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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본 미국 이스라엘

일본에 사는 사람의 생각 : 한국인을 한국인이게 하는 것

by 격암(강국진) 2011. 6. 6.

일본인을 일본인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 답은 그게 뭐가 되었든 한계를 가진 것이다. 실제로 세상에는 일본인 이란 사람이 있는게 아니라 1억 3천만이라는 다양한 사람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답을 누가 하는가에 따라 답이 달라질 것이다. 서양인의 입장에서는 중국과 일본과 우리나라가 모두 비슷해 보일테지만 한국인이나 중국인이 일본인을 볼때는 자신과 일본을 가르는 경계선을 더 자세히 볼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를 전제하고 말했을때 일본민 전체를 보았을때 일본인을 일본인 답게 만드는 것을 하나만 꼽아보라면 뭐가 있을 것인가. 나는 그것이 은혜입은 것은 갚는다는 신의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나아가 일본은 이 신의의 정신때문에 성공했고 신의의 정신때문에 망하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본래 어떤 집단의 정체성에 해당하는 것은 성공과 실패 모두의 원인이 되는 법이다. 


은혜입은 것을 갚는다는 신의의 윤리적 덕목은 물론 질서를 창출한다. 질서는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윤리적 문란함때문에 아무것도 믿을수 없는 사회적 상황보다는 질서가 있는 쪽이 당연히 좋다. 즉 게임의 법칙이 실종된 무질서함 보다는 최상의 법칙이 아니라도 게임의 법칙이 존재하는 상황이 좋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인에게 다른 사람과 같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최상의 덕목은 은혜입은 것은 갚는다는 신의의 덕목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도 이런 덕목을 지킬것을 기대한다. 그렇게 해서 사회안에는 신뢰가 창출되고 그럭저럭 모여살수 있는 힘이 만들어 진다. 


일본식의 가족식 경영이란 결국 막부시대의 번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한번 취직하면 가족처럼 버리지 않는다. 그대신 사원은 돈받은 만큼 일한다는 사고를 가진게 아니라 자기일처럼 직장에 모든 것을 바친다. 이것이 일본회사를 한때 세계최고의 위치로 올려세운 신의의 문화다. 


그러나 은혜를 갚는다라는 것은 모든 것이그렇듯이 어두운 면이 있다. 그것은 보수적인 시스템을 만든다. 어떤 은혜는 평생을 갚아도 갚을수가 없기 때문에 한번 상하관계로 얽힌 사람들은 평생을 도와줘도 은혜를 다갚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된다. 돈없어 공부못하는 아이에게 장학금을 줘서 공부하게 해줬다고 하자. 그돈이 없었으면 그 아이는 가치없는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이후 그 아이가 이뤄내는 모든 성과의 공은 어느정도 그 장학금을 준 사람에게 은혜입은 바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이 은혜를 모두 청산할수가 있겠는가. 일본은 지독한 보수사회로 그 표면을 보면 굉장히 관대하고 개방적인 사회인것 같지만 그 윤리적 중심은 굳건하다. 


그럼 한국은 어떨까. 일본에서 베스트셀러를 만들고 싶다면 작은 은혜를 갚기위해 목숨을 던지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면된다. 사회가 계속 그런 윤리적 메세지를 던지기 때문에 일본사람들은 그런 이야기에 민감하다. 물론 베스트셀러를 만드는데 아이디어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내가 보기에 한국에서 베스트셀러를 만들고 싶다면 고생하신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면 된다. 자식의 성공을 위해 험한 고생하시다가 효도도 받지 못한채 아파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면 대개의 한국 사람들은 눈물을 줄줄 흘린다. 


