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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역사에 대한 생각

역사의 목적과 정신의 부재

by 격암(강국진) 2022. 3. 29.

2022.3.29

얼마전 나는 오랜만에 버틀란드 러셀이 쓴 서양 철학사의 서문을 다시 읽었다. 철학을 사회적 정치적 삶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보며 철학사를 서술하겠다는 이 책은 그 서문에서 짧게 서양철학사와 서양역사를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요약해서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그걸 읽으면서 나는 새삼 한가지 깨닮음과 한가지 질문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한가지 깨닮음이란 역사쓰기는 그 역사쓰기의 대상이 되는 것이 시공을 초월하여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역사란 변화를 기술하는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의 존재 자체를 전제해야 그것의 변화도 기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의 역사를 기술한다면 그 역사의 대상이 되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태아에서부터 아니 심지어 수정란에서부터 중년의 남자나 여성이 될 때까지의 심한 변화를 겪었지만 그래도 모두 자기 자신이므로 같은 역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자기 자신으로 인식한다. 어쩌면 혼백이니 영혼이니 하는 육체적 변화와는 상관없는 존재를 동서양에서 모두 믿었던 것은 이런 이유일지도 모른다.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하는데도 그걸 모두 동시에 같은 존재로 인식한다면 우리는 자연히 어떤 변하지 않는 비물질적인 본질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고대에서 현대까지의 서양철학사를 쓴다는 것은 변화의 기술이지만 그 기간동안에 서양정신이라고 할 어떤 것이 계속해서 존재했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의미에서 오히려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새로운 생각도 아니고 어느 정도 말장난처럼 들리는 지적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깨닮음이 새삼 중요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그것이 바로 숨겨져 있기는 하지만 역사쓰기의 가장 큰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걸 위해서 내가 앞에서 한 말은 약간 수정되고 뒤집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즉 역사쓰기는 시공을 초월하여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역사쓰기의 대상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존재를 창조하는 것이 역사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한국이 있고 한국사가 있는게 아니라 한국사가 한국을 만든다는 뜻이고 내가 있고 나의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역사가 나라는 존재를 만든다는 뜻이다. 

 

한국이니 나니 서양정신이니 하는 것은 모두 인간의 관념이다. 우리는 저기에 산이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산도 우리가 만들어 낸 관념이고 이름이다. 분명 뭔가가 있다는 것은 이런 이름짓기 이전에도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경계를 짓고 또렷히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가 산이라는 관념을 만들어 낸 이후다. 종이돈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인간의 약속이 존재하기 때문이지 그 종이자체가 가치를 진짜로 가진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이라는 것도 인간의 약속과 믿음으로 만들어진 관념인 것이다. 그렇기에 역사쓰기는 바로 그 한국이라는 관념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라는 뜻에서 한국만들기의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국사가 없으면 한국이 없는 것이고 그때문에 종종 몇몇 극우 일본인들이나 그와 동조하는 한국인들이 한국은 조선의 연장이 아니며 해방된게 아니라 1945년에 건국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모두 잘라내면 한국 자체가 대부분 사라지기 때문이다. 역사가 없으면 나라가 없다. 1945년에 건국된 것이 한국이라면 이완용이 매국노일 이유도 없다. 그건 지금은 없어진 남의 나라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문득 한가지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서양철학사를 읽고 있으므로 나는 자연히 우리는 왜 동양철학사나 한국철학사가 없는가하는 질문과 만나게 된 것이다. 동양철학은 존재한다. 하지만 동양철학사는 서양철학사에 비하면 상당히 미약하게 존재한다는 느낌이다. 서구인들은 대개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해서 계속 이어지는 철학사를 기술한다. 그 결과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칸트같은 철학자들을 어떤 하나의 이야기속에서 파악하고 그 결과 몇백년 몇천년전의 사람들도 마치 현대인인 것처럼 가깝게 느낄 때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역사는 어떤 변하지 않는 것을 창조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서구 정신의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마치 과거의 그들이 우리와 약간 생각이 다를 뿐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이에 비하면 동양철학의 대표자인 공자나 노자는 하나의 철학자라기 보다는 어떤 신적인 대상처럼 느껴진다. 동양철학사가 약하기 때문에 그들이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와 가지는 연결이 약하고 그들의 철학이 이어지고 극복되어 우리에게 이어졌다는 느낌보다는 그들이 어떤 신적인 존재로 저기 존재한다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사라지지 않고 이어진 동양정신이라는 것이 있다는 느낌이 약한 것이다. 

