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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역사에 대한 생각

정보의 수집과 보존으로서의 세계사

by 격암(강국진) 2021. 8. 5.

제이콥 브로노우스키가 쓴 책, 인간 등정의 발자취는 인간의 역사에 대한 고전적인 기술을 보여준다. 그것은 화석에 근거한 인류의 진화에서 철기의 발명이나 수학의 발전, 건축학의 발전등 여러 분야들이 어떻게 발전해서 오늘날의 현대문명을 아니 오늘날의 인간을 만들었는가를 다각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흥미롭고 유익한 관점이지만 여기에는 나름의 단점이 있다. 우리는 이런 대단히 많은 분야에 대한 백과사전식 기술들로 부터 뭔가를 많이 배우는 것같으면서도 동시에 절망을 느끼게 된다. 정보의 양이 늘어날 수록 그런 정보들이 어떤 더 기초적인 관점과 통찰로 통합되어져야 할 것같다는 생각이 들며 그렇지 않을 때 오히려 편견만 만들 것같다. 예를 들어 그 책에서 수학이나 건축학에 대해 혹은 고고학에 대해 몇십페이지를 할애해서 기가막힌 요약을 한다고 해도 수천년동안 발전한 하나의 분야에 대한 몇십페이지 짜리 요약이 편견을 만들지 않을 수 있는가? 이래서는 철학을 추구한다는 책의 취지가 좀 아쉽다. 우리는 그 많은 정보들을 하나로 꿰뚫을 키워드가 필요하다. 그래야 각각의 정보는 통일적 의미를 제공해 주는 문맥을 가지게 된다.  

 

하나의 추상적 단어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어쩌면 이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꿈일 것이다. 인간의 역사를 꿰뚫는 그런 꿈같은 단어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있다면 그건 아마도 정보라는 말일 것이다. DNA에 존재하는 것도 결국 정보이며 인간 진화의 역사라는 것은 이 정보가 어떻게 수정되어져 왔는가에 대한 묘사다. 하지만 정보라는 말이 역사와 관련해서 힘을 가지는 것은 진화가 아닌 환경의 변화에서 오히려 더 두드러 진다. 

 

브로노우스키는 인간 등정의 발자취에서 인간은 여우원숭이에서 호모 사피엔스로 200만년만에 진화했다고 지적한다. 200만년이란 고작 1-2만년을 헤아리는 문화적 발전의 시기를 생각하면 아주 긴 시기이지만 진화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즉 다른 동물들은 이 기간동안 그다지 진화하지 않아서 그 화석이 비슷하다. 오직 인간의 조상들만 골격이나 뇌의 크기같은 것이 바뀌는 변화의 속력이 전혀 달랐다. 왜 일까? 이것은 흥미로운 질문이지만 이 글의 문맥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이렇게 빠른 진화의 속력으로 봐도 1-2만년은 짧은 기간이며 따라서 우리는 인간 문명의 발달을 이야기하면서 DNA의 변화 즉 유전적 정보의 변화를 논할 필요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1-2만년의 기간은 정보적인 측면에서 뭘 의미하는가? 우리는 먼저 하나의 생명체가 자기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행위는 모두 정보의 기록이 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집을 생각해 보자. 부모가 집을 지어서 우리에게 물려주었을 때 우리는 그걸 어떤 정보가 적힌 책을 물려준 것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정보의 전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쉽다. 하지만 부모는 집이란 주거환경을 만들었고 뒤에 태어난 우리는 그걸 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지는 않는다. 대안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인간을 위해 개발된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것보다 쉽기 때문이다. 이것은 패러다임이다. 주거문화의 패러다임은 쉽사리 바뀌지 않으며 따라서 이 적응의 과정은 결국 정보의 전달이 된다. 부모세대는 세상을 살아가는 특정한 하나의 방식을 만들었고 그걸 집이라는 물체의 형식으로 후세에게 물려줄 때 그 정보의 수명은 한 개인의 수명보다 긴 것이 된다. 

