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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불짜리 정치적 질문 : 우리는 가치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by 격암(강국진) 2011. 3. 3.

머릿말


최근 김규항-진중권 논쟁에 있어서 논쟁에 알맹이가 없다는 말을 한적이 있다. 현재의 사회, 정치적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완전히 뒤로하고 작은 표현과 정의의 문제, 밥그릇문제로 티격태격하는 것에 불과한 모습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영어표현에 백만불짜리 질문이라는 표현이 있다. 핵심적인 질문, 중요한 질문을 말하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과연 대선이 2년이 남지 않은 현재의 사회에서 백만불짜리 질문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치적 통합의 열쇠는 무엇인가 혹은 다음 대선에서 핵심적 주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 내가 결정적인 답을 낼수 있다거나 전혀 듣도 보지 못한 신기한 답을 낼수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만 종종 고의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잊혀지고 있는 것을 상기시킬 필요는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 


우선 정치적 통합의 열쇠는 무엇인가라던가 다음 대선에서 핵심적 주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때 스스로의 마음에 바로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그걸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의 현재를 말해준다. 만약 첫번째로 떠오르는 것이 정당연합이라던가, 경제문제의 해결이라면 나는 그게 옳지 않으며 그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당연합따위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현실적'인게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의 통합만이 옳다는 생각이 너무 뿌리가 깊은 것이다. 즉 사회 정치적으로 영향력있는 단체나 사람들이 연합하면 국민은 따라오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최고 정치집단은 친정부도 아니고 반정부도 아니다 무당층이다. 또 친정부건 반정부건 정치사회적 유명인을 지극히 존경하고 그들에게 깊은 신뢰심을 보이는 사람은 더더욱 적다. 


물론 유명한 사람들은 내가 나서서 연설하면 내말을 듣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하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절대적 숫자만을 보기때문이다. 비율로 하면 그렇지 않다. 대부분은 당신들에게 큰 기대도 관심도 없다. 이럴때 그저 모이기만 하면 그래서 반정부의 깃발을 올리면 그게 국민을 위해 뭘 이루게 되기는 할까. 아니 그 모임이 안정적이기는 할까. 그런 모임이 가능하기는 할까. 


열린우리당이 국회를 장악했을때의 현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람의 연합이전에 연합을 가능하게할 정신적 지주, 가치적 중심이 있어야 한다. 실은 그게 없이 모이는 것은 이익을 위한 야합에 지나지 않으며 이익에 따라 바로 깨지고 만다. 내부적 분열과 충돌에 되는게 하나도 없다. 


나는 인간의 연합과 집단이 고상한 가치로만 이룩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대한민국의 헌법이나 미국의 건국정신에 대해 이야기할수 있다. 한나라를 유지하는 것은 역시 현실적 이익, 중심집단의 조직능력같은 것일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교과서에 나오는 헌법이나 건국정신같은 것은 실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아무 힘이 없는 것같아도 헌법이나 건국정신같은 것은 분쟁이 극에 다달았을때 결국 분쟁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힘이 된다. 왜냐면 그게 바로 그 나라를 만든 사람들이 '합의'한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그 집단의 정치성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연합을 먼저 생각하면서 우리는 어떤 집단이 뭉칠것인가, 혹은 반한나라당이나 반정부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뭉칠것인가하는 식으로 물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친정부적 사람들과 반정부적 사람들은 백제와 신라가 싸우듯 다른 나라사람으로 싸우는게 아니다. 한쪽이 한쪽을 억압하는 관계가 아니라 다같이 살아야 할 사람들이다. 우리는 무릇 인간이라면 모두가 공감할만 한것이며, 우리 사회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을 생각하고 먼저 가치적 중심, 목표를 세워야 한다. 요식행위같이 느껴지지만 실은 그런 기본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깊이있게 고민할수록 생겨나는 집단은 아름다울수가 있고 튼튼할수가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현실에서 우리가 대선같은, 국민들이 함께 사회적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국면에 처하여 질문해야할, 추구해야할 핵심적 질문, 핵심적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역시 경제문제의 해결인가?


