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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본 미국 이스라엘

일본에 사는 사람의 생각 : 계획성 좋은 일본인

by 격암(강국진) 2011. 6. 17.

일본에는 장마비가 내립니다. 그렇지만 비만 안불면 비오는 거리를 걷는 재미도 좋기 때문에 방사능비라는 우려를 머리에서 쫒아내면서 즐겁게 출근을 했습니다. 출근해서 동료와 여름 휴가계획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계획성 좋은 일본인이라는 주제에 대해 좀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일본인은 뭘하던 계획한대로 되는걸 좋아하는 것 같다라는 저의 말에 그 일본인 동료는 동의한다고 말합니다. 즉 결혼도 여행도 인생계획도 계획한 대로 놀라는 일이 없이 살아가는 것을 일본인들은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일본인 부부들은 길에서 손을 잡고 걷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나이많은 세대는 그렇다고 해도 요즘의 젊은 세대도 그렇다고 하는데요. 이에는 결혼한 부부란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에 지배되는 사람들의 특징이 들어나는 것같습니다. 연애할때는 길에서 사이좋게 보이는 것에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다가 결혼하고 나면 결혼한 사람은 '원래' 이렇다면서 손잡는 것같은 것을 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본인의 보수성과 계획성은 밀접하게 연결되어서 한마디로 '원래' 이렇다라는 고정관념대로 안정되게 살아가는 것을 일본인들은 참 좋아하는 것같습니다. 이러한 점은 물론 나쁜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일본은 여러모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말해질수 있으며 이러한 점에는 이런 일본인들의 보수성이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인들은 줄잘서는 것으로 유명하죠. 이번에 지진사태가 일어났을때 세계가 경탄한 것은 카타리나 태풍 사고때 미국인들이 보여준것과는 너무도 다른 일본인들의 질서의식이었습니다. 한국신문에서는 슈퍼와 편의점이 동이났다면서 보도를 많이 했으며 물론 어느정도 그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항상 정도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죠. 심각한 국난앞에서도 침착하게 질서를 지킨다는 점에서 미국인은 물론 한국인도 일본인을 따라잡을수 없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같으면 식료품사재기한다고 진짜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당장 정부 뒤짚어 엎자고 혼란을 가중시켰을지 모릅니다. 


물론 이러한 칭찬은 줄만한 것이지만 원전뒷처리에 있어서 미숙함을 보이는 여러 점에서 일본이 비판받고 있는 것에서 보이는 것처럼 좋기만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좋은 것도 분명히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일본의 문제점은 이번 원전사고 이후에도 여러번 지적되었으며 일본사회에서 끝임없이 지적되어지는 이점이 그리 쉽게 고쳐지는 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이걸위해서 영화 이야기를 좀해볼까 합니다. 


나이가 좀 있으신 분은 부르스 윌리스의 다이하드 시리즈를 기억할지 모르겠습니다. 액션영화라고 해서 단지 때리고 부시는 것만으로는 재미가 나오지 않습니다. 다이하드는 현란한 액션씬 가운데에 분명한 메세지를 가지고 만들어 졌습니다.  즉 메뉴얼대로 하고, 거대한 시스템의 명령대로 하는것이 바보같은 짓이라는 겁니다. 엘에이에서 뉴욕으로 아내를 만나러온 존 메클레인 (브루스 윌리스)는 테러를 가장한 도둑들의 움모에 맞서서 싸웁니다. 여기서 극적으로 계속 들어나는 것은 도둑도 시스템을 잘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면 경찰과 정부가 어떻게 반응한다는 것을 잘 이해합니다, 그걸 이용해서 심지어 열수없는 금고를 FBI가 대신 열어주게도 만듭니다. 존은 진실을 알고 거기에 맞서서 싸웁니다만 시스템은 진실을 외면합니다. 메뉴얼대로 하다보니 오히려 유일한 희망인 존메클레인에게 총질을 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영화로 여러번 만들어 진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를 다이하드를 연상하면서 보면 전혀 다른 영화지만 완전히 똑같은 주제의식을 가지고 만들어 졌다는 것을 알게하는데요. 그게 바로 춤추는 대수사선이란 영화입니다. 대단한 인기를 끈 원작 드라마이후 영화도 3편이나 만들어졌는데요. 항상 그 주제는 이겁니다. 현장의 형사가 아는 진실을 외면하고 위에서 시스템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무능하고 바보같다. 현장의 형사인 영업사원 출신 형사 아오시마는 현장에서 느끼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지만 이게 결국 시스템의 방해만 받습니다. 그러나 물론 영화에서 항상 정의를 달성하는 것은 아오시마죠. 