 

유전정보의 변화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것은 생물학적 진화가 아니지만 정보의 측면에서 보면 별 차이가 없다. 생명체와 생명체를 둘러싼 환경중에서 생명체 내부의 유전자 정보를 바꿔서 정보를 물려주는 것은 생물학적 진화이며 주변 환경에 그 정보를 기록해서 후세에게 물려주는 것은 문화적 문명적 진화다. DNA가 바뀌지 않았다고 해도 인간이 비행기를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고 그것을 보편화시킨 것이 인간이 하늘을 나는 동물로 진화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지금 날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를 정보라는 하나의 관점에서 전체적으로 그리고 서로 비교하면서 볼 때 우리는 즉각 몇 가지 사실들을 느끼게 된다. 우선 우리는 우리의 문명과 문화를 지나치게 이 분야, 저 분야로 나눠서 조각조각 보는 경향이 있다. 생물학적 진화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 여우 원숭이가 200만년에 걸쳐서 호모 사피엔스가 되었다고 할 때 우리는 여러가지 중간단계의 생물들을 하나 하나 개체로 떠올린다. 그런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우리가 여우 원숭이의 눈이 어떻게 호모 사피엔스의 눈이 되었으며, 여우 원숭이의 위장이 어떻게 호모 사피엔스의 위장이 되었나 하는 식으로 몸을 여러조각으로 따로 따로 떼어내서 생각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하지만 인간 문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농업이나 금속산업 혹은 물리학이라는 각각의 분야들을 따로 떼어내 그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보편적이다.  

 

우리는 생물학적 진화를 이야기할 때 그 개체가 환경속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주체적인 하나라는 관점을 유지하는 일이 많다. 만약 우리가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를 통합적으로 본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문명을 통째로 생존을 위해 애써온 개체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끝없는 세부사항에 빠지는 대신 문명이나 사회를 유기적으로 생명체처럼 전체적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각각의 부분만 봐도 복잡한데 전체를 어떻게 보냐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생물학적 진화에 대해 생각하고 배운 점을 기억하면서 그걸 역사에 적응한다면 우리는 인간 역사에 대해서도 같은 일을 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우리가 다양한 생명의 현실을 진화의 과정이라는 과정의 결과물로 보는 것처럼 인간의 역사도 혹은 인간 그 자체도 어떤 과정의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가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인류 문명의 역사를 인간과 인간의 사회가 진화하는 과정, 정보가 누적되는 과정으로 봐야 할 것이다.

 

생물학은 진화론과 DNA 구조의 발견이래 절대적으로 바뀌었다. 진화론이 등장하기 전에 생물학은 수없이 많은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진화론이 등장하자 무한히 많은 생물들의 존재 방식들 자체보다 그것들이 존재하게 된 과정 즉 진화의 과정에 주목하게 됨으로써 생물학은 단순화했다. 세상에는 인간들을 포함한 다양한 생물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진화 과정들의 결과이며 결국 생명현상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DNA의 변화라는 것이다. 이것은 뉴튼의 방정식들이 어떻게 물리학을 단순화했는가와 정성적으로 같은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움직임이 있지만 그러한 움직임들은 모두 뉴튼의 운동방정식이 묘사하는 과정의 결과이며 따라서 뉴튼 방정식은 세상을 간결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이제 움직임 그 자체보다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원인인 힘에 더 많은 관심을 둔다. 주어진 힘과 운동방정식이 있을 때 세계는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다. 

 

생물학적 진화와 문명적 진화를 비교할 때 두드러지는 정체성의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생물학을 할 때는 하나의 생명 개체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는 동시에 그 생명의 본질인 정체성이 유전자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유전자가 확연히 달라지면 우리는 그것을 다른 생명체로 본다. 초파리와 인간의 DNA는 60%가 같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을 40%의 유전자를 더 가진 초파리로 파악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인간을 2%의 DNA를 더 가진 침팬지로 말하지 않는다. 인간과 초파리는, 인간과 침팬지는 전혀 다른 존재로 인식된다.

 

