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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역사에 대한 생각

한국의 자학적 영웅 서사

by 격암(강국진) 2019. 10. 1.

하루는 고려시대에 대한 사극을 보다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 왕건이 나오는 그 드라마에서 왕건은 그다지 멋지게 나오고 있지 않았다. 권위가 있어보이지도 그렇다고 인간적으로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왕건이 정말로 멋지게 나오는 스토리가 있을까 생각해 보면 개인적인 의견차는 있겠지만 그런 건 없는 것같다. 왕건의 존재감은 뭔가 힘이 한참 부족하다. 


이것은 영웅서사가 한 사회에서 가지는 힘을 생각할 때 안타까운 일이다. 영웅담은 단지 어떤 개인에 대한 존경에 관한 것이 아니고 그 개인이 대표하는 국가와 사회적 질서에 대한 기본적 긍정에 대한 것이다. 즉 사람들은 대개 영웅담을 통해 우리 사회는, 우리 나라는, 우리 민족은 이렇게 대단한 분들이 있었으니 가치있는 곳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정상적 사회란 자기를 반성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긍정하고 자부심을 가지는 사회다. 사실 한 공동체나 국가는 역사에 대해 절대적으로 공평할 수가 없다. 자식이 부모에 대해 완전히 공평할 수 없고 우리가 고향이나 자기 회사에 대해 공평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알고 느끼는 것이 다른데 어떻게 공평하다는 것인가. 영국인이 영국 역사를 영웅들의 이야기로 묘사하고 미국인이 그렇게 하고 프랑스인이 그렇게 하는 것은 편파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내 나라와 내 고향, 내 회사에 대해 긍정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역사에 대한 긍정을 만드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영웅서사다. 유명한 삼국지를 생각해 보자. 삼국지의 주인공은 유비지만 삼국지를 읽어본 사람은 삼국지를 단순히 유비라는 개인의 찬양 소설로 읽지 않는다. 영웅서사는 과거의 인물들을 원초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으로 움직이는 개인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사회적 인물 즉 영웅으로 묘사한다. 그들은 어떤 사상과 문화를 대표하고 그들은 어떤 사회적 명분을 대표한다. 예를 들어 삼국지를 읽으면 유비나 조조의 판단은 천하에 대한 것이지 단순히 개인의 성패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자연히 받는다. 그들은 우리가 리더로서 당연히 가질거라고 생각하는 어떤 대단함을 자연히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해서 영웅서사는 그 역사를 긍적적 눈으로 보게 만든다. 누가 이겼냐 졌냐를 논하기 전에 영웅서사는 그 역사를 대단한 사람들의 수준높은 경쟁과 싸움의 결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영웅의 후손으로 생각하게 되고 우리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삼국지의 주인공격인 유비의 후손이 아니라 여포나 조조의 후예라도 우리는 저 대단한 유비나 제갈공명을 곤란하게 했던 사람들의 후예가 되며 옛날 영웅이야기다 보니 이제와 새삼 누가 누구 후예인지도 따질 필요가 없다. 삼국지를 조상의 이야기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그들 모두가 자기들의 조상이 된다. 


영웅담은 다 이런 효과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영웅담은 한 시대의 원조, 시조를 그리는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들은 한 시대 전체를 긍정하게 만드는 강력한 효과가 있다. 일본 소설 대망 그리고 료마전같은 소설을 생각해 보자. 일본 소설 대망은 도쿠가와 막부를 만들어 초대 쇼군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오다노부나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등장한다. 료마전은 메이지 유신에 기여했다는 사카모토 료마에 대한 소설이다. 물론 이 소설에도 당대의 수많은 다른 이름들이 등장한다. 


이 영웅담들은 막부시대와 메이지 유신 시대 모두를 다시 말해 일본의 최근 역사 모두를 긍정하게 만든다. 이걸 위해 일본 사회는 막부시대가 열리던 시대의 인물들이나 메이지 유신시대가 열리던 시대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끝없이 반복한다. 막부시대의 모순이 메이지 유신을 만든 것이고 메이지 유신의 모순이 일본 패망을 만든 것이지만 그런 부분은 그 시대의 시작을 영웅의 이야기로 묘사함으로써 약화된다. 