세계적 인기를 끌어던 다이하드는 물론 춤추는 대수사선도 인기가 있었으니 이말은 결국 수십년전부터 일본사회에는 메뉴얼대로 따라하는 것이 나쁘다는 메세지가 공감을 얻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일본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일본인이 바보라서 그런게 아닙니다. 그건 일본인의 장점도 단점도 모두 서로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방식이란게 그렇게 쉽게 바꿀수 있는게 아닙니다. 일본인을 죽게 만드는 것이나 일본인을 세계속의 부자국민으로 만들고 그나마 삶의 수준을 유지시키는 것이나 같은 특징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기 때문이죠. 대안이 존재하고 위험한 문화적 점프를 할 동력도 있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종교, 문화, 철학, 과학 모든 것이 융합되어서 삶이란 어떤 것인가, 인간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대안적 고민이 등장할수 있어야 진전이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과연 어떤 과거의 문화에서 대안을 찾을수 있는 것인지, 지구상의 어떤 문화권 예를 들어 잘나가는 미국문화가 현대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를 돌파한 성과를 보여주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실은 미국 문화가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 21세기의 현실이라고 생각됩니다. 세계적 경제위기와 안보위기, 환경위기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계획성이란 어떤 논리적이고 법칙적인 질서가 세계에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어제통했던 법칙이 내일도 통한다는 가정이며 저기서 옳았던 것이 여기서도 옳았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계획을 잘세우자는 말은 항상 옳은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도 가정이 필요한 것이며 경우에 따라 크게 보면 바보같은 일이 될수 있습니다. 


정약용의 글들을 보면 계획세우는 것의 허망함에 대해 논하는 경우가 몇가지 있고 블랙스완 같은 책도 열심히 미래는 예측할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복잡계 이론을 적용하는 사람들도 사회현상의 예측불가능성을 열심히 이야기하고 말이죠. 


예측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가지 전략이 있는 것같습니다. 하나는 예측불가능한 것을 예측 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하나는 즉흥적인 판단을 제대로 할수 있도록 민감성을 늘리는 것입니다. 


예측불가능한 것을 예측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더 커다란 사회적 신뢰망을 만들어 냄으로서 가능합니다. 저는 신뢰망이라고 했지 시스템이라고 안한 것을 주목했으면 합니다. 사회복지를 생각해 봅시다. 누가 사업했는데 대박나서 졸지에 거지에서 엄청난 부자가 됩니다. 거의 비슷한 누구는 실직해서 거리에서 유랑하다가 죽는데 말입니다. 그 차이가 뭔지를 정확히 예측할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신뢰를 통해서 대박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돕고 사는 것이 바로 예측불가능한것을 예측가능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결국은 대박나서 성공한 사람은 또 다른 예측불가능한 치명타때문에 졸지에 망할수도 있습니다. 그걸 막기위해서 엄청난 투자를 하고 안전책을 찾지만 결국은 인간들이 서로 믿고 신뢰하는 것보다 그게 더 비싸집니다. 현대사회가 복잡하고 예측불가능해지고 있다는 것은 더더욱 강력하게 신뢰망을 짜고 뭉칠수 있는 힘의 중요성을 크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단순히 서로 믿자라고 구호만 외쳐서 되는 일은 아니고 서로간에 의사소통의 형식이 만들어지고 문화적 변화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요즘 SNS열풍이 불고 있는데요. 사실은 이것은 인터넷 혁명이 만들어갈 미래의 일부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뭉쳐서 집단지성을 만들어 냄으로서 불확실성을 감소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두번째 전략은 알고 있고, 예측하고 하는 능력이상으로 느끼는 능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지식은 남들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알려진 지식을 사용해서 행동하면 그것은 다이하드의 악당에게 당하는 시스템처럼 무력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걸 넘어서서 단순해지지 않아야 이용당하고 위험에 빠지지 않는 것이죠. 그러자면 창의적이고 예측불가능한 느끼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뭐 첫번째나 두번째나 그리 쉽고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이글은 일본의 문화적 침체랄까를 말한 셈이 되었습니다만 사실 제가 보기엔 일본은 적어도 한번은 그런 점프에 성공했습니다. 막부시대에서 메이지 유신으로 문화적 점프를 성공적으로 이뤄냈고 그결과 일본은 세계적 대국으로 성장했던 것입니다. 전쟁과 피의 숙청속에서 이뤄진 결과 입니다. 쉽사리 일본인들이 무능하다고 말할수는 없습니다. 한국은 그런 점프를 한번이라도 성공적으로 이뤄냈는가라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화려함이야 어떻건 현실은 답답한것은 사실인것 같습니다. 일본인들도 답답해 합니다. 문제는 점점 악화되어가고 있구요. 세계최고수준의 국가채무라는 것이 잘보여주듯이 말입니다. 물론 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이겠죠. 한국에서 소위 아시아적인 대안적 가치라는게 제대로 정립될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한국은 인터넷 활용을 아주 잘하는 나라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래는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느끼는 능력도 있지 말아야 하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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