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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역사에 대한 생각

역사와 자기 성찰

by 격암(강국진) 2021.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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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8.7

정도의 문제일 뿐 우리는 모두 우물안 개구리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자기를 미화하는 환상에 빠지거나 반대로 남의 이야기에 빠져 자기를 비하하며 살고는 한다. 이런 환상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성찰이란 것을 하는데 이 일은 개인적 차원에서 할 때도 있고 집단적인 차원에서 할 때도 있다. 개인적 차원의 자기성찰의 결과는 자아발견이고 집단적 차원의 그것은 바로 역사다. 뒤집어 말하면 역사는 집단적으로 우리는 누구인가를 답하려는 노력이며 자아발견이란 자기 개인의 네러티브를 찾는 것이다. 이렇게 두 개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두 개의 노력을 같이 보면 우리는 개인적 자아발견에 대해서도 역사에 대해서도 배우게 되는 것이 있다. 역사가 무엇인지, 한국의 역사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자아발견이 무엇인지, 개인으로 자기를 발견하고 지키기 위해 내가 뭘 해야 할 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각각 서로 다른 어려움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무시하고 있던 것들이 들어나기 때문이다. 

 

원한다면 믿음이라고 불러도 좋지만 나는 이 글에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증명될 수 없는 것들을 모두 환상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말은 터무니 없는 생각들뿐만 아니라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믿음도 일단은 여기서는 환상이라고 부른다는 뜻이다. 정당하다 싶은 믿음도 모두 과학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으로는 살 수 없다. 언제나 믿음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심지어 자연법칙을 찾는 과학자조차 자연에는 인간이 이해가능한 간단한 수학적 원리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런 믿음을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앞에서 말했듯이 유한한 우리는 모두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나마 개인의 경우에는 터무니 없는 환상이 있다면 그 개인을 둘러 싼 사회가, 다시 말해 개인과 개인간의 관계라던가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가 그 환상을 깨도록 자극을 준다. 그래서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여자가 나는 모든 남자들의 사랑을 받는 매력적인 여자라는 환상을 계속 해서 유지하기란 어렵다. 그 여자는 일상속에서 남의 눈으로 자신을 보면서 자신을 객관화해 나가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개인차나 상황적 차이가 있다. 기업의 회장같은 사람들은 스스로가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환상에 빠지기 쉽다. 참 재미없는 농담을 해도 주변에서 웃어대는 사람이 가득하니까 말이다. 누가 애써서 기업회장에게 당신은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할 것인가. 물론 이와는 반대로 남들의 간섭과 조언을 많이 받는다고 반드시 객관적이고 올바른 믿음에 도달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말했듯이 남들도 그들의 환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개인적 차원에서 우리는 타인으로부터의 간섭을 지나치게 받는다. 우리는 누구나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애로 태어나서 주변 사람에게 의존하며 키워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집단의 경우에는 종종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지나치게 작다.  우리는 혼자서는 살 수 없지만 하나의 집단 내부에서는 어느 정도 자급자족하면서 살 수 있다. 게다가 집단 내부의 사람들은 같은 것을 믿으면서 서로 서로 환상을 지켜준다. 이때문에 우리는 훨씬 쉽게 환상에 빠져들고 거기서 빠져 나오게 만들 자극에서 멀어지게 된다. 좋은 예는 사이비 종교일 것이다. 사이비 종교의 대표적 특징이 사회적으로 폐쇄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서로의 환상을 강화하면서 객관적으로는 도저히 납득될 수 없는 믿음을 유지해 간다. 

 

물론 사이비 종교만 환상을 가진 것은 아니다.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자꾸 자꾸 생겨나는 것이 환상이지만 그것을 수정하거나 없애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특히 우리가 듣기 좋은 환상일 때가 그렇다. 그런 일을 하기에 우리는 대개 충분히 부지런하지 않고 언제나 충분한 동기를 가지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저기 어디 남미나 동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우리 민족은 세계를 구원할 선택받은 민족이다라는 믿음이 퍼진다고 해서 굳이 미국인이나 한국인이나 프랑스인이 거길 찾아가서 반박하고 그 환상을 깨려고 노력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쩌면 사회적 융합을 위해서는 그런 믿음이 어떤 좋은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거기에서 장사라도 하고 싶다면 외국인이라고 해도 거기가서는 적극적으로 저도 이 민족이 위대하다고 믿습니다라고 외쳐야 할 판이다. 그 과대망상이 독일 나치의 유럽침공이나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주장같은 일이 되어, 다른 나라의 믿음과 정면으로 부딪히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하고, 한국의 근현대사를 생각해 보면 한국의 역사가 가야할 길은 아주 멀고 험하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적어도 100년 이상을 식민지나 약소국으로 살면서 주변 나라의 휘둘림을 당해왔다. 결국 오랜 기간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만들어 낸 환상을 역사라고 수입하면서 배우고 산 것이다. 중국의 환상, 일본의 환상, 유럽의 환상, 미국의 환상을 말이다. 이제 우리도 좀 여유가 생기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고 그동안 부당하게 점령당하고 빼앗겨온 것에 대해 정당한 주장을 하려고 하면 그 길은 정말 멀고도 험할 수 밖에 없다. 단순히 독도나 김치를 지키는 것보다 해야할 일이 아주 많다. 우리의 역사는 이제 겨우 시작이다. 

