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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자본주의와 노동 그리고 자기찾기

자아의 공중 부양

by 격암(강국진) 2011. 7. 8.

11.7.8

얼마전에 김병만이란 코메디언이 배우 김정은에게 에드립으로 키스를 해서 다음 초기화면을 뒤덮은 일이 있었다. 먼저 밝혀 둘것은 나는 누구도 비난하거나 무슨 도덕적 엄숙주의를 설파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이 사건을 꼬투리로 해서 우리가 가진 자아에 대한 생각이 기묘하다는 것을 정리해 보고 싶을 뿐이다. 

 

서로 합의하지도 않았는데도 김병만이 김정은에게 키스를 했다. 그런데 김정은이 김병만을 성추행으로 고소한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김정은이 김병만에게 마음이 있어서 그런게 아니라 김정은은 서로 키스를 한것은 무대위의 배우와 코메디언으로서의 김정은과 김병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배우는 연기라고 할때 키스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스킨쉽도 기꺼이 한다. 연기니까. 이것은 개인으로서의 내가 아니라 배우로서의 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니까. 그런데 배우로서의 나와 개인으로서의 나는 왜 그렇게 다를까. 뭐가 다를까. 

 

약간 미묘한 다른 예를 들어보자. 에리히 프롬은 소유나 존재냐에서 현대인들이 명사형을 동사형대신에 많이 쓴다는 것을 지적했다. 즉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대신에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랑을 잃어버렸다거나 사랑을 불태운다거나 하는 표현도 그렇다. 

 

명사형은 '나'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표현대신에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마치 사랑을 하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 어떤 다른 존재가 있어서 그렇게 한다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직접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을 간접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만들고 일종의 책임회피를 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랑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늘에 던져진 공이 땅으로 떨어지는 물리적 법칙을 어쩔수 없듯이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떤 법칙에 따라 일이 일어난다는 식인것이다. 

 

배우의 예에 있어서는 우리는 배우라는 진정한 내가 아닌 하나의 또다른 객체를 만든다. 직업이니까 어쩔수 없지 않는가. 직업으로 뭔가를 할때의 나는 내가 아닌것이 아닌가. 명사사용의 예에 있어서도 우리는 어떤 객체를 만들어 내서 저것은 내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내가 완전히 조절할수 없는 어떤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아라는 것은 생각만큼 우리 육체와 밀접하게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 유체이탈을 하듯 다른 곳으로 부분적으로 옮겨지기도 하는 것같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아자체로 생각하지 않고 대리인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두 남녀는 서로 섹스를 하는 것을 상상할수 없다. 그러나 직업적으로 필요하다는 이유로 그런연기를 할수는 있고 거기에 몰입할수도 있다. 만약 애니메이션에서 그림이 움직이고 목소리만 빌려주는 경우라던가, 혹은 로보트나 인터넷 게임 캐릭터를 각자 조정해서 섹스를 하는 경우라면 이것은 '내'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평상시에는 할거라고 생각되지 않는 일도 기꺼이 쉽게 할것이다. 그것은 자아투사를 통해 부분적으로는 대리 체험을 하는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책임회피를 하는 일이 된다. 그러나 곰곰히 따지면 어디서 어디까지가 자아인지는 애매하기만 하다. 

 