한국인을 한국인이게 만든 윤리적 키워드는 효다. 그리고 한국은 이 효때문에 성공하고 이 효때문에 망하고 있다. 해방직후에 한국사람중에 대학나온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서울대를 다니면서 다른대학교수를 할 정도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가난한 나라가 성공한 이유는 부모들이 모든 것을 걸고 자식교육을 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인력의 수준이 높았고 그덕분에 모든 경제적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는 이유가 붙으면 우리나라 부모들은 대개의 모든 체면을 집어던진다. 자식을 학원보내기 위해 파출부 생활한다는 이야기가 나라마다 있는게 아니다. 일본도 치맛바람이 만만치 않지만 일본에는 일종의 계급적 체념같은게 있다. 우리는 어차피 이수준이니 너는 부모같은 사람이 되라 뭐 이런 식이다. 그러나 한국의 부모들은 항상 자기자신은 어떻건 자식은 끝없이 높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그럴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효는 자식과 부모간의 신뢰에 관한 것이다. 신뢰가 돈인 신용사회에 사는 오늘날 우리는 신뢰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는 가난했지만 부모와 자식간의 신뢰가 많았기에 그 신용을 바탕으로 성장했다고 할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이 효때문에 망하고 있다. 일본의 덕목인 은혜갚기라는것은 혈연의 개념이 없다. 따라서 양자도 부모에게 효도를 다할것이 기대되며 소니나 토요타의 사장이 자기자식을 사장으로 세우지 않는다. 효라는 것은 혈연을 너무나 강조하기 때문에 자식이 나쁜 놈이라도 자식은 자식이라면서 자식을 무조건 감싼다. 우리나라는 입양이 잘안된다. 먹을만큼 먹고 산다는 나라, 출산율 세계 최저의 나라에서 해외로 아이를 대량입양시키는 해괴한 짓을 하는 나라다. 


특히 나쁜 것은 가족윤리가 사회적으로 남용되면서 모두가 같이 망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는 따지기 어렵지만 효가 신뢰의 중심이 되어서인지 사람들은 서로 믿고 살려면 가족이 되야한다는 식의 발상을 한다. 그래서 서로 부자관계 형제관계를 뜻하는 호칭을 사용하기를 즐긴다. 직장상사나 선배나 교수는 형이나 아버지의 이미지를 가지고 아랫사람은 그에 해당하는 위치를 가진다. 즉 가족윤리가 사회로 퍼지는데 이것은 부패와 차별의 시작이 된다. 


한국사람들은 흔히 일본사람이 메뉴얼만 따라한다고 비판하지만 메뉴얼대로 하지 않는 실용정신이 한국에서 구현되는가 하면 꼭그렇지도 않다. 메뉴얼대로 하지 않고 적당히 하는 그 적당주의안에서 번성하는 것은 결국 패거리 주의다. 자기가 뭘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차별한다는 생각도 없이 그저 이런 저런 인맥을 얽힌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혜택을 주고 서로 고마워한다. 


그 부패와의 싸움은 묘하게 이번엔 가족윤리의 파괴로 가는것처럼 보인다. 결국 사회는 합리주의를 요구할수 밖에 없다. 그런데 진짜가족이라는 테두리를 남용한 결과 합리주의적인 행동방침은 단지 사회적인 관계를 보다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만드는데서 그치지 않고 가족관계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인다. 


21세기의 현재한국은 미국처럼 합리주의가 뿌리깊게 박히고 그안에서 개인의 독창성을 강조하는 문화가 생긴것도 아니고 일본처럼 굳건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통합성을 달성한 것도 아니다. 단지 극심한 윤리적 붕괴만 보인다.


한국사회를 성공시키게 한 효는 붕괴되고 그렇다고 미국사람이 된것도 일본사람이 된것도 아니다.  젊은 세대는 교육이며 결혼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고 세대간의 신뢰는 전보다 훨씬 못하다. 어느정도는 지금의 386세대가 그 신뢰를 부도냈기 때문일것이다. 그들은 부모로 부터 받았으되 그것을 돌려주지도 않고 자식에게 물려주지도 않는 세대다. 


