰지사기나 양심불량한 사업가가가 그러는 것처럼 엄청난 규모로 커질 수가 있습니다. 바로 카드돌려막기처럼 판을 벌리기 때문입니다. 실제 자기가 가치를 만들어 내는 일은 없이 이쪽의 신용을 저쪽의 신용으로 돌려막습니다. 더 있는 사람인척, 더 대단한 사람인척하면 더 많은 신용대출이 가능해 지는 것이고 그럼 실제로 빌려온 신용을 돌려막을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어떤 타이틀이라도 따게 된다면 이 사회적 신용대출은 더 쉬워집니다. 전교에서 1등하는 아이, 명문대 입학한 학생, 대기업에 입사한 사람, 사법고시를 통과했거나 의사자격증을 딴사람같은 것이 그런 것이죠. 그런 타이틀을 따면 사람들이 더 쉽게 이런 저런 일을 도와줍니다. 그래서 자리나 자격증 자체는 순간에 그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망각되고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로 믿어집니다. 이건 마치 내 신용카드 대출한도액이 천만원에서 1억으로 증가하는 순간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고 믿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요. 신용대출한도가 늘었다는 것은 어떤 능력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지만 결국 수입자체가 늘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걸로 뭔가를 사면 결국 갚아야 합니다. 

이점이 미묘하고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가 느끼기엔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잘 생각해 보지 않으며 그 결과 그들의 인생은 점점 더 수렁에 빠져들고 원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돌려서 여기 한 무모한 사업가가 있다고 해봅시다. 이 사람의 사업자체는 변변찮은 것입니다. 다달이 적자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용케도 많은 빚을 끌어다가 쓸 수가 있었습니다. 사업자체는 적자인데 점점 더 규모가 커지면서 빌려오는 빚의 규모도 더욱 커지고 이 사람은 자신이 더욱 커다란 사업체의 사장이 되었기 때문에 출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이 있을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과연 어느날 빚을 끌어다 쓰는 것을 중단할 수 있을까요? 그러기 힘듭니다. 왜냐면 이사람이 빚내기를 중단했다는 소식이 들리는 순간 -그래서 동시에 지출도 줄였다는 소식이 들리는 순간- 수많은 채무자들이 몰아닥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적자가 나건말건 사업이 계속 돌아야 빚을 갚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빚이 엄청나져 있는 상태에서 사업 접겠다고 하면 그 순간 사업이 진짜로 망합니다. 

이것은 사업의 이야기입니다만 이것은 동시에 우리 대부분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여기 고등학교 졸업하고 그냥 우체국 직원같은 것으로 자기 고향에서 계속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가진 아이가 있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불행인지 행운인지 이 아이는 공부를 잘했습니다. 공부를 잘하니까 명문대에 들어갈 가능성이 크고 그래서 인지 주변사람이 칭찬하고 다시 봐 줍니다. 정말로 명문대에 들어가자 대우가 더욱 좋아집니다. 아이는 그것을 더욱 즐깁니다. 자신의 소박한 꿈은 언제든지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그것은 멀리 미뤄두고 이제는 뭘하면 더 사람들이 자기를 대단한 사람으로 봐줄것인가에 신경을 더 씁니다. 대중의 꿈이 내 꿈이 된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더욱 대단한 사람이 되고 더 많은 인기를 얻고 더 많은 권력을 즐깁니다. 그리고 더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이런 저런 투자를 하고 의존하게 됩니다.

저는 반드시 명문대들어가고 유명인이 되고 하는 일이 나쁘다고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살건 그것자체가 좋고 나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실속은 없이 신용대출의 한도만 늘리는 방식으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받은 것을 착실히 돌려주고 남을 오히려 도와주고 스스로를 아끼면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파산직전에서 헤매는 사업체의 사장이 맘편할리 없지요. 겉으로 어떻게 보이던 초조하게 살아야 하고 겉으로는 한가롭고 여유있게 사는 것같지만 알고보면 피말리게 바쁘게 살아야 합니다. 다만 있는 척을 해야, 아직 여유가 있다는 허풍을 떨어야 채무자들이 몰려오지 않고 더 신용대출을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척하는 것뿐입니다. 