신경과학분야에는 이런 이야기가 연상되어지는 재미있는 실험들이있다. 예를 들어 고무손의 실험을 생각해 볼수 있다. 여기서 피실험자는 자기 손을 볼수 없는 탁자에 앉는다. 그리고 누군가가 탁자위에 있는 고무손을 만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경우 탁자위의 고무손이 만져지는 것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실험자의 손을 누군가가 만질수 있다. 이렇게 동시적으로 자극을 받는 경우 많은 사람들이 곧 그 고무손을 자기 손인것처럼 느낀다. 그래서 자기손의 위치가 어디에 있냐고 물으면 그 고무손의 위치에 가깝게 대답한다. 비슷한 방식으로 유체이탈같은 현상을 일으킬수 있다는 실험도 있다. 이런 반응이 매우 높은 사람은 정신분열증이 발병할 확율이 높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배우도 괴상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인척행동하고 슬프지 않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흐르는 사람들이다. 혹시 훌룡한 배우의 소질을 가진 사람과 정신병이 발병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의 차이는 별반없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로 이런 자아의 유체이탈, 자아의 투사를 시도하고 이용한다. 전부다가 아니라면 많은 경우 결국 그것이 우리에게 정신적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세상을 설명하는 가장 훌룡한 설명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제 내 몸뚱아리를 조정했던 것은 오늘 이 몸뚱아리를 조정하는 나와 같은 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기묘한 인간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 생각은 매우 불만족스러운 나와 세상에 대한 설명을 준다. 오늘의 나는 어디에서 온건지, 어제의 나는 어디로 간건지 알수가 없다. 그러나 장점도 있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라면 어제 내가 살인을 했건 은행에서 돈을 빌렸건 그걸 책임질 이유가 없다. 이런 걸 장점이라고 한다면 장점이지만 단점이 너무 많아서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을 택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수많은 정체성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엄청난 혼돈을 겪을 것이다. 사형집행인이 좋은 예다. 사형집행인은 사법부가 내린 판단에 따라 사형수를 죽일 것이다. 이때 사형집행인은 물론 자신이 그 사형수를 살인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섹시댄스를 추는 여가수가 평상시는 좋아하는 남자의 손을 잡는것도 부끄러워했지만 무대위에서는 거의 성행위나 다름 없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거나 가장 가족에게 인자한 군인이 전쟁터에 나가면 가장 잔혹하게 적군을 죽일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여러가지 행동과 실천을 스스로의 자아를 가지고, 적어도 몸과 자아가 동일한 것이라는 고전적 개념을 가지고 행할수가 없다. 우리는 여러가지 시스템을 만들고 그안에서 어떤 기계가 되고 논리적 부품이 되어 행동해야 하며 그경우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일정부분 빼내올 필요가 있다. 그경우 우리는 판단하고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고무손의 실험이 보여주듯이 우리는 학습된 결과로 자아를 인식하기 때문에 판단하지 않고 느끼지 않으면 판단하고 느끼는 능력이 상실되고 실제로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일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거지를 보면 '아 저거지는 가난한척하는 사기꾼일거야'라고 생각하게 되고 위험에 빠진 여자를 봐도 '저사람을 도와주면 결국 복잡한 문제에 빠질텐데'하고 이성적 사고에 들어가게 되기 쉽다.

 

그걸 넘어서서 나중에는 아예 자기가 누구인지 절대 알아낼수 없을것같은 혼돈에 빠질지도 모른다. 우리의 자아는 여기저기로 흩어지고 현실처럼 보이는 것은 모두 누군가가 만들어 낸 가상의 개념들로 구축된 가상세계고 그 가상세계를 만든 사람도 실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또다른 기계로 정해진 일을 하고 있을 뿐일지 모른다. 그렇게 해서 던져진 돌멩이가 다른 일이 없으면 계산된 장소에 떨어지듯이 개개인은 탄생하는 순간 죽을때까지의 일이 결정되고 마는 것일수도 있다. 

 

사람들은 갱단영화를 보면서 갱단두목이 되고, 신데렐라 이야기를 보면서 신데렐라가 되며, 재벌들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드라마를 보면서 재벌이 된듯한 착각에 빠진다. 왕이 주인공인 사극만 계속보면서 이세상일은 전부 왕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따라서 왕의 고충을 잘알아줘야 세상이 잘돌아간다는 이데올로기를 배운다.

 

국가대표 축구팀이 이기는 것에 환호하면서 모든 한국인이 하나되는 감동을 느끼는데 이것은 현실사회에서 생기는 사회에 대한 불만감을 크게 줄여준다. 슈퍼스타케이같은 가수 경연 프로그램을 보면서 1등이 모든 것을 다가져가는 시스템이야 말로 정의로운 것이라고 설득당한다. 

 

어느새 우리는 질문을 던지기를 중단한다. 평창 올림픽같은 것을 하면 무조건 좋은 것이다. 빨갱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무조건 나쁜것이다. 우리는 뭐가 좋은지 뭐가 나쁜지 다 알고 있다. 다만 부끄럽게도 개인적인 참을성이 없고 세상에는 나쁜 인간이 많아서 그 정의가 실현되고 있지 않을 뿐이다. 

 

일이 이쯤되면 사회는 윤리적 붕괴를 겪는다. 기계로서의 사회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정해진 일만 하는 부품같은 세계는 엄청나게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예측하지 못한 오작동에 대해 속수무책이 된다. 다들 자기가 해야할 일에만 신경을 쓰므로 단한번의 오작동이 사회전체를 집어삼켜도, 윤리적 무감각에 빠진 사람들은 내일이 아니라면서 막지 않는다. 

 

기계로서의 사회가 거대한 몸집을 쓰러뜨리고 있는 것을 보면 기계가 된 사람들은 말한다. 핸들을 너무 오른쪽으로 꺽었기 때문이다. 왼쪽으로 꺽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훌룡한 부품이 필요하다. 자기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부품들이 있다. 그것들을 추방해야 한다. 

 

이러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자아는 공중부양하고 있다. 어디가 자기 집인지 잊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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