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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역사에 대한 생각

역사라는 이론과 나를 지키기

by 격암(강국진) 2011. 9. 19.

얼마전에는 역사에 대해 우리가 할수 없는 말(http://blog.daum.net/irepublic/7888058)이라는 글을 썼지만 아직도 역사라는 것에 대해 뭔가 마음에 남아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가 쓴 글들을 다시 보면서 생각을 좀 정리해 보았습니다. 


역사성의 중요성


역사라고 하지 않고 역사성이라고 부른 것은 우리가 보통 역사라고 하면 한국의 역사 미국의 역사, 인류의 역사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런 사회적 역사뿐만 아니라 개인의 역사도 본질적으로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데올로기로서, 정체성으로서, 이론으로서의 성격입니다. 


즉 역사라는 것이 그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될수 없기 때문에 -즉 항상 사실의 선택적 나열이 될수밖에 없기 때문에- 역사는 항상 하나의 정체성에 대한 이론이 되고 말며 그때문에 힘을 발휘하고 그때문에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인으로서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추구하는 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말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너는 세상사람들을 위해 목숨바쳐온 위대한 가문 혹은 민족 혹은 국가의 일원이다라는 말한마디가 어떤 사람이 기꺼이 행복하게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게 만들수 있고 사랑과 종교의 이름으로 양심의 가책없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대량학살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것이 정체성에 대한 이론, 이데올로기의 힘입니다. 


너는 이러저러한 사람이고 세상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현상태-대개는 나쁜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너는 뭐뭐를 해야한다는 이야기가 완결되고 그 이야기를 믿을때 사람들은 희망과 활력을 얻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크나큰 고통의 시작이 됩니다. 


정체성의 확인은 반드시 역사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인문학계에서 떠들고 있는 혹은 사람들이 떠들고 있는 정체성은 전부가 아니라면 거의다가 역사성에 의존합니다. 즉 우리는 혹은 너는 이러저러한 과거를 거쳐서 현재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너의 참된 역사를 알려주마. 한국의 참된 역사를 알려주마. 인간역사의 진실을 알려주마. 우리는 이와 같은 말을 사방에서 듣습니다. 그리고 그같은 주장과 함께 우리에게 제시되는 이야기 혹은 역사는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낡은 이데올로기에서 해방시키고 보다 자유롭고 포용력있게 살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은 역사이며 그것은 여전히 하나의 이야기 혹은 이론으로서 하나의 제약을 다른 제약으로 교체하는 것일뿐만 아니라 대개는 그 효과가 임시방편적이라는 것입니다. 즉 팔이 묶여있는 사람의 팔을 풀어주지만 결국 족쇄가 이번에는 발로 옮겨간것 뿐이랄까요. 팔은 자유로워졌지만 조금 지나면 이번에는 발이 아파오는 것입니다. 


역사의 의미


역사에 대해 우리가 할수 없는 말이란 글을 통해 제가 정리한 생각은 이것입니다. 길게 봐서 우리는 역사를 예측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가져다붙인 여러가지 이야기는 오직 사후에 가져다 붙인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과거역사의 연장선상에서 미래를 이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도 역사는 의미가 있는데 세가지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역사는 우리가 누군지를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예측가능성이 없어도 우리가 지나온 과거는 우리의 현재를 기술하는 방식입니다. 다만 우리가 누군지를 전부 가르쳐 주지는 못할뿐입니다. 


두번째로 경고의 의미는 있다는 것입니다. 예측은 못하지만 가능성에 대해 주의를 준다는 정도까지 인정못할것은 없다고 봅니다. 그것이 특히 나쁜 미래일 경우는 말입니다. 불나는 걸 예측은 못해도 겨울철에는 불조심을 해야겠지요. 


마지막으로 과학이거나 법칙이기를 포기하고 역사가 자신의 주관적 믿음을 표현한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한 상태에서 믿음을 권유하는 수단으로서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것을 좋아할 이유는 없지만 맘에 들면 그럴수도 있겠죠. 한국민족의 과거역사를 어떻게 재구성하던 그것이 우리의 위대성을 '증명'하지는 못하지만 한국민족이라는 공동체를 사랑하고 그것이 가능성이 있는 집단이라는 나의 주관적 믿음을 표현하고 너도 그것을 믿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하는 것이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도 그 구체적 세부사항에따라 그렇기도 하고 안그렇기도 합니다만 믿고 안믿고는 논리나 법칙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판단의 문제입니다. 