주변 사람들의 믿음과 신용을 끌어다 쓰는 달콤함에 젖은 사람은 물론 결국 신용파산이 되면 그의 채무자들에게 큰 피해를 입힙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스스로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신용파산이 되지 않아도 나중에는 빚더미위에서 자기 인생을 자기가 결정할 수 없게 됩니다. 달콤한 칭찬과 인기 그리고 권력을 몇번 즐기고 그 할부갚는다고 평생 노예처럼 일하게 되기 쉽습니다. 허세로 나도 BMW를 살 수 있어라고 외치고 자동차 딜러에게 왕이라도 된 것 같은 대접 좀 받고 기뻐하지만 그 BMW값을 낸다고 평생 바쁘게 사는 꼴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삶에는 즐거움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기 쉽습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내적인 자기자신은 황폐한 황무지처럼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쉽습니다. 자기가 누구인가를 생각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느끼는 시간을 가지기 보다는 남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썼으며 나중에는 너무 바빠서 앞에 던져진 일을 하느라 하루하루가 가버리기 때문입니다. 

타이틀이나 지위로 신용을 끌어다 쓸 때는 좋았는데 이젠 그 타이틀이나 지위가 족쇄가 되어 나를 기계처럼 만듭니다. 절망적 상황에 빠진 기업체 사장은 범죄를 저질러 돈을 충당할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마찬가지로 허세의 성을 높이 쌓은 사람은 그 허세의 성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둘씩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합니다. 약자를 이용해 먹고 마음약한 부모를 등쳐먹는 식으로 행동하기 쉽습니다. 처음엔 조금씩 조금씩입니다. '남들도 그렇게 하는데 뭘'이라고 하면서 관례로 생각하고 꺼림직한 일을 합리화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정신차려보면 무자비하고 인간성을 찾아보기 힘든 중년으로 변하기 쉬운 것입니다.

옛날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의 어떤 고위관리가 길을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아주 가난한 집에서 3대가 모여서 즐겁게 이야기하고 밥을 먹는 것을 집밖에서 듣게 됩니다. 그 순간 그는 남들은 자신을 대단하다고 칭찬해주고 자신앞에서 쩔쩔 매기는 하지만 자신은 실상 자식과 손자손녀와 즐겁게 식사를 하는 저 늙은 농부보다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높아져봐야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이 항상 있어서 그들 앞에서 쩔쩔매야 할 뿐이고 자기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과 드잡이질을 해야 할뿐입니다. 그 안에서 고전분투하며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이 살면서 단지 폼만 재고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이야기는 이 관리가 자리를 버리고 낙향한다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만 실은 현실에서는 그럴 수 있을 정도의 사람도 드믑니다. 권력을 버리고나면 득달같이 자기에게 피해입은 사람들이 달려와 나를 억압할 것이기 때문에, 아니면 당장에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쓸쓸한 처지가 될 것이기 때문에 권력과 지위를 놓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빚장이가 무서워 자기인생을 살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우리는 이런 저런 일이 꿈같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을 많이 듣습니다. 이런 저런 사람들이 훌룡한 삶을 살았다거나 부러운 삶을 살았다는 말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의 가치와 어떤 삶의 진정한 내막은 곰곰히 생각하지 않으면 오해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몸이 편하게 사는 것이 반드시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루에 3-4시간밖에 못 자면서 평생을 살아도 그 삶은 행복하고 뿌듯한 것 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숫자나 외양이 전부는 아닙니다. 남의 왕관이 내 머리에도 맞는지 왕관이라고 다 쓰면 좋기만 한지 생각해 봐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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