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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역사에 대한 생각

이덕일의 강의를 보고

by 격암(강국진) 2009. 11. 17.

머릿말


KBS에서 이덕일의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이란 제목의 강의방송을 했다. 이덕일은 20권이상의 책을 저술하였으며 대단한 인기 작가이며 역사학자이다. 이덕일은 기존의 사학계주류를 조선시대 노론으로 부터 이어지는 사람들의 후예로 정의한다. 그들은 식민사학을 잇는 사람들이라고 말을 한뒤 강의에서 기존의 역사가 가지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강의는 유익했지만 자세한 내용을 소개하는 것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이글은 말하자면 이덕일과 이덕일의 강의에 대한 감상문이 될것이다. 일단 쉽게 예상할수 있는 것처럼 이덕일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이덕일을 혹세무민하는 사람으로 비판하는 사람도 많다. 인터넷에서 역사블로거로 유명한 초록별이 있는데 그도 이덕일을 비판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사회악같은 존재로 묘사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원론적인 문제


일단 원론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몇가지를 지적해 보자. 역사, 민족의식, 국가관 같은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일체의 유형무형의 인간문명은 사실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집어 엎을 정도는 아니다. 우리는 한국인이며 한민족이다. 그러나 그러한 개념도 그러한 이름붙이기도 어디까지나 인간이 만들어낸 도구라는 것이다. 그것은 생활의 편의를 위한 망치나 자동차와 본질적 의미에서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발상으로 나가서 국가니 민족이니 하는 것은 모두 중요치 않다라고 말하는 것은 틀리다. 그건 마치 일체의 문명은 도구니까 그런거 버리고 산으로 가서 짐승처럼 살자고 하는 것과 같다. 수천년 수만년을 쌓아온 인류문명이란 한 개인으로서 뭐뭐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쉽게 폄하해 버릴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단한 엄청난 것이다. 다만 대단한 엄청난 도구라는 것이다. 국가로서 민족으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문화, 가치판단의 틀을 발전시키고 사용하는 것은 21세기에도 여전히 대단히 중요하고 유효한 도구이며 우리는 이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두번째로 널리 지적되어온 것이지만 사실의 기술로서의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란 항상 사실의 선택이다. 그것도 더 정확히 말하면 사료에 씌여진, 유물에 남아있는 것으로 추측할수 있는 사실의 선택이다. 역사적 사실은 무한히 많기 때문에 그 선택을 하는 가치관을 전제해야 말이 되는 것이다. 역사를 사실의 기록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일수록 사실은 강력하게 한가지 가치관에 쏠려있는 사람이다. 즉 그는 다른 시각의 존재를 느낄수 조차 없는 것이다. 


역사의 임무


이덕일의 주장들이 혹세무민하는 것인가 아닌가는 보기나름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는 학계에서는 소수파내지 이단이며 반면에 대중의 지지를 받는 면에 있어서는 주류라는 것이다. 그가 한말중에는 소수파가 그렇듯이자세한 사실의 확인에 있어서 틀린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기존의 역사가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세우는데 무슨 도움이 되냐고 말하는 것, 그리고 지금 한국이 더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회의 정체성이 올바르게 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공감하는 바였다. 사실 내가 하고 있는 말과 정확히 같은 말이기도 하다. 


기존의 역사학계사람들을 비판하자면 그들은 일종의 선민의식에 빠져서 자기일을 하지 않는 사람, 자기일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로 말할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사실의 기록이 아니다. 역사학자가 일제시대에 우리나라 소득이 올라간것이 사실아니냐. 나는 사실을 말한다는 식의 뉴라이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는 안된다. 