이야기, 이론, 역사의 한계


세상에는 많은 이야기들, 이론들, 역사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과학으로서 혹은 객관적 진리로 접근해 들어가면 그중의 하나가 맞으면 다른 이야기들은 모두 틀린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생각인 것같습니다. 확실히 이세상에는 이 세상에 대한 정확한 기술을 해주는 단하나뿐인 이야기가 존재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이해와 암기를 초월하는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누가 해줄수도 없고 그걸 듣고 이해할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이야기들은 모두 현실에 대해 지극히 편협하게 요약한 아주 작은 짜투라기 이야기일뿐입니다. 


예를 들어 징기스칸의 이야기의 일부를 들으면 징기스칸이 남자답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징기스칸이 우리의 조상을 습격한 이야기와 연결해서 들으면 생각이 바뀌겠지요. 인류의 전쟁사를 모두 개괄하는 입장에서 보면 다시 조금쯤 너그러워질지도 모르며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많은 멸종위기의 동물들이 인간의 탐욕으로 그렇게 되고 있다는 현실과 비교해서 생각하면 나 자신이 징기스칸보다 더 사악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지 모릅니다. 사실 징기스칸이 사치를 해봐야 21세기 문명국의 사람들처럼 사치했겠습니까. 


요점은 어떤 사실이나 토막 이야기의 의미는 그걸 포함하는 더 큰 이야기의 맥락속에서 결정되기 마련인데 이야기는 한없이 커질수 있으며 일직선으로 커지기만 하는게 아니라 복잡한 그물처럼 얽혀있는 것이라 그중의 어느 일부 이야기를 객관적 진리로 받아들일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다양성에 대해 몇가지만 이야기해 봅시다. 예를 들어 우린 미국과 일본의 드라마를 보면서 이야기구조가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반드시 승전국과 패전국인 이유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미국은 배트맨류의 영웅이 지구를 구하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즉 악과 싸우는 고독한 정의의 사자류의 이야기입니다. 상대적인 것입니다만 일본은 그에 비하면 애초에 모든 인간은 그냥 서로 싸울뿐 정의니 뭐니 그런것은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느끼게 하는 경우가 많이 느껴집니다. 미국이 링컨의 이야기를 한다면 링컨이나 링컨의 반대편이나 어떤 도덕적 우위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식으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야기를 할때도 도쿠가와 이에야쓰같은 쇼군이야기를 할때도 거기에 어떤 도덕적 비교는 거의 없습니다. 


재미있는 부분은 이와 같은 이야기구조가 그들의 역사를 합리화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원자탄을 터뜨린 미국은 악을 막기위해 그렇게 한것이고 패전한 일본은 어차피 선악은 없고 그저 힘이 없어 당한것일 뿐이며 우리가 저지른 수많은 전쟁범죄는 사실 남들도 저지르고 있는 것이며 싸우는데 봐주는게 어디있는가 하는 식으로 정리될수 있다는 것이죠. 


한국에도 이덕일이 강단사학자들과는 다른 역사관을 펼쳐서 잡음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었습니다. 실증적 역사관이란 어찌보면 무의미해 보이는 것입니다만 조선시대 노론이 만들어 온 역사로 한국역사를 파악하는 이덕일의 역사란 그쪽에서 보면 사람들이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는 사기꾼으로 파악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이야기는 더큰 이야기의 일부고 어떤 동기를 그안에 가지고 있다고 믿을수 밖에 없습니다. 확실히 해방이 조선독립군에 의해 스스로 이뤄졌다면 그 이후 씌여진 한국의 역사는 그 연장선상에서 그려졌을 것입니다. 반면에 일제시대에 부유하게 살았고 따라서 교육많이 받았던 사람들이 그대로 연결되는 해방이후의 역사에서 바라보는 역사란 다를수 밖에 없는 것이죠. 지금도 친일에 대한 역사 정리가 안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인기좋은 김용옥도 결국 하나의 역사로 세상을 이야기하는 일이 많습니다. 한때 김용옥은 세계의 역사를 서양에서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양대 흐름으로 동양에서는 유교와 불교의 양대흐름으로 파악해서 그것이 만나는 것이 현대라는 식으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도 말하자면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이런 이야기들이 나쁜 것도 있고 좋은 것도 있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모두 어떤 제약을 가져오며 인식의 오류를 가져오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인과성을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제일 나쁜 것은 대개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서로 배척하는 것으로 인식해서 하나의 이야기에 설득되면 감각적 지적 맹인이 되는 경향입니다. 