그런데 문명의 진화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를 여전히 그저 호모 사피엔스로 본다. 즉 인간으로 파악되는 어떤 존재가 단순히 문명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DNA에 들어있는 정보든 문화, 문명적 전승에 있는 정보든 정보를 우리의 정체성의 핵심으로 본다면 우리는 여우원숭이와 우리를 전혀 다른 동물로 인식하듯 전혀 다른 차원의 정보를 가진 인간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생명체로 파악해야 한다. 사실 내가 자주 강조하듯이 원시인은 그냥 털옷을 걸친 현대인이 아니다. 우리의 본질 그 자체거나 적어도 본질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정신이 원시인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원시인과 우리의 DNA가 실질적으로 같다고 해도 우리는 원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없다. 상상도 할 수 없다. 개나 고양이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알 수 없는 것이나 거의 같다. 원시인과 우리의 머리속에 들어있는 정보는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태어날 때의 우리는 누구나 원시인과 비슷하지만 언어를 배우기 이전의 유아기의 기억을 우리는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그때의 감정과 사고를 확연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는가? 그 기억도 우리가 나중에 합성해 낸 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정보를 역사의 핵심으로 하는 관점을 보다 의미있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정보가 어떤 수단을 통해 기록되고 보존되는가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잠깐 생물학으로 돌아가 보자. 일찌기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DNA 구조의 발견 이전에 출간한 물리학자 어윈 쉬뢰딩거는 진화와 생명에 대해 아주 중요한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그것은 양자역학적 효과로 인해 생겨나는 분자의 구조적 안정성이 생명진화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분자는 양자효과 때문에 그 모양이 디지털 신호처럼 뚝뚝 떨어진 형태들만 가지게 된다. 이때문에 열적 소음이 유전자를 파괴하지 않는다. 즉 유전자라는 고분자의 구조가 열적 요동때문에 파괴되지 않기에 유전정보는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방사선같은 강력한 입자들만이 유전적 돌연변이를 만든다. 생물학적 진화의 전제조건은 정보의 기록과 보존이다. 분자구조는 양자효과때문에 정보를 기록하고 보존할 능력을 가지게 되었고 따라서 생명이라는 존재가 세상에 있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뒤죽박죽의 죽같은 생태일 것이며 특히 고등생물은 탄생하기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어떤 기적적인 진보와 발견이 어느 사회에서 우연히 이뤄졌다고 하더라도 모든 문화적 변화는 기록되고 보존되지 않으면 사라진다. 다시 말해 사회적 진화에 기여하지 못하고 사라지고 잊혀지는 것이다. 오늘날의 인간, 오늘날의 문명을 만드는데 기여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건 누적되고 보존된 정보다. 브로노우스키는 아직도 순록무리를 쫒아다니며 살아가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유목민족인 랩족을 소개한다. 이 유목민들은 매일 매일 새로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들은 매일 이동해야 하기에 물건도 많이 소유할 수 없다.  이 말은 그들이 누적시키는 정보가 상당부분 유실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문명적 진화를 이룩하지 못하고 마치 현대의 원시인들처럼 살고 있다. 

 

그런데 생명과 문명 사이에는 차이도 있다. 생명체에서는 유전자라는 고분자가 정보를 기록하는 유일한 수단이지만 문명에서는 그렇지 않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정보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물건은 정보를 기록하고 전달하고 보존하는 수단이다. 칼의 모양은 사람을 죽이는 방식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옷의 모양은 우리의 생활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전사라면 전사의 옷이 있고, 무희라면 무희의 옷이 따로 있기 마련이며 그 옷들은 어떤 생활양식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도구를 쓰는 동물이라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인간은 정보를 기록하는 동물이라는 뜻이다. 특정한 구조를 가진 도구는 인간의 기억과는 달리 시간이 지나도 모양이 변하지 않고,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도 있다. 창이나 활을 물려 받은 인간은 뾰족한 이빨에 대한 유전적 변화를 물려받은 인간과 실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더 많은 도구는 더 많은 기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고대 인간이 현대의 인간으로 발전하는데 있어서 타고난 몸만이 아닌 도구를 쓰고 보존한다는 사실은 정보를 누적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인간은 타고난 언어 본능이 있고 문자가 널리 쓰이기 전에도 간단한 언어는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추상적 형태의 문자가 널리 쓰이기 이전에도 이 세상에 대한 신화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구술되었을 것이며  노래로 전승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림의 형태로 정보를 적고 보존하는 일도 널리 행해졌다는 것을 우리는 석기시대의 유물을 통해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문자기록이 행해지기 시작한 이후 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졌다.  문자는 다른 어떤 매체보다 정보의 기록과 수집, 보존을 편리하게 만든다. 구술로 전승되어 오던 신화들은 그것들이 문자로 기록되고 집대성되기 시작하면서 극복되기 시작했다. 즉 이성의 시대, 과학의 시대는 문자덕분에 시작된 것이다.  문자의 등장은 마치 이 지구상에 탄소 생명체만 있었는데 완전히 새로운 유전자를 가진 생명체가 등장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최초의 문명이라고 말하는 수메르 문명도 불과 5-6천년에 존재했으며 원시적인 형태의 글자를 썼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200만년도 생물학적 진화에서는 짧은 것인데 불과 몇천년만에 인간은 핵무기를 만들고, 화성으로 가겠다는 꿈을 꿀 정도로 변했다.

