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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역사에 대한 생각

이야기 부시기로서의 역사

by 격암(강국진) 2013. 6. 27.

이야기 부시기로서의 역사


역사를 이야기하면 대개는 이야기 만들기로서의 역사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우리가 역사를 말한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어떠한 정보를 걸러내어 하나의 패턴을 보고 그것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과학사라고 하면 옛날 옛적에 그리스의 누군가는 하는 식으로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고 한국의 역사라고 하면 하늘에서 내려운 환웅으로 시작해서 고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말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이 있다면 이야기는 부서지는 과정도 필요합니다. 하나의 이야기 혹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믿는다는 것은 그것이외의 다른 이야기를 안믿게 되거나 절대시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우주론을 배우면서 창조론을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으로 남아있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이야기를 부신다는 것은 여러이유가 있을수 있겠으나 어떤 패러다임의 자체적 모순이 누적되어 그 패러다임이 유지될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인 경우가 아주 중요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대개 주류적 패러다임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가 극복해야할 이야기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퍼져 있어서 그 이야기가 보이질 않는 단계입니다. 우리가 믿긴 뭘 믿는다는 말이야라고 말하면서 뭐뭐뭐는 당연한거 아냐라고 말하는 단계지요. 모든 사람이 주식을 산다고 하면 그때가 바로 주식을 팔아야 할 때이듯이 모든 사람이 이렇게 어떤 이야기에 중독상태에 빠지면 그때가 바로 그 이야기를 부셔야 할 때 일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부시는 것, 그 패러다임을 극복하는 것은 역사를 탐구함으로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패러다임이 생겨나던 그 시대로 가보는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많은 것이 확실하지만 그런 것들이 훨씬 더 물렁물렁하게 보였던 시대, 지금 승리자로 주류로 우리를 지배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이야기도 시도되었던 시대로 돌아가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라는게 뭔가를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지, 어디에다가 이 너머는 질문하지 말것이라는 무지의 벽을 우리가 세웠는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학을 이야기하면 뉴튼이나 갈릴레이 시대를 이야기하게 되고 미국을 이야기하면 독립전쟁이나 링컨을 이야기하게 되는 이유가 그래서 입니다. 결정적 갈림길에서 뭔가가 선택되었고 뭔가는 잊혀졌습니다. 선택된 쪽은 주류가 되었고 '당연한' 것, '숭고한' 것, '지켜야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때로 신성시 되어 이 이상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불손한 질문이라는 압력을 줄 때도 있고 그들은 때로 바로 그 이야기를 파괴하기 위해 재평가 되어질 때도 있습니다. 한국에도 새마을 운동신화라는것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박정희는 신성한 신당이 되고 누군가에게 그는 파괴해야할 허구적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우상이 파괴되어야 새로운 이야기가 들어설 자리가 있기 떄문이죠. 


성리학, 과학 그리고 기독교의 이야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시발점은 사실 고려와 불교에 대한 생각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제가 보기엔 그리고 당연히 어떤 제한된 측면에서 우리는 조선의 연장선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선 성리학은 기독교와 닮아있고 또한 과학과도 닮아 있습니다. 한국인은 종종 성리학자를 욕하지만 지극히 성리학의 시대처럼 살아갑니다. 


성리학과 기독교와 과학은 모두 배타적 진리를 추구합니다. 즉 진리는 하나인 것입니다. 신도 유일신이고 이것이 맞으면 저것이 틀리는 배중률의 세계입니다. 격물치지의 정신에 따라 진리는 세상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므로 종국에는 수없이 많은 금기와 윤리규칙의 산으로 둘러 쌓이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21세기 한국에서도 보여지는 것입니다. 점점 더 복잡해 지기만 하는 법률들, 더 복잡해져만 가는 대학입시규칙들, 진보는 모였다하면 여러가지 정책과 규칙때문에 싸우고 종국에는 서로에 대해 욕을 하고 깨어집니다. 진보와 보수가 분열하고 진보는 진보대로 보수는 보수대로 그 내부적으로 다시 분열합니다. 