우리는 거의 같은 역사를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찌질한 인간의 이야기로 묘사할 수 있다.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 비슷한 이야기를 해도 최후의 쇼군이나 메이지 유신 이후의 질서를 끝낸 2차세계대전 패망의 이야기만 반복했다면 반대의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즉 영웅이 새시대를 연게 아니라 찌질하고 멍청하고 미친 인간들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잠깐 이거 고려나 조선의 말기 시대를 주로 강조하고 반복하는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거 아닐까? 삼국시대는 신라가 민족을 배신하는 것으로 끝났고 고려시대는 고려왕족이 무능해서 끝났고 조선시대는 조선사대부와 왕이 무능해서 끝났다고 하는 역사 말이다. 


자학적 역사관이라는게 다른게 아니다. 이런 긍정이 없는 역사, 영웅이 없고 찌질한 인간만 채워진 역사가 자학적 역사관이다. 이제까지의 관점에서 한국을 보면 우리는 한국은 외국과 뭔가가 크게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한국의 최대 영웅은 세종대왕과 이순신이다. 이 분들이 훌룡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조선을 세종이 만든 것이 아니고 이순신은 일본을 정벌한게 아니라 조선을 지킨 인물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고려나 조선같은 거대한 국가적 질서의 틀을 만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치적 상황의 유사성을 생각하면서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 보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비슷한 인물에는 왕건이 떠오른다. 그들은 결국 호족들이 지역을 나뉘어 다스리던 세상을 통합하여 천하통일을 이뤄낸 인물들이 아닌가. 그런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는 영웅적인 반면 왕건은 별로 그렇지가 못한 것같다. 적어도 일본 소설 대망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참고 기다려 목표를 이뤄내는 끈질긴 의지의 인물로 그려지지만 왕건을 정말 인간적으로 그려내는 이야기나 드라마를 나는 별로 본적이 없다. 적어도 그런 이야기가 충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역사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다. 주변을 돌아보라. 내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왕건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마찬가지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이성계나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이방원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우리나라에 얼마나 되는가. 그들은 모두 이땅에서 오백년을 지속한 나라를 세운 인물들인데 말이다. 


나는 왕건이나 이성계를 무조건 찬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고려나 조선이 무조건 찬양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영웅서사는 어떤 개인의 그 국가나 사회적 질서에 대한 기본적 긍정을 의미한다. 그것이 약하다는 것은 한마디로 우리는 고려나 조선의 역사를 기본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미있는 비판은 기본적 긍정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기본적 긍정없는 절망속의 비판이란 그저 자학에 불과하다. 상대를 적으로 인식하고 공격하는 것이니 들을 가치가 있는 비판이 아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어왔다. 내가 좋아하는 한국 드라마중에 뿌리깊은 나무라는 드라마가 있다. 이 드라마는 세종의 한글창제를 두고 사람들이 찬반으로 패가 갈려서 싸우는 역사에 대한 것인데 이 드라마를 보면 한글이 옳냐 그르냐의 문제를 떠나 그 싸움은 사상전쟁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아직 충분히 많지 않고 충분히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같다. 


사상전쟁과 애들싸움의 차이는 사상전쟁은 나 하나의 동물적 감정이 아니라 이 세상을 운영하는 정책에 대한 것인데 애들싸움은 유치한 감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외국에 비해 영웅이야기가 한국에 드물다는 것은 우리는 외국의 싸움은 사상전쟁으로 이해하고 우리들 싸움은 애들싸움으로 이해한다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외국의 싸움은 영웅들의 싸움이고 우리의 싸움은 욕심많은 찌질한 인간들의 개인적 다툼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사극하면 다 표독하고 욕심많은 외척이나 왕후가 무능한 왕을 주물럭거리는 것만 생각나지 않는가? 욕심만 있고 생각은 없다. 유치한 애들싸움이다. 이게 자기 폄하가 아니면 뭐가 자기 폄하인가. 이것은 식민역사의 결과다.  


