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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역사에 대한 생각

역사에 대해 우리가 할수 없는 말

by 격암(강국진) 2011. 6. 23.
역사에 대해 말할때 우리는 종종 인과론적인 태도를 취한다. 즉 A가 있었기 때문에 B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역사의 기술이란 하나의 인과론적 고리를 연결시켜놓은 것이다. 고대시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마치 도미노에서 하나의 나뭇조각이 다음번 나무조각을 쓰러뜨리듯이 인과론적인 순서로 여러 사실들이 나열되어진다. 

이러한 것은 역사주의라고 해서 이미 칼포퍼같은 사람에게 비판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유명인사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같은 이해는 오해이며 부질없는 것이다. 

우리는 간단한 질문을 던질수가 있다. 현재의 사실을 가지고 10년후의 한국이 어떨지, 30년후의 한국이 어떨지 예측할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보기 바란다. 이미 미래예측은 처참하게 실패했다는 사실은 수없이 기록되어져 있다. 공상과학 소설들만 들쳐보기 바란다. 불과 반세기전에 2010년이 어떻게 될거라고 묘사되고 있는지. 보다 사회과학적인 예측을 바란다면 해방이후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해 서구에서 어떻게 예측했는지 보기 바란다. 불과 반세기 후에 한국이 이만큼 경제성장을 이루고 민주주의를 키워낼줄은 아무도 예측하지못했다. 역사는 예측의 실패와 놀라움으로 가득차 있다. 

이런걸 생각하고 정말 불확실한 몇가지 희미한 정보를 가지고 고구려나 신라나 조선이 이러저러하게 된것에는 이러저러한 이유가 있다고 떠드는 논리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건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건 실상 어떤 논리적 결론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믿고 싶은 이데올로기를 설득하기 위해 여러가지 사실들을 선택해서 가져다 붙인것에 지나지 않는다. 제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말이다. 

세종대왕이 없었다면 한글이 없었을것이다와 같은 명제에 대해 많은 사람은 수긍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것도 엄밀하게 말하면 모르는 것이다. 이걸 엄밀하게 긍정한다는 것은 한글창제의 업적이란 것이 한반도에 살던 민족공동체의 성과, 민족문화의 성과, 조선을 만든 사람들의 신념이 가진 결과로 보는게 아니라 어떤 굉장히 예외적인 한 개인의 성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자체가 하나의 과학적 사실이라기 보다는 가정이고 믿음이며 이데올로기다. 

더 좋은 예는 한국의 발전은 식민지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존재할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역시 역사를 인과관계로 늘어놓고 설명하려고 한다. 그들은 그럴듯해 보이는 사실 몇개를 늘어놓고 마치 뭔가를 증명한듯이 이야기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다 아무 쓸모가 없다. 어떤 이론이 정말 가치가 있으려면 일어난 데이터를 설명하는게 아니라 미래를 예측할수 있는 능력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수 있는 사회과학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게 아마도 불가능할거라는 비선형 복잡계의 연구결과만 잔뜩 쌓여있을 뿐이다. 그래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즐비한 나라가 경제적 파국에 시달린다. 예측도 못하는 논리를 가지고 뭘 증명했다는 것인가. 그건 일이 벌어진 사후에 적당히 설명을 붙인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주장에 찬동하건 반대하건 우리는 매우 단순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종류의 사회과학적 설명에 대해 지극히 심각한 의심을 할 필요가 있다. 그것들은 설명이 아니다. 설명이라고 주장할 뿐이고 설명인적이 없다. 다만 그들은 믿음을 전파하고 있을 뿐이다. 이데올로기를 암묵적으로 심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식민지시절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이 없었을 거라는 주장은 한민족의 내부적 역량이 그만큼 형편없다라는 한민족에 대한 자신의 불신을 고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거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역사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과학적 연구를 다 부정하고 있는 것일까. 어느정도는 그렇다. 그리고 어느정도는 그것들에는 몇가지 다른 의미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중의 몇가지 의미는 이렇다.

역사는 정말 단지 아무 쓸때없는 지난날에 대한 일기예보같은 것일까. 역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가르켜 준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조선이 유교의 나라이며 성리학의 나라라는 사실은 그것이 현재의 우리상태와 인과적으로 얽혀있지 않다고 해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화, 관습에 대해 설명을 준다. 말하자면 부산에서 서울에 간다고 하자. 우리는 동해안을 거쳐서 서울로 갈수도 있고 내륙으로 대전으로 갈수도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동해안을 거치지 않았다면 서울에 갈수 없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허구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동해안을 거친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흔적이 남는다. 이같은 사실은 왜 우리몸에 바닷냄새가 나는지를 설명해 준다. 왜 우리가 현재의 우리인지를 이같은 수준에서 설명해 준다. 