세상을 보다 살기 좋게 만드는 노력을 함에 있어서 아주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올바른 시스템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나 그 시스템의 규칙을 사람들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치 존재한 적이 없는 자유시장의 이상을 끝없이 추구하면서 이렇게 고치면 저절로 정의가 실현되는 시장이 만들어 질거야, 저렇게 고치면 될꺼야 하고 몸부림쳐온 자본주의의 역사와도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종종 질점이나 자유입자들이 모여서 세상을 만든다는 뉴튼과학적 그림에 의해 그것이 만들어 졌고 그것자체가 과학이나 자명한 진리라기 보다는 하나의 형이상학이라는 사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미 그런 것은 당연한 이야기, 너무도 당연하게 우리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나 패러다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규칙을 못찾은게 문제가 아니라 규칙을 찾고 있는게 그 문제의 일부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과학혁명의 역사라던가 르네상스를 보면 결국 그것은 단일신이라는 기독교의 문화속에서 생겨나는 압도적인 권위주의에서 빠져나오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수없이 오랜 시간전부터 많은 천재들에 의해 만들어져 있는 이야기는 한 개인이 도전하여 항복시키기 어렵지만 그래도 우리는 한가지에 의존하자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직접 우리의 눈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케익은 맛있다고 보증해도 직접 먹어보자는 것입니다. 직접적 관찰에 근거하지 않으면 그것은 환상일수 있으니 지식에 대해 좀더 엄밀해져 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학혁명을 일으킨 힘입니다. 


그러나 그 과학조차도 수백년의 역사가 흐르자 한 개인이 항거하기 어려운 거대한 권위주의적 누적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과학의 창조자들과 그것을 물려받아 덩치를 키운 후손들에게 과학의 의미는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목이 말라서 우물을 파면서 이런 저런 방식을 택한 이유는 그저 그게 편해서 였는데 그 방법을 물려받는 후손들은 그 방식은 성스러운 전통이며 의심해서도 의심할 것도 없는 유일한 진리가 됩니다. 그래서 요즘 세상에서는 뉴튼의 질점이라는 말은 과학이전의 형이상학이다라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20세기쯤에는 그런 과학의 누적이 만들어 낸 근대의 위기라는 것이 시작되었지만 거대화 되어져 가는 시스템의 재앙 그리고 인간 소외로 말해지는 그런 현상을 진정으로 극복해 내지는 못했습니다. 적어도 서양은 그렇고, 적어도 한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차원에서는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그 비극을 만들어 낸 이야기에서 벗어나서 다른 이야기에 둘러쌓여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길로 가면 비극과 죽음을 만든다고 하는 그길을 부지런히 갑니다. 그들은 니체가 그 사람은 신은 죽었다는 말을 못들었다는 말인가 하고 말하게 한 그런 사람들입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신은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여러사람이 떠들어도 그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이야기에 중독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맛을 느껴본적이 없으면서 자기가 요리에 대해 안다고 생각합니다. 인문학과 철학도 체험입니다. 


그러나 변화의 바람이 붑니다. 우리는 어느새 스타트랙이 아니라 구가의 서나 반지의 제왕같은 판타지물에 더 열광하기 시작하는 것같습니다. 과학보다 마법에 대해 더 매력을 느낍니다. 프랑켄슈타인보다 흡혈귀가 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과학자로서 이런 흐름에 대해 무조건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흐름은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모든 비약이 그러하듯 종착지가 더 높은 곳일지 절벽으로의 추락일지는 모르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고려의 훈요10조, 불교 그리고 융합


조선은 불교문화를 극복하고 보다 성리학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 만들어 졌습니다. 그런데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나라를 다스리는 훈요10조라는 것을 남기는데 거기에 3가지가 불교에 대한 것일 정도로 나라를 지키고 다스리는데 있어서 불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왕건은 누구입니까. 신라말기에 여기저기서 호족세력들이 저마다 사병을 키우고 왕노릇하던 시대에 전국을 통일하고 왕국을 만든 사람입니다. 만약 그것이 단순히 힘에 의한 것이었다면 고려가 5백년을 유지할 이유가 없습니다. 불교라는 종교가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통일이 되지도 그 통일이 유지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갈라져 싸우는 시대는 실례되는 비유인지 모르겠으나 탈레반이 등장하던 아프카니스탄을 연상시킵니다. 탈레반은 종교적 열정을 강조한 잔혹한 세력으로 보통 말해지지만 탈레반의 등장이전에는 아프카니스탄이 마치 신라말기처럼 갈라져있었습니다. 물자가 내륙으로 들어갈수도 없었고 살육과 강도 강간이 일상이었다고 합니다. 사방이 온통 위협이었고 싸움은 계속되었습니다.  


탈레반은 다시 종교안에서 하나인 아프카니스탄을 만든 겁니다. 그 종교가 우리 눈에는 야만적이고 잔인한 면이 있더라도 말이죠. 그리고 상당수 아프카니스탄 사람들에게는 혼돈속에서 시달리는 삶보다는 그런 질서와 통일이라도 존재하는 쪽이 행복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물속의 물고기는 프랑크톤을 먹고 살지 모릅니다. 그러나 물고기가 어디로든 헤엄칠수 있는 것은 물고기를 둘러싼 물때문입니다. 물이 보이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종교적 문화적 메세지는 이 물과 같습니다. 그 안에 있을때는 거의 보이지 않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가능하게 만드는 바탕이 됩니다.


