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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역사에 대한 생각

역사와 객관성

by 격암(강국진) 2015. 10. 15.

요즘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역사 이야기가 트위터에 가득하다. 그런데 역사 이야기가 나오다보니 역사는 엄정하게 증명된 사실에만 근거해서 써야 한다같은 이야기가 아직도 돌아다니는 것을 본다. 이런 시각은 많은 사람에게 당연한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이 아니다. 물론 그러니까 역사는 소설과 차이가 없으며 허구적 상상과 사실을 마구 섞어도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역사쓰기를 과학에서 과학의 법칙 찾듯이 단 하나 존재하는 어떤 객관적 이야기 혹은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생각하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역사의 주관성을 인정하는 것은 역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중요성을 잊지 않도록 해준다. 


그럼 역사는 왜 과학이 아닐까? 과학일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과학을 어떻게 보면 우습게 본다. 과학적 분석과 확인작업이란 사실 말도 안되게 엄밀하고 엄격한 일이다. 그래서 심지어 경제학 같이 정량적 학문으로 인정받는 분야도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없는가에는 논란이 있으며 나는 그걸 과학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믿는다. 사회과학도 과학이 아니다. 엄밀함에 있어서 진짜 과학들과 큰 차이가 있다. 


역사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엄청나게 많은 사실들을 제외하고 기록이 존재하는 것들을 늘어놓아서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이다. 확인된 역사적 사실들은 퍼즐 조각과 같다. 그런데 없는 조각이 언제나 엄청나게 많다. 우리는 물론 더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많은 사실들을 참고하지만 제아무리 많은 사실들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두가지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첫째로 물리학법칙을 따지듯 하나 하나의 사실을 엄밀하게 확인한 역사적 사실이란 없거나 매우 드물다. 그 이유는 자연법칙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은데 역사적 사실은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각각의 사실을 확인하는데 그렇게 정성을 들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선이란 나라가 존재했었다라는 사실은 물론 비교적 확실한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이란 무엇인가. 이 문장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조선은 어떤 나라인가? 그것에 대해 수소원자란 무엇인가처럼 엄밀하게 대답할 수 있는가? 그럴수는 없다. 조선이 존재했었다같이 뻔한 문장도 우리가 조선을 알고 이해하는 만큼의 한계를 가지는 의미밖에는 없다. 실제 어떤 일본인들은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이해한다. 그러니까 조선이란 독립국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뻔한 사실에도 이런 문제가 있는데 작은 사실들로 가면 그것이 어떻게 과학적인 사실들처럼 엄밀할 수가 있겠는가.


둘째로 언제나 우리가 아직 모르는 사실이 훨씬 더 많다. 예를 들어 로마의 멸망에 대해 수백년 동안 별 이야기를 다했는데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로마는 실은 중금속 중독이 뭔지 몰랐던 사람들이 중금속 중독이 심해지면서 망했다라는 새로운 설명이 등장하는 식이다. 알고 있는 사실을 가지고 별별 드라마를 다썼지만 이런 식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등장하면 이제까지의 이야기는 어느정도 다 허무해 진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지 알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최종적 역사의 기술이란 있을 수가 없다. 


역사의 객관적 기술을 굳이 다시 한번 부정하는 이유는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면 실제로는 진짜 역사를 찾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엉터리 역사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의 객관적 기술이라는 것에 빠지면 어떤 기성의 역사관에서 절대로 헤어나올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역사란 결국 인간이 부족한 퍼즐을 잇는 것이라는 점을 망각하게 된다. 역사란 결국 편향될 수 밖에 없다. 한국인을 사랑하는 사람이 쓴 역사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쓴 역사는 영원히 같을 수가 없다. 


과연 조선이 일제에 망하지 않았어도 스스로 산업적 발전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답을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학적 태도가 아니라 과대망상이다. 아무리 많은 자료를 가져다 놓아도 그건 불가능하다. 해방직후 한국이 지금 정도의 부를 축적하는 것은 예측 가능한 일이었을까? 어떤 사람들은 그거야 이러저러해서 그랬지라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할테지만 역사의 흐름에 대해 최종적이고 간결한 설명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위험하다. 그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자신의 주관적 믿음을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로 믿는 행위다. 


어떤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도 엄청나게 어렵다. 그러니까 역사의 주관성을 인정하면서 큰 그림에 해당하는 역사관을 생각하고 작은 의문에 접근하면서 여러가지 역사 드라마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 아무리 산처럼 증거를 쌓아도 기존의 역사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역사란 누가 쓰는 것일까? 그건 그냥 힘있는 사람이 쓴다. 어떻게 생각하면 역사학자도 아니고 무식한 사람이 쓴다. 내가 역사책을 쓸 능력은 없지만 내가 역사책을 쓴다고 하자. 그럼 그게 왜 기존의 역사로 남겠는가. 역사는 정부나 학계의 공인을 받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반복되어 교육되면서 기존의 역사가 된다. 바로 일제때 일본정부가 이게 한반도의 역사라고 써서 교육시키면 그게 한반도의 기존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엄정하고 객관적인 역사같은 말을 너무 믿으면 그 식민사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역사는 편향될 수 밖에 없고 인간이 쓰는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는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게 아니다. 역사를 배우고 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재점검 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상이 빨갛게 보이는 것이 세상이 빨간 때문인지 내 눈의 색안경때문인지를 계속 고민해야 한다. 우리의 관점이 가지는 장점과 단점에 대해 생각하고 어떤 역사를 쓰던 그리고 그 이야기가 얼마나 완벽해 보이던 거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것을 동시에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럴때 우리는 우리의 것과는 다른 역사와도 공존할 수 있는 포용력이 생긴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는 우리가 변해감에 따라 계속 달라져 갈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역사가 객관적 이야기라는 식으로만 접근하면 한중일간의 역사논쟁은 극단적 대립만 만들어 낼 것이다. 한중일이 동시에 인정하는 하나의 역사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모두가 조금씩 다르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고 만든 역사이므로 서로간의 다름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인정해 주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우리 자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면서 중국인이나 일본인의 관점에서 만든 이야기를 진짜 역사라면서 가르치게 될 것이다. 얼마전에는 방송에 나온 한 역사학자가 일제때 쌀 수출을 왜 수탈이라고 말하냐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 침략을 일제침략이라고 말하면서 그당시의 경제활동을 순수 경제활동으로 기술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20세기 후반의 군사독재시절에 있었던 한국내의 경제활동이 순수 경제논리로 일어났다고 믿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말안들으면 데려다가 고문하고 죽여버리기도 하는 시절에 순수경제논리? 그런데 하물며 더 오래된 과거의 일제치하에서 일어났던 경제활동을 수탈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수출이니 수입이니 하는 단순한 경제활동으로 묘사하는게 말이 되는가? 그건 마치 조폭이 칼들고 협박하면서 일반인에게 돈을 뜯으면서 우리는 그저 거래를 했을 뿐 이라고 하는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21세기에도 재벌기업이 끼어들면 경쟁이 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부자들과 가난뱅이에게 법이 똑같이 관대하다고 말할 수 없는데 식민지시대에 모두 법대로 법칙대로 일어났다고 말할 셈인가. 


역사를 이야기하려면 인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걸 잊고 물리학 논쟁하듯 역사 논쟁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한국인을 믿지 않고 인간을 믿지 않는 사람의 역사관을 과학적으로 논박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 그런 사람들은 설득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받거나 격리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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