우리는 불교국가를 거쳤고 유교국가를 거쳤다. 그것이 우리의 문화와 언어와 국토에 흔적으로 남아있다. 역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가르쳐주는 방법중의 하나다. 다만 오만해 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이 역사적 발전의 원리를 안다는 둥하는 식으로 나가는 것은 오류다. 그것은 적어도 아직은 인간의 지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지도 모른다. 우린 물론 학문적으로 연구를 계속해 나가야 하고 그럴가치는 있다. 그러나 그 결과를 과신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가나 날씨예측을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가나 날씨를 예측할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어떤 것을 예측할수는 없다고 해도 경고를 한다는 의미는 있다. 가뭄이 계속되면 산불이 나기 쉽다는 것은 경험적 사실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산불이 나는지를 정확히 이야기할수는 없지만 이러저러한 상황에 따라 이러저러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라는 것을 이야기해서 경각심을 가질수는 있다. 그러나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이다. 이걸 원리로 알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는 성공하기 어려우니까 더 노력해야 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것이 아니라 나는 학원에 안다니니까 공부잘하기는 틀렸다라는 체념이 된다. 나는 중학교 입시에 실패했으니까 인생끝이다라는 체념이 된다. 미래는 모른다. 이왕이면 가능성이 큰 쪽으로 가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우리는 항상 매우 운수나쁜 상황에 처하기 마련이다. 오늘날의 한국에 대해서도 이러저러하므로 한국은 이미 망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미래는 모른다. 

마지막으로 믿음을 전파할때 쓸수 있다. 사실 예측이라는 측면에서 과학적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혹은 믿음의 전파라고 하는 것도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단지 우선 먼저 이것이 과학과 논리의 차원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이라는 것을 명백히 하는 경우에는 그렇다. 

이것은 믿음의 차원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말한다면 한민족이 훌룡한 문화국가를 만들어갈 내부적 역량이 있다고 이런 저런 상황적 사실들이 이것을 어느정도 암시한다고 말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한국이라는 사회를 포함해서 어떤 공동체도 논리적 사실로 내부적 구심력이 만들어 지는게 아니다. 그건 마치 자신의 연인을 바람필수 없게 탑에 가둬놓고 나는 나의 연인이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증명된 것은 믿을 대상이 아니다. 한국사회에 대한 애정과 사랑은 논리로 되는게 아니라 신뢰로 즉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우리는 우리가 할수 있을거라로 믿는 마음으로 만들어 진다. 

문제는 믿음의 문제차원의 것을 마치 논리차원의 것인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숨겨서 다른 사람을 세뇌하는 것이 된다. 이데올로기인 것을 과학인척 하는 것이다. 공동체에 해가되는 불신을 줄줄이 말하면서 공동체의 자원을 소모해서 그런 걸 연구하면서 과학인척 하는 것이다. 본질이 믿음의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하면 그것은 듣는 사람의 선택의 문제가 된다. 믿을 것인가 말것인가는 너의 선택이다. 그러나 과학을 가장하면 그건 폭력이 된다. 믿음을 전파하는 것은 그 자체로 좋고 나쁜게 없다. 좋은 믿음이냐 나쁜 믿음이냐에 달려있을 뿐이다. 우리는 사실 항상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쁜 믿음은 우리의 삶을 파괴한다. 

역사에 대한 이야기로 말을 시작했지만 차분히 읽어본 사람은 이런 이야기가 모든 사회학적인 이론, 설명에 다 적용되는 거라는 것을 느낄거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유럽이나 미국이나 일본에서 이러저러한 정책을 폈는데 이러저러한 결과가 나왔다라고 하는 사실이 있다고 하자. 이것이 한국에서 이러저러한 정책을 펴면 이러저러하게 될거라는 과학적 이론을 구축하는가? 그렇지 않다. 내가 말하는 것은 일단 그런 것을 과학이나 논리로 생각하지 말고 그런 것을 일단 다 버리라는 것이다. 모두 버려라. 이론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모른다. 

다버리고 나면 뭐가 남는가. 우리 자신이 남는다. 우리의 미래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선택, 우리의 의지의 문제라는 것이 보다 분명해 진다. 거기서 출발했을때 다시 여러가지 사실이며 이론이며 설명을 우리는 수용할 기반을 가지게 된다. 그것들은 과학적 이론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누군지를 설명해 주고 우리가 믿어야 할 바람직한 믿음을 가질 동기를 부여해 준다. 증명은 아니지만 말이다. 선택은 우리가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미국이나 일본이나 유럽이 이러저러하다는 것은 우리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거라는 증명이라기 보다는 그같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를 생각해 볼 기회를 준다. 그게 중요한 것이다. 한국이 아닌 나라에서는 저런일이 있었고 이런 결과가 나왔다. 한국이라면 어떨것인가. 당신은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하나 다른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하나? 그건 왜 그런가.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서 한국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저런 예를 보면서 어떤 믿음을 전파해야 하는가.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가. 우리가 원하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우리는 그것을 해낼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믿음이다. 이건 증명이 아니므로 당신이 난 그거 절대 못믿겠다고 말하면 어쩔수 없다. 믿는 사람들끼리 신뢰로 뭔가를 해나갈 뿐이다. 나는 그런 미래 못믿겠다고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한국사회의 혜택을 독점하는 그런일이 없으면 된다. 한국 사회에 자신이 벌어들인 돈을 환원하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하면서 한국 사회로 부터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대기업같은 행태를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끼리의 의무와 권한이 있고 안믿는 사람은 안믿는 사람으로서의 의무와 권한이 있다. 그것이 공평하다. 그래서 우리는 외국인에게 자국인같은 의무를 지우지는 않으며 한국의 미래에 대해 불신하다고 해도 외국인이라면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게 공평하고 상식적인 사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에는 전문가의 주장에서 공부같은 것과는 담쌓은 사람들의 주장에 이르기 까지 역사를 하나의 과학적 이론이나 설명으로 이해하는 것같은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참 많다. 나는 이것이 오류라고 믿는다. 많은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 미움과 원망을 만들어 내는 오류다. 본질적인 부분에서 정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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