기성역사학계가 자신들이 대중성이 없는 것을 가지고 우리는 대중에게 영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가 뭔가, 역사의 임무가 뭔가를 크게 착각하는 것이며 한국의 대중들을 멸시하는 것이다. 역사는 단순히 사실을 기록하거나 저장하는 사람이 아니다. 역사학자는 역사를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역사를 만든다고 해서 어떤 사실의 날조나 허황된 역사로 사람들을 그야말로 바보로 만들라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를 만들라고 어떤 사람들을 공장에 보냈더니 그사람들이 부품만 들고서는 이것도 자동차에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고 하는 식으로만 말할뿐 자동차는 만들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우리는 황당한 차를 만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황당한 차를 만드는 사람이나 차를 아예 만들지도 않는 사람이나 혹은 일제가 만든 차를 그냥 타고 다니는 사람이나 모두 자기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역사가 해야 할일은 우리와 역사적으로 문화적 동질성을 이어온 사람들을 통해서, 현재의 우리가, 앞으로의 우리가 소중히 해야할 가치를 발굴해 내는 것이다. 역사는 그저 과거에 있었던 일을 끝도 없이 떠들어 대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을 말하는 것이고, 그 중요성은 과거의 그시대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했었다는 것 이전에 현재에 중요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올바른 역사, 올바른 가치관은 하나의 편리한 자동차와 같다. 그것을 듣고 알았을때 사람들과 화합할수 있으며 세상을 살면서 만족스러운 가치판단을 하는데 도움을 준다. 썩어빠진 자동차와 좋은 자동차를 주면 소비자들이 좋은 자동차를 알아보듯이 기성역사학계가 대중성이 없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대중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자신의 엄밀성과 객관성을 자랑하는 듯보이지만 사실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사실의 확인 이야기만 외치는 사람만큼 답답한 사람도 없는 것같다. 거대한 건물을 지으면서 부실한 벽돌로 마구 날림공사를 하는 사람은 죄인이다. 즉 황당한 역사를 거짓증거에 기초해서 마구 만들어서 대중에게 마약처럼 파는 사람은 훗날 그 역사를 믿는 사람들이 겪을 부실공사의 사고를 외면하는 나쁜 사람들이다. 그러나 벽돌만 만지고 있을뿐 방한칸도 만들지 못해서 마찬가지로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는 사람들이 그들을 욕할수 있을까? 그것도 엄청난 지원을 사회로 부터 받아서 수천명이 그일에 종사하면서 급료를 받는 상황이라면 돌팔매를 맞아도 할말이 없는거 아닐까?


대중성과 개방의 문제 


만약 티브이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무리 시청자들이 외면하고 욕을해대도 막장방송을 해대면서 이것은 전문가의 영역이며 우리는 대중에게 영합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면 어떨까. 자동차 공장에서 자동차를 만드는 사람들이 일반인에게 쓸모도 없는 기능을 마구 달고 비싼 부품을 마구 달고 그러면서도 필요한 기능은 하나도 없는 자동차를 만들면서 소비자에게 자동차 만들기는 전문가의 영역이며 우리는 대중과 영합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어떨까.


내가 역사학을 연예계나 자동차만들기와 비교했다고 흥분하는 사람이나 이 비교가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본질에서는 차이가 없다. 학계는 대중에게 도움이 되어야지 대중을 멸시하고 그 위에 군림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학계는 대중이 지불한 돈으로 운영되는 것이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취미생활로 각자 자기 집에서 혼자하면 된다. 왜 프라모델 만들기는 개인취미고 역사학자는 사회의 지원과 존경을 당연히 받아야 하는가. 그들이 훌룡하신 분들이라 본래 그런가?


학문도 종류가 있고 역사학에도 물론 매우 기술적이고 전문적인 부분이 있을 것이다. 빵만들기도 그런게 있다. 전문가가 빵만드는 방법에 대해 일반인이 이스트를 더 넣으라던가 온도를 높이라던가 하고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 함부로 끼어드는 것은 온당치 않다. 수학문제를 푸는데 다수결 투표에 의해 풀수는 없다. 


그러나 대중성없는 역사학이란 둘중의 하나다. 역사학계가 자기할일을 못하고 있거나 안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소수파 역사학자들을 제대로 비판하는 것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래도 그 인기가 줄어들지 않는다면 제일 먼저 비판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자동차 만들라고 돈줬더니 자동차를 아예 만들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이 안전장치없는 부실자동차 타고 다닌다고 욕하는 것이 말이되는가. 대중과 영합하라는 것이 아니라 대중성이 없는 것을 자신의 무능으로 알아야 한다. 해방후 반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것은 도대체 뭘까. 


맺는말


선과 모터사이클 메이터 넨스에서 주인공은 오토바이 구조에 대한 설명서를 약간 언급한 후 그런 기술의 특징들을 이렇게 말한다. 첫째, 지루하다. 둘째, 관찰자의 입장이 존재하지 않고 오토바이는 그저 홀로 독립해서 존재한다. 세째, 좋다, 나쁘다는 가치판단이 없다. 네째, 날카로운 칼날로 본래는 존재하지 않는 분류를 행한다. 그러나 그 분류를 행하는 방법은 언제나 무한대다. 


이게 한국의 역사책에 대한 기술이 아닌가? 지루하고 존재할수 없는 객관성을 강조하며 좋다나쁘다는 가치판단이 없고 무한대로 분류가 가능한 것을 맘대로 갈라놓고 그것이 절대적인 것처럼 이야기하지 않는가? 그것은 한국인들에게 감옥이 되고 있지 않는가? 역사의 객관적 기술이란 허상이다.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과연 이런 진실이 교과서에까지 퍼지고 학교에 까지 퍼져있을까? 


모든 사람을 가두는 감옥, 이 감옥은 언제쯤 파괴될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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