불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장려한다는 것은 불교라는 보편적 가치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살아갈수 있는 통일국가로의 주장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고구려의 후예라던가 백제의 후예라던가 하는 개념으로 뭉쳐서 살아가자는 주장보다 훨씬 더 큰 스케일을 가지며 포용력을 가집니다. 모두가 불교적 진리를 추구하는 도반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또한 기본적으로 형식을 파괴하는 힘을 가졌습니다. 무아사상같은 것을 통해서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구분이 덧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런 것은 행복을 가져올 수 없고 오히려 우리의 번뇌를 만들어 내는 이유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너와 내가 구분되지 않는 것이 진리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모든 것이 연결된 세상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도 이런것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유일신을 고리로 해서 그런 것이죠. 즉 신 밑에서 평등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수 있는가에 따라 이 평등의 개념은 위험해 질수도 있습니다. 가장 잔인한 일을 많이 한 사람들이 또한 그 기독교 신자들이니까요. 


신을 제외하고 나면 서구문화는 지극히 분열적입니다. 즉 이것과 저것을 구분합니다. 구분이 지식이며 힘입니다. 그리스 시대이래 서구인들이 끝도 없이 행해온 것이 바로 이 구분입니다. 과학의 역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떤 나라에 현지의 문화와 종교를 파괴하고 과학만 들어간 다면 그 사회는 윤리적으로 파탄이 나면서 분열하는 것입니다. 프랑크톤이 약간 늘었는지 모르겠으나 물밖으로 나간 물고기 모양이 되어 결국 누군가의 먹이밖에 되지 않는 것이죠. 과학은 반편짜리 학문입니다. 거기안에 내가 없기 때문에 윤리와 가치가 제거된 형이상학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만으로는 생명을 유지할수 없는 것이죠. 


지금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층층이 다원적으로 존재하는 개인, 지방자치 단체, 작은 나라며 세계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또한 전체적으로 융합되어 존재할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것이 안되는 것이 바로 자유시장의 이상이었고 팽창과 성장에 근거한 자본주의 국가의 이상입니다. 그래서 지금 온 세상이 폭팔직전의 위기속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낡은 이야기를 부시고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야 하는 때가 된 것이지요. 


맺는 말


이 글의 구조를 보면 제가 마치 기독교를 비판하고 불교를 후원하는 것같지만 저는 종교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개인의 차원에 이르면 그걸 기독교라고 부르건 불교라고 부르건 사람들이 이해하는 수준은 여러가지라서 하나의 종교로 이해하는 것에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라고만 부르면 무당옷입고 작두타고 성황당나무에 절을 해도 그걸 기독교라고 불러야 한다는 식의 생각이 문제입니다. 저는 스님과 친하게 지낼수 있는 기독교인, 기독교인과 친하게 지낼수 있는 스님 정도는 되어야 나는 종교인이라고 부를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수준도 안되는 사람들은 종교를 배우지 말고 그보다 기본적인 인간의 도리에 대해 사색하는데 시간을 쓰는게 바람직 할 것입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비극을 만들어 내지 않았으면 합니다. 


고려로 간다고 해서 거기에 답이 있다거나 또는 고려시대가 지금보다 좋았던 천국이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배부른데 몸이 안좋게 느껴지면 운동을 해야죠. 우리가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과학이나 서구문화라고 말은 쉽게 하지만 그것은 또한 인류가 세운 엄청나게 호화로운 금자탑입니다. 다만 그안에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그걸 우리 안에 넣을수 있을 만큼 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나 합니다. 흔할 말이지만 우리가 도구를 쓰는 것이지 도구가 우리를 쓰게 해서는 안되니까요. 


단순히 불교적 메세지를 읽고 공부하는 것이 또한 한 계기가 될수는 있지만 그걸로 뭔가가 다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과거는 현대의 어떤 것과 합쳐져야 새바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인터넷을 포함한 전자통신의 발달속에서 우리는 좀 다른 생각을 해야 성공적으로 살아갈수 있을 것입니다. 사이버 공간은 물리학법칙이 통하지 않는 비물질적 세상이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 사이버공간에서의 승리가 세상을 지배하기도 하는 세상입니다.


최근에는 통계에 대한 생각을 했습니다. 통계는 점점 더 상상이상으로 사이버공간의 구축처럼 이데올로기가 되어 갑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이 되고 우리가 세상을 그렇게 보면 세상은 그에 따라 또 그렇게 바뀌어 갑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을 어떻게 수정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결국 그 방법이 찾아지고 나면 그것은 우리 모두 절에가서 불교도가 됩시다같은 식의 단순한 이야기하고는 아주 먼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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