아니다. 나는 아니다라고 백만번쯤 말하고 싶다. 우리는 이미 그 지점을 여러번 거쳐왔다. 해방이후 먹을것이 없어서 가난하던때도 경제를 외쳤고 아이엠에프 직후에는 당연히 경제회복을 외쳤으며 지난번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었을때도 우리는 .경제를 외쳤다. 경제가 문제다. 경제가 문제다하는 식으로 말이다. 


경제가 문제다 경제가 문제다라고 하면서 그것에 골몰하여 사람을 뽑아보니까 과연 현재의 한국 사회가 행복한 사회가 되고 있는지, 과연 경제쪽으로는 문제가 없는지 생각해 보자. 또다시 경제가 핵심적 질문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 수준도 문제다. 우리는 사실 더이상 그렇게 가난하지만은 않다. 


이것은 비단 한나라당같이 산업세력을 지지세력으로 하는 정치세력만의 문제도 아니다. 소위 진보나 노동운동계열을 말하는 사람들도 실은 종종 경제 경제만을 외친다. 더 많은 분배를 외친다는 점에서 정치는 경제문제로 수렴하고 만다.  


질문되어져야만 하는 것, 


나는 이제 우리사회가 고민해야 하는것, 이뤄야 하는 것,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는 것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가치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은 새로운 것도 아니고 거의 종교적 질문처럼 들리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 현실에서 멀어져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남은 글에서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다. 


나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삶의 질이 중요하다라고 말할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너무나 배금주의적 분위기에 찌들어서 삶의 질이 중요하다고 말해도 흔히 물질적인 것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삶의 질이 올라가는 것은 라면먹던 사람이 파스타 먹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정신적인 균형이 깨어져 있으며 어떤 중요한 점에 있어서 장님인가를 보여준다. 


우리가 가치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논하는 것이 사회적인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나는 불우이웃돕기를 많이하자는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게 아니다. 가치있는 삶이란 화두는 베스트셀러가 된 정의란 무엇인가같은 책에서 말하는 정의라던가, 법적인 형평성 같은 이야기, 살인적인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 시스템의 개혁, FTA나 SSM같은 문제, 환경의 문제등과 깊게 연관이 있다. 


20세기 그리고 21세기에 세계적으로 그리고 한국에서 크게 문제가 된 것은 바로 탈모더니즘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차원과 다른 측면에서 이문제를 지적하고 그 해결에 나서거나 잠정적인 답을 내놓으려고 했다. 이 문제는 논리와 직관의 문제이며, 조직과 인간가치의 문제이고 세계화와 공동체지키기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식을 쌓고 더욱 정밀한 행동을 요구하는 거대한 시스템을 만들면서 우리는 뭐가 가치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고 인간이 시스템의 덕을 보는게 아니라 시스템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가 된다는 것이 현대사회의 비극이다. 


예를 들어 경제활동이란 분명 인간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에 하는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현대 경제활동의 중심에 있는 법인 즉 회사는 일단 설립되고 나면 암세포처럼 그 회사의 증식에만 관심을 둘뿐이다. 여러가지 경제적 논리가 등장하고 회사는 본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니 그렇게 하는게 당연하다고 말해져서 인간에게 적용되는 사회적 윤리가 법인에게서는 종종 망각되곤한다. 그렇게 해서 더더욱 노동자를 착취하고 사회적, 자연적 환경을 파괴하는 그래서 더 쉽게 돈을 버는 회사가 살아남는 경제적 생태계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사실 노동자라고는 했지만 착취당하고 불행한 것은 피라미드 가장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들뿐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삼성같은 회사를 보라. 그안에서 살인적인 긴장과 노동강도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을것같은가. 고졸사원에서 박사급인력까지, 신입사원에서 이사급 임원까지 모두 쫒기고 모두 초조하며 자신의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어 회사에서 짤려나갈것을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한다. 