 

어느 정도는 서양정신이 현대에까지 이어졌다는 서양철학사는 사기다. 그 안에는 아랍이나 동양의 영향이 축소 거세되어 있다. 그래서 마치 몇천년전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유럽만 지구에서 뚝 떨어져서 존재한 것같다. 이것은 사기이고 왜곡이며 서구 우월주의의 결과다. 서양철학사라는 것은 결국 서구가 세계를 주도하던 지난 몇백년간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일 것이다. 서구정신과 동떨어진 동양정신이라는 것이 고대에서부터 이때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개념은 세상에 별로 없다. 지금 세상에 동양우월주의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동양사람들은 대개 그들이 서양 문화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동양사람이지만 불교나 유교나 노장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유럽철학만 읽는 사람도 많다. 서양철학사가 동양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런 동양사람들은 마치 서구정신의 사생아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데카르트나 칸트는 서양인의 조상이지 그들의 조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동양철학의 현실도 한국철학사에 이르면 아주 배부른 소리가 된다. 한국 철학사는 거의 자취도 없다. 몇몇 사람들이 원효나 이황같은 사람들의 철학을 연구하고 책도 쓰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에 이르는 역사를 저술하는 서양철학사에 비하면 한국철학사는 그야 말로 자취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철학사가 없다는 것이 단순히 그저 학술적인 문제라면 그건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대로 역사쓰기가 그것의 창조라면 한국 철학사가 없다는 것은 한국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분명 서구는 지금 세계를 주도하는 문명이지만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고작해야 몇백년뿐이다. 그 전만해도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도 서양보다 더 잘살았다.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를 쓴 황태연 김종록에 따르면 드라마 이산으로 유명한 정조때는 전세계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잘 살았다고 한다. 잘산다는 것이 반드시 정신의 융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정황을 보았을 때 우리가 세종대왕과 원효의 정신을 토마스 아퀴나스나 마키아벨리같은 사람들의 그것보다 무시해야 할 이유가 없다. 

 

다만 우리는 과거로부터 단절되어 있다. 우리가 쓰는 말들은 상당부분이 서양어를 번역한 것이다. 한자로 되어 있는 말들도 그렇다. 맹자의 경제학이란 있을 수 없는데 경제라는 말이 일본사람들이 근대에 만들어 낸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이 단절때문에 우리는 과거를 제대로 해석하기 어렵다.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의 이원론이니 일원론이니 하는 철학은 심오하게 생각하지만 4단7정론이니 하는 말은 비과학적인 허무맹랑한 이야기, 현대에서는 무가치한 이야기로 생각하기 쉽다. 마음 심자가 동양에도 있었다고 해서 마음이라는 것이 서양과 동양에서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니 서양인의 생각으로 가득 찬 우리는 과거를 알기가 어렵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서구 정신이 수천년전부터 쭉 이어져왔다는 서양철학사는 어느 정도 사기다. 그러므로 나는 애국주의를 내세워 동양정신이나 한국정신을 또렷히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사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서구가 지난 몇백년간 세계를 주도한 결과 지금 세계의 상황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다. 그 대안이 동양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잊혀진 동양정신, 한국 정신은 다시 돌아봐야 할 대상이 아닐까? 

 

예를 들어 최근 한류열풍이 뜨겁다. 그리고 그 인기속에 존재하는 것은 바로 동양문화고 한국 문화다. 그들에게 정이 뭔지, 영웅이 아닌 보통 사람의 용기가 뭔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바로 한류 드라마고 영화다. 서구의 사람들도 그런 점에서 매력과 새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BTS의 팬덤이 정치적 운동을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 이것을 보여준다.

 

진정으로 세계가 하나가 되어야 풀 수 있는 전지구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면 우리는 철학사도 되돌아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서양철학사가 아니라 인간 철학사가 필요하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 동양의 복권을 의미한다. 우리는 한국 정신의 복권도 필요하다. 우리는 세계의 역사를 다시 써서 세계를 창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구를 구원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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