하나의 이야기는 그것이 제아무리 방대해도 빠뜨리는 것이 있을뿐 아니라 더 완벽해 지기 위해 방대해지면 질수록 이번에는 그 이야기를 듣는 개인을 속박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공자의 가치를 지키고 살아온 사람의 후예로 인식한다고 해봅시다. 공자의 가치란 그저 예의범절 잘지키라는 것이다라고 간단히 파악한다면 이해하기 쉽지만 허술하기 짝이 없으니 도움도 안되고 공격도 쉽게 받겠지요. 그래서 이번엔 공자의 진의는 그렇게 쉽게 파악할수 없다면서 공자의 가치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을 공부하고 그것이 어떻게 오독되었는가를 공부합니다. 이렇게 복잡성을 증가시키면 시킬수록 공자의 가치는 방어하기 쉬워집니다. 니가 아직 잘몰라서 그렇다고 이야기하기 쉬우며 여러가지 다른 상황에서 이런 저런 설명을 붙이기 쉬워집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반대로 공자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앞에서 복종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복잡한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듣는 개인을 압살합니다. 희대의 천재들이 대를 이어 복잡하게 만들어 놓은 체계를 꿰뚫어자유자재가 될만한 천재는 드물기 때문에 보통사람들은 이제 결국 남이 이러라저러라하면 저항을 못합니다. 


이것은 공자만 그런게 아니라 대개의 설득력있고 권위있는 이야기들 특히 역사성을 강조하는 이야기들이 가지는 문제입니다. 역사성을 논하는 것은 결국 과거가 현실과 미래를 말해준다는 것이고 그 이론을 더 복잡하게 만들수록 이젠 과거에 얽매여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민족의 일원으로서 자신을 파악하고 나면 수백 수천년전의 일까지 거슬러 올라가 괴로워합니다. 징기스칸의 후예인 몽골족이 나는 잘났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징기스칸을 생각하며 몽골족에게 원한을 느끼는 일도 가능합니다. 


그럼 왜 우리는 이렇게 살까. 


이야기, 이론, 역사의 한계를 지적하는 일이 비교적 매우 간단함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온갖종류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두가지 길밖에는 없다고 느끼는 것같습니다. 


하나는 모든 이야기와 이론과 역사의 전면적 거부입니다. 역사적 인과성에 대한 전면적 거부입니다. 모든 맥락에 대해 그것이 특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길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 가는 길이며 개인적으로 생각했을때 옳지도 않은 길입니다. 이길은 허무주의의 길이며 가치판단을 못하게 만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길에 대해 두려움에 떱니다. 마치 수평선을 넘어 먼바다로 가면 배가 떨어질거라고 믿는 두려움이 모두에게 있습니다.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의미를 다 해체해 버리면 우리는 살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의우리에게 해야할 일을 알려주는 이야기에서 알면서도 쉽사리 벗어나지 않습니다. 


사실 전면적 거부의 길은 종종 많은 사람을 아프게 하는 길입니다. 누군가가 폐쇄적 민족주의에 빠져서 그걸 기반으로 살아갈때 그같은 믿음이 비록 내게 공감가지 않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쉽게 깨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만 소통하고 옆에 같이 존재함으로해서 그들이 다른 것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할때까지 기다릴수 있을 뿐입니다. 