 

이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용납할 수없는 도발로 여겨질 것이고 인간성 자체에 대한 위협이라고도 말해질 것이 분명하지만 나는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인간이 문자의 사용과 더불어 만들어졌다고 말해야 옳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문자를 사용하게 된 게 아니다. 문자의 사용과 더불어 급격히 증가한 누적된 정보는 진화하여 이전과는 다른 인간을 만들어 냈다. 이 인간은 침팬지와 인간이 다르듯 그 이전의 인간과는 전혀 다르다. 

 

이러한 극적인 변화를 지적하기 위해 나는 유전적 정보만으로 만들어진 태어나는 인간을 자연체 인간으로 부르며 문자로 인해 발전한 문명적 정보가 들어간 인간 즉 교육받은 인간을 사이보그 1이라고 부른다. 어쩌면 문자 이전의 시대 즉 선사시대의 인간도 정보의 측면에서 자연체 인간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몇개의 생명체들로 인식해야 할지 모르지만 내 주된 관심은 사이보그 1의 등장 이후에 있다. 

 

문자의 힘으로 누적된 정보의 양은 그 이전에 가능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며 그것은 무엇보다 인간의 정신 자체를 크게 바꿨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육체라기 보다 정신내지 기억내지 의식이라고 파악할 때 우리는 거의 다가 문자에 의해 누적된 정보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문자도 없이 자기를 돌아보는 즉 자기의 정체성을 생각해 보는 존재가 있을 수 있는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어느 정도 깊이를 가질 것인가? 기록도 없는 세상에서 이 지구상위에서 살고 있는 내가 누구인지 얼마나 알게 될 것이며 그런 정도의 정보로 어느 정도로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파고들 수 있을 것인가. 자의식없이 짐승처럼, 벌레처럼, 돌맹이처럼 존재하는 생명과 지금의 우리와의 차이는 거의 다가 문자가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당신의 본질이 당신의 오른손이나 눈의 형태라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당신의 정신이나 의식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문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이보그다. 마치 PC에 설치된 프로그램처럼 말이다.

 

당신은 질문할지 모른다. 이런 식이라면 왜 여기서 멈추냐고. 5백년전이나 천년전의 문명은 현대문명에 비해 초라하니까 우리는 계속 해서 시대별로 모든 인간들을 새로운 생명체로 정의할 수 있으며 이런게 무슨 도움이 되냐고 말이다. 확실히 정보의 양은 문자의 등장 이후에도 계속 증가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플라톤이나 공자나 부처나 예수의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하나의 종이라고 믿는다. 침팬지와 인간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은 번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순간에도 2-3천년전의 사람들의 글을 읽고 공감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과 정신적으로 즉 정보의 차원에서 소통가능한 존재다. 그러므로 끝없는 세부적 분류는 필요없다.

 

문자문명 이전의 사람들은 우리와 소통이 불가능하다. 사실 그런 사람들의 정신은 지금은 우리가 신비주의라고 부를 종교적 마술적 개념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다. 그들은 인간의 DNA를 가지고 있으므로 계몽에 의해 소통가능한 존재로 변화될 수 있지만 그런 과정없이 그들과 소통한다는 것은 정신분열증 환자와 소통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즉 자기를 지키면서 소통을 할 수가 없다. 어느 한쪽이 한쪽의 정신을 완전히 변화시켜야 소통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미 그들은 문자문명 이전의 사람들이 아니다. 

 

내 글을 이전에도 읽은 사람은 여기서 우리는 사이보그 2의 출현을 이야기 할 수 있고 사이보그 2는 우리를 정신병 환자처럼 취급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겠지만 이 글에서 나는 미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다만 현대인의 역사관은 지나치게 제국주의적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 글을 마치겠다. 즉 우리는 역사를 만들어 가는 기본적인 힘이 무력이라는 생각에 익숙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지배관계에 더 많이 주목한다. 일반대중보다는 왕이 중요하다고 믿는 이같은 관점은 본질적으로 식민지를 건설했던 제국들이나 과거에 역사편찬을 주도했던 왕실이 만들어 퍼뜨린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정보의 관점에서 볼 때 이같은 시각은 아프리카의 생태계를 사자가 왕으로 군림하는 국가로 파악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것이다. 사자가 왕이라면 맨몸으로는 사자와 대결하는 것이 불가능한 인간은 열등한 존재일텐데도 말이다. 사자가 가젤을 잡아먹었다는 사건은 생물학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사자가 왕이라던가 가젤이 부끄러운 일이라던가 하는 일이 아니다. 그게 그런거라면 사람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 죽는다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왕이고 사람이 부끄러운 일이 되어야 한다. 