위던 아래던 경쟁이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이 원하는 피라미드의 윗쪽은 당연히 경쟁도 더 심하다. 주말도 없이 일하고 가족과의 시간같은 것은 당연히 팽개쳐야 한다. 한칸더 올라가기 위해, 떨려나지 않기 위해. 이건희나 이재용같은 사람의 심리를 내가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현대판 황제나 황태자같은 그들도 사회적인 압력에 시달리며 괴로워할 가능성은 매우 크다. 


그러므로 시스템 전체를 보면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다. 서로 서로 쥐어짜서 서로서로 불행하게 만드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것인가? 


그러나 이것을 자각하는 것으론 전혀 충분하지가 않다. 문제는 훨씬 더 어렵다. 만약 우리가 시스템을 포기하는 것으로, 모두가 정확히 시간지키고 요구되어진 일을 기계처럼 해치우지 않으며 낭만적 삶, 대충대충 사는 삶을 살려고 하면 그렇게 살수 있는가? 도시생활이 주는 소음과 냉정한 인간관계가 싫다고 모두가 시골로 내려가 자작농으로 살면 우리는 정말 행복해 지는가? 입시가 싫다고 그냥 대학안가고 살면 행복해 지는가? 일반론적으로 말해서 그렇지가 않다. 비장하게 시스템을 탈출한다고 해도 살기 어렵고 그안에 있어도 말라죽는 것같다. 그렇지만 가끔은 또 행복하고 성공해서 사는 사람도 있는 것같아서 혼란에 처하게 된다. 


우리는 그러므로 이도 아니고 저도아닌 규칙이 없는 상황에 처한 것처럼 느껴진다.  두개의 알약이 똑같아 보이는데 한사람은 그걸먹고 건강해지고 한사람은 그걸먹고 죽어버린다. 우리의 선택은 뭐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뭐가 문제인가. 여기에 걸려 허둥지둥대는 것이 바로 대부분의 현대인이다. 


이것은 특히 21세기의 한국사람에게 중요한 질문인데 이는 우리가 가난하던 시절, 회사들이 난쟁이같이 작던 시절에는 사회가 고도로 조직화되어 있지 않으므로 엉성한 데가 많았기 때문이다. 입시공부를 생각해 보면 사실 몇십년전에 입시공부가 더 어려웠다. 영어는 예외일지 몰라도 고등학생들은 요즘 고등학생들보다 더 공부하면 공부하지 덜하지 않았다. 내용도 더 어려운 것이라서 서울대 같은 곳에서 벌써 10년전부터 신입생들의 수학이 너무 수준이 낮아서 교육이 어렵다는 불평이 나온 판이다. 


그런데 또 그시절에는 놀기도 많이 놀았다. 말하자면 규격화가 덜 진행되어서 각자의 흥미와 삶을 살 공간이 있었달까. 어느시절을 말하냐에 따라 다르지만 적어도 초등학교시절부터 과외에 학원에 바쁘게 다니며 모두가 똑같은 것을 공부하면서 지쳐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대학에 가면 놀았고 그러고도 회사에 취직은 다들 잘되었다. 


21세기 사회는 그렇지가 않다. 유치원때부터 취직걱정한다. 취직에 바람직한 공부를 한다. 너무 갈아서 칼날이 부러질것만 같은 칼같은 사람이 드글대는 것이 사회현실이다. 모두가 아주 일찍부터 사회라는 시스템에 구속되고 탈출할 길이 없고 그것에 밀려서 체력을 다할때까지 아는것을 다 토해낼때까지 일하고 나서는 빈껍데기가 되어 버려질까봐 두려움에 떤다. 그런데 그 시스템을 어떻게 탈출할지 모른다. 종종 많은 사람들이 그 시스템에 의해서 키워진 장님이기 때문이다.  


핵심은 가치다. 


메뉴얼대로 따라하고, 시스템에 지나치게 적응되면서 기계적 인간이 되고 하는 사람들이 장님이 되고 감각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그리고 시스템에 있을수도 없고 탈출할수도 없는 답없는 감옥에 갇힌 상황처럼 현실이 느껴지는 것, 그것들을 극복하는 길 그것이 바로 가치의 길이다. 그것이 바로 모더니즘의 감옥을 탈출하는 방식이다. 