자기의 이야기가 훨씬 더 크기때문에 작은 이야기안에 갖혀있는 사람을 보고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그 이야기를 깨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런지 모르나 실상은 그런 자신도 다른 사람이 보면 아주 작은 이야기안에 갇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뚫어볼만큼 통찰력이 없기 때문에 이야기의 존재, 매트릭스의 존재를 꿰뚫어 볼수 없을 뿐입니다. 야만인의 마을을 보면서 저 마을을 내가 현대화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유지하는 그 작은 마을도 누군가가 더 사려깊기 때문에 유지되고 있는것은 아닐까를 기억해야 할것입니다. 


두번째의 길은 물론 어떤 이야기들에 의존해서 살며 그 이야기들을 조금씩 개량해 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길을 갑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러개의 이야기들을 동시에 수용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아니면 저것이 되고 결국 크고 작은 이야기들의 경계선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삽니다. 


맺는 말


언제나 그렇지만 요약본 처럼 설명이 짧은 글인 동시에 읽고 쓰기에 너무 긴글이 되어가니 이젠 정리해야겠습니다. 


유명한 과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물리법칙의 성격이라는 연속강연에서 하나의 물리법칙이 동시에 여러개의 형태로 표현될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중력법칙은 우리가 보통아는 힘의 법칙으로 표현될수 있고, 포텐셜을 이용한 이론이나 최소액션 원리라는 것으로도 표현될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수학적으로 동등한 이론으로 어떤 표현이 다른 표현과 다른 결과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물리학법칙이 왜 여러가지 형태로 표현될수 있는가 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도 지금도 미스테리입니다. 파인만은 이것이 물리법칙의 한가지 특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동등한데 왜 여러가지를 만들 필요가 있는가. 그들은 동등하지만 우리가 새로운 법칙을 만들어 낼때 즉 미지의 세계로 가려고 할때는 동등하지 않다고 파인만은 말합니다. 즉 물리법칙을 수정하려고 할때 어떤 특정한 표현을 가진 쪽이 다른 쪽보다 직관을 더 잘주기 때문입니다. 이때문에 파인만은 물리학자는 일직선적인 견해 즉 어떤 간단한 원리에서 시작해서 전체를 기술하는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출발하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모두다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이 과학뿐만 아니라 일반론적으로도 옳다고 믿습니다. 다만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과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복잡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물론 과학을 이야기의 일부로 포함하므로- 과학처럼 여러사람에 의해 정밀하게 검증된 부품으로 조립될수 없는 것입니다. 객관성의 영역을 넘어선것인데다가 수학이나 물리학처럼 엄밀성을 논할수 없고 흔히 부족한 정확도와 문화적 편견으로 가득찬 언어로 기술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학처럼 하나의 이론이 다른 이론을 부정하는 일이 쉽지도 않고 옳지도 않습니다. 


이 이야기더미는 끝없이 크고 그야말로 난장판으로 얽혀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딱감고 한구석에 가서 나머지 이야기를 모두 무시하거나 생쥐가 코끼리를 먹어치우겠다는 식의 무모함으로 이이야기 저이야기를 마구 삼키면서 소화불량에 걸리거나 한사람의 이야기를 쫒아가다가 거기에서 노예가 되버리고 길을 잃고 맙니다. 


이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한국이란 무엇인가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추구하는 모든 일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입니다. 


이 복잡한 실타래 앞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발견한 길은 불확실성의 길입니다. 많은 복잡성은 우리가 불확실성이라는것에 대해 같은 의미로 확실성이라는 것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지 않기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가지 법칙이나 개념이 임시적으로 만들어진 도구라는 것, 그 불확실성과 확실성이 어떤가에 대해 고민하면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충돌없이 포용될수 있고, 실타래 풀기의 많은 일들이 사라진다고 믿습니다. 역사를 부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역사에 노예가 되지도 않는 길은 역사란 결국 불확실한 개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다시 돌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 길입니다. 화이트헤드나 노장이나 부처님의 말씀도 다르지 않다고 믿습니다. 기독교도 다르지 않다고 믿습니다. 물론 다르다 같다하는 것은 각각을 정확히 정의하고 파악한 후에 비교하는 것이니 같다 다르다를 열심히 분별하려고 하는 것자체가 불확실성의 철학으로 보면 별 매력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중요한 건 자유롭게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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