 386세대는 한국의 인구분포에서 뚱뚱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이 세대가 한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늙어가는 세대다. 그런데 이세대는 마치 환경을 파괴해서 성장하는 공장처럼 위아래세대를 모두 황폐하게 만들면서 성장한다. 한국의 노인자살율은 엄청나게 높고 청년세대는 학비며 취업문제로 고민이 엄청나다. 부동산 문제를 만들어 낸것도 이 세대다. 부모를 버리는 최초의 세대도 이세대고 자식들에게 학비만 대줄뿐 자식들과 인간적 교류가 없는 세대도 이세대다. 


말하자면 한국의 경제적 성공이란 무형적으로 존재하던 세대간의 신뢰를 현금화한 과정이라고 정리할수도 있겠다. 그것을 현금화해서 독식한 것은 지금의 기성세대고 사회적 신뢰가 바닥을 들어내기 시작하자 한국은 겉으로 보기엔 성장했지만 점점 더 사람살기 힘든 사회가 되어 간다. 


그렇다면 효라는 것을 과감히 낡은 것으로 해야 할까 아니면 우리는 다시 효로 돌아가야 할까. 나는 사회적으로 보았을때 문화적 점프라는 것은 있을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오직 발전적 계승을 할수 있을 뿐이다. 자기를 지키면서 바꿔나갈수 있을 뿐이다. 한국인을 한국인답게 만드는 것이 효라면 우리는 효로 돌아가야 한다. 다만 발전적 계승을 통해서 뭐가 문제인지를 고쳐야 하는것이다.


우리는 가족윤리는 강화하고 가족윤리가 적용되는 범위는 축소해야 한다. 가족간의 신뢰는 강조하고 효가 모두에게 좋은 것이란것을 깨닫게 해줘야 한다. 미국처럼 복지기금을 통해서 노인복지 교육복지를 실시할수도 있지만 사실 효가 한국에서는 그역할을 해왔다. 노인되면 모두 간병인두고 노인주거에서 살게 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경제발전으로 다 좋아진것 같지만 버려지는 노인들은 전보다 더많다. 국민복지지출이 전보다 줄어서 그런것이 아니다. 3대가 같이 사는 가족의 모습을 개량적으로 바꿔야 한다. 거기에는 불편한 것도 많지만 그 장점은 한국사회가 성공한 비결의 핵심을 이룬다. 쉽게 버릴것이 아니다. 


반대로 사회적으로는 쉽사리 서로 서로 형제처럼 부모 자식처럼 구는 버릇을 없애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종종 인간적인 미덕처럼 생각되는데 한마디로 만악의 근원이다. 나는 항상 호칭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부르는가가 우리사이에 존재하는 윤리적 덕목이 어떤 것인가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꼬박꼬박 서로를 선배니 형이니 무슨 이사님이니 하고 호칭하는 문화에서 무슨 공평함이 자리잡을수 있을까. 이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영어로 이야기하거나 인터넷처럼 나이에 상관없이 아이디로 부르는 곳에서는 주류한국사회의 문화와는 전혀다른 것이 생겨난다. 이때문에 대한항공에서는 비행기사고를 줄이기 위해 한국 기장들끼리도 영어로 이야기하라고 하고 있다. 그 효과는 엄청나다. 


이 힘, 이 가족윤리 남용의 힘은 과소평가할수 없는 것이며 한국사회에 고질적인 병폐와 직통으로 이어져있다. 잘나가는 인간들끼리 서로 친형제자매처럼 얽히면 세상은 전혀 살만한 곳이 되지 못한다. 한국을 뿌리부터 개혁하려면 그것은 문화적 개혁이어야 한다. 먼저 우리의 호칭이 어떠한지, 우리의 윤리적 덕목이 어떠한지를 점검하지 않고 개혁을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짓이다. 


지금은 그저 좌충우돌로 한국인이 자기를 잃어가는 것같다. 문화적 특성이 약해지는 가운데 대량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면 한국은 그야말로 자기를 잃어버리고 난장판이 될것이다. 아무쪼록 이문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고민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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