 

사회적 지배관계를 역사를 만들어가는 기본적 힘으로 보는 관점은 게다가 낡은 것이다. 상업이 발전한 현대에는 이미 영토확대와 약탈을 위한 정복전쟁은 과거의 일이 되었다. 그런 일들이 지금 세상의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는 있다고 해도 그것이 세상을 움직이는 주된 사건들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현대 사회에서는 모두가 모두의 환경으로 존재하여 생태계를 유지한다는 관점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다. 누가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지배한다는 관점은 괜한 권력욕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우리는 진짜로 중요한 사건 즉 정보의 수집과 누적을 무시하게 된다. 

 

예를 들어 현대의 역사를 과거의 왕조를 기술하듯 대통령이나 총리를 죽 나열하고, 이 대통령이 저런 일을 했고, 저 대통령이 이런 일을 했다는 식으로 기술하는 것이 옳을까? 물론 그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지만 나는 정치가의 역할은 오늘날 과장되어 있다고 믿는다. 현대사회에서 시장이 차지하는 힘을 생각했을 때 차라리 당대의 가장 뛰어난 기업가들을 나열하고 그들이 어떤 사업을 했는가를 말하는 것이 현대 사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할 지 모른다.

 

게다가 정치적 경제적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화적 기술적 흐름이다. 예를 들어 20세기에 있어서 정보통신산업과 컴퓨터의 발달을 빼놓고는 현대인의 생활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인공지능같은 미래기술이 아니더라도 정보가 흐르게 만드는 통신기술은 수 많은 정보를 만들고 집대성하고 누적될 수 있게 했으며 덕분에 인간의 기술은 20세기에 눈부시게 발전했다. 예를 들어 지금은 장기이식따위가 뉴스도 되지 않는데 20세기 초만해도 혈액형의 개념조차 없었던 것이 인간 의학의 수준이었다. 내연 자동차가 보편화 된 것이 20세기 초인데 인간은 그로부터 얼마지나지 않은 20세기 중반에 이미 달을 정복하고 핵폭탄을 만든다. 어느날 침팬지가 하늘을 날아가게 된 진화를 했는데 그 시절에 그 침팬지 무리의 대장이 누구였나에 관심을 집중시켜서는 그 침팬지 무리의 현재와 미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제국주의에 물든 우리의 역사관은 점점 시대에 뒤지고 유치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세상에는 물론 많은 것들이 있다. 그리고 어떤 것이 희귀하고 존재감있는 것인가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예를 들어 경제에 있어서도 시대별로 토지가 중요하다가 자본이 중요하고 지식이 중요하며 창의성있는 기업가 정신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시대별로 변해왔다는 설득력있는 주장이 있다. 제국주의의 시대에는 제국주의적 관점이란 것이 보다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며 지금 여기서 말하는 정보의 수집과 누적도 과거에는 결국 제국주의적 지배관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예를 들어 봉건시대에는 지도를 만들고 배포하는 일은 중앙의 허가가 필요한 일이었고 적에게 지도를 주는 일은 반역행위로 여겨질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에 성숙한 물리학과 생물학을 만들어냈듯이 이제 보다 성숙한 역사관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세상을 움직이는 근원적 힘을 파악해야 한다. 정보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바로 그 관점에서 과거의 역사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역사를 현대인의 생활에 맞게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동을 만들어 파는 사람은 우동의 역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 과거의 조상중에 살인자가 있었고 그 살인을 어떻게 저질렀나를 자세히 알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4차산업혁명 운운하는 시대를 살면서 정복왕에 대한 정보로 가득한 역사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불필요한 자기 비하와 충돌을 발생시킬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도 우리는 정보로 바라본 역사가 필요하다. 특히 사이보그 2로 내가 부르는 초인의 등장이 머지 않은 시대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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