문명적 성과, 논리, 시스템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한된 소용을 가진 도구로 인식하고 가치적 감수성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감옥을 탈출하는길이다. 앞도 뒤도 막혀있어서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내가 장님이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가치에 대한 장님이며 그 대표적 증상은 선택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치적 감수성을 잃을때 우리는 선택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다. 선택하는 척 할뿐이다. 그냥 습관처럼 하던대로 선택하거나 자신감이 없으므로 남을 따라하거나 특히 권위가 있어보이는 어떤 사람이나 집단을 따라한다. 실제로는 뭐하나 내가 선택하고 내가 좋다고 느끼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사회는 다양성을 잃어버리고 자발적으로 전체주의적 특성을 띄게 되며 사람들은 아주 자주 '원래 그렇다'라는 표현을 쓴다. 합리적으로 뭔가를 따지기 싫어하니까 하던대로니까 원래그렇다라고 자꾸 그러는 것이다. 


그나마 합리주의를 추구한다는 사람들도 종종 단어와 정의와 논리에 매몰되고 만다. 지난주에 유럽에서한 날씨분석을 들고와서 한국의 일기예보를 한다면 바보짓일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세상을 느끼고 옳고 그른것을 판단하고 좋고 나쁜 것을 판단하고 그 가치를 느끼기 보다는 자꾸 외적인 권위에만 매몰된다. 책을 많이 읽어도 복잡한 논리를 줄줄이 외워도 이 사람은 여전히 과거의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한 사람이며 다른 사람을 자꾸 감옥에 가두려고 하는 사람이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자 이것은 사실 남이 말해주는 답을 듣기보다는 항상 질문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힘으로 한발 한발 진도가 나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치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것을 고민하고 고민한 다음에 세상을 보면 거기에는 어느정도의 답도 보이게 된다고 생각한다. 아는 만큼 보이는 거라고 하던가. 자기가 고민하지 않고 남의 고민을 외워서는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맺는 말


내가 말한 문제는 여기서 일일히 거론할수 없을 만큼 많은 문제들에 연관이 있으며 한국 사회의 여러부분들이 이때문에 무너지고 있고 무너졌다고 나는 믿는다. 


학생들은 일괄고사를 봐야 하는가 보지 말아야 하는가 같은 문제 같은 교육문제도 그렇다. 입시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체벌은 절대금지인가 아닌가. 모든 교육에 대한 질문이 시스템이다. 그런데 부모와 선생과 지역사회라는 사회적 환경은 어디에 있는가. 위선자들이 모여서 좋은 시스템이 있으면 좋은 교육이 되나? 지역사회와 한국사회가 없는데 한국교육이라는게 있는것일까.


 우리나라의 법이 사람에 따라 고무줄 늘어나듯 맘대로 늘어나는 것도 그렇다. 국민들에겐 점점 더 많은 법적인 제한이 가해지는 느낌인데 부자들에겐 뭐든지 자유인것 처럼 느껴지지 않던가? 시스템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스템의 부속품이 아닌 하나의 살아있는 지식인, 법관, 교수, 언론인이 없기 때문이다. 살아있질 않으니 느끼는 것도 없다. 그러니 상식도 없는 것이다. 기계처럼 무정하고 공평이 뭔지 모른다. 


말은 더 할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역시 우리가 모두 하나의 키워드를 가지고 고민해 보는 일이다. 우리는 가치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게 도대체 뭔가. 우리는 그걸 어떻게 얻을수 있는가. 88만원세대라고 불리고 취업난과 경쟁에 시달린다는 20세대에서 중장년세대, 전후세대에 이르기 까지 각자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 그냥 이렇게 이대로 살면 충분한가. 우리는 가치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수 있을 것인가.


그 고민의 끝에 스스로의 마음에 물어야 한다. 지금 나는 뭘해야 하는지, 나는 뭘 선택해야 하는지. 우선 그 선택에 따르는 것부터,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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