영웅서사가 별로 없는 한국에도 영웅서사가 있기는 있다. 그것은 바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영웅서사고 김구 김대중 노무현의 영웅서사다. 그런데 거듭말하지만 영웅서사는 한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이 상징하는 국가와 사회질서에 대한 것이다. 나는 김구 김대중 노무현을 영웅으로 생각하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영웅으로 여기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 나라의 개혁이 현재진행형이고 예를 들어 박정희를 영웅으로 인정하는 서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개혁을 해야할 바로 그 부분을 그냥 긍정해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을 고통받게 만들고, 지금 개혁해야 할 사회적 불평등과 부정부패와 잘못된 관행을 만들어 낸 박정희를 영웅으로 긍정하면서 어떻게 사회적 개혁을 믿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한 사회에서 사람들의 의견이 갈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니까 이 나라가 김구-김대중-노무현 영웅서사를 믿는 사람들과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영웅서사를 믿는 사람들로 갈라져 있다는 것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 두 진영을 편의상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으로 이 글에서는 부르기로 하자. 문제는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모두 포괄하는, 모두가 믿는 영웅서사가 너무 작다는데 있다. 이건 국가 정체성의 문제다. 국민모두가 인정하는 영웅서사가 너무 작아서 국민통합이 약하다. 그래서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 마치 두 개의 서로 다른 나라가 싸우는 것처럼 된다. 나라가 망해도, 나라를 팔아먹어도 이 싸움만은 이겨야 한다는 식이 되기 쉽다. 


아닌 것같지만 우리는 김구도 국민적 영웅으로 제대로 대접해 주지 않는다. 보수진영은 친일파와 너무 뿌리가 가까워서인지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도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국제공항의 이름은 벤구리온이고 벤구리온은 바로 이스라엘독립운동에서 김구같은 역할을 한 사람이다. 우리는 한국에는 왜 김구공항이 없는지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그것도 알고보면 우리가 우리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와 깊은 연관이 있다. 


보수는 기이하게도 국가의 역사를 깍아먹으려고 하는 듯이 건국절 논란을 펼친다. 이것도 바닥에는 결국 영웅서사의 문제가 있다. 815 광복을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할 때 그 시대의 시작은 이승만이 되고 그들은 이승만의 영웅서사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고정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일제시대에 일본에 저항했던 조선인들이 대한민국의 시대를 처음으로 여는 영웅들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할 때 친일파를 번성하게 한 이승만은 그 정체성을 흐리게 한 악당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한민국이 조선과 고려로 연결되어 한줄로 긍정적 서사를 만드는 것보다는 고려와 조선 모두의 역사를 가치없는 것으로 폐기하고 새로운 나라가 이승만을 시작으로 광복과 함께 열렸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고려-조선의 역사가 일제침략으로 끝나버렸는데 그를 이어가려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고려-조선의 역사가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이건 무리한 행동일 뿐만 아니라 유치한 행동이고 자해다. 요즘 한국은 부유해졌고 문화적 영향력도 꽤 커졌다. 그리고 그런 저력은 불과 몇십년전에 누가 뭘 해서가 아니라 이 땅에서 수천년간 살아온 문화에서 나온다. 왜 우리가 우리 스스로 자기 역사를 잘라먹고 부인하는가. 우리는 최소한 고려나 조선을 긍정하고 그 바탕위에서 서로의 차이를 논해야 한다. 거기서 일제시대에 일본에 저항했던 역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남의 눈으로 스스로를 비하하는 관점을 반복하면서 자학을 계속할 것인가. 그래서는 북한과의 평화공존도 불가능할 것이다.  전범을 기리는 야스쿠니 신사문제로 일본과 다투는 것을 봐도 알듯이 두 집단이 공존한다는 것은 서로의 영웅을 인정해 줄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우리는 북한과 어떤 영웅을 공유하는가. 우리의 영웅이 김일성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박정희 전두환이 북한의 영웅인가?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현실이 뭔가 기묘하다는 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웅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생각해 볼 때 보다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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