 

세계가 서구중심의 사고로 가득 차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유럽인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황인종이라고 부르고 차별하며, 얼마나 넓은 땅을 아시아라고 부르고 있는가만 봐도 알 수 있다. 심지어 이스라엘도 아시아의 국가라는 것은 한국이나 일본같은 나라입장에서 보면 어이가 없을 정도다. 유럽만 문제가 아니다. 모든 것을 삼키려고 들고, 좋은 것은 내 것, 나쁜 것은 외부에서 온 것이라고 말하려는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은 무시무시하다. 스스로를 아시아를 계몽시킨 선진국민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이 한 일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들을 비하하는 일을 상식으로 알고 있는 일본의 사고 방식도 물론 무시무시하다. 그리고 이 거대한 경제대국들이 전 세계에 자신들의 환상을 심으려고 얼마나 노력해왔고 지금도 그러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그 일도 참 무시무시하다. 사실 유럽인이나 미국인이 극동아시아의 진정한 역사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겠는가. 그냥 자주 보는 일본 사람이나 중국 사람들이 이렇다라고 하면 그런가 할 뿐인 경우가 많을 수 밖에 없다. 그런게 백과사전이나 책에 실렸던 것이다. 적어도 최근까지는 말이다. 

 

앞에서 말했다 시피 역사는 국가적 차원의 자기성찰이다. 그리고 우리는 개인의 자기성찰을 위해서도 역사는 어떻게 쓰여지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역사에 있어서는 우리가 피해야 할 한 가지 큰 착각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역사를 쓰려고 할 때 그와 관련된 모든 사실들을 모은다면 그 사실들속에서 역사는 저절로 나타난다는 생각이다. 우선 국가적 차원에서건 개인적 차원에서건 모든 사실에는 절대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인생의 의미가 뭔지를 확실히 깨달은 후에 살기를 시작하는게 아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고민만 하다가 삶을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 우리는 일단 역사를 쓰고 사실들을 발굴하면서 그것을 수정한다. 어떤 사실을 발굴할 것인가는 우리의 역사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역사와 사실의 발굴은 서로 서로에게 되먹임을 주는 관계다. 우리가 민중의 역사를 쓸 것인지, 기술자의 역사를 쓸 것인지, 철학자의 역사를 쓸 것인지에 따라 세상은 달라지게 되고 확고하게 보였던 이름들의 정의는 불확실하게 되기도 한다. 

 

이렇게 관련된 사실을 모두 모으는 것이 불가능하며 애초에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이란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역사관에 물든 것들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는 우리가 더 알아야 할 사실이 없으며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역사를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역사라고 믿는다. 이것은 무시무시한 착각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역사를 과학과 혼동하게 된다. 과학이 아닌 것을 과학으로 맹신한 사람들은 많은 비극을 만들어 왔다. 그중에는 공산주의자들도 있다. 

 

역사는 과학과 다르다. 아시모프같은 작가는 역사가 과학이 되는 미래를 그린 SF소설 파운데이션을 썼지만 그것은 과거에도 지금도 환상에 불과하다. 그리고 영원히 그 상태로 남을 것이다. 과학은 엄밀하고 방대한 측정에 기반하는 것이며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것이다. 이 우주에서 단 한번 밖에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법칙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무수히 많은 우연적 요소를 가지고 무수히 많은 자유도를 가진 사회현상은 제 아무리 데이터가 많아도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큼 확실한 법칙을 발견하게 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경제학이나 사회과학은 과학으로 착각되는 일도 있지만 과학이 아닌 것이다. 과학에 도달하고 싶지만 여전히 과학에 도달하지 못한 학문이다. 미국이나 한국이 어떤 나라인가에 대한 의견은 앞으로 크게 바뀔 수 있지만 뉴튼의 중력법칙은 바뀌지 않는다. 그걸 수정한 일반상대성이론이 나왔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로케트를 쏘면서 뉴튼의 중력법칙을 쓴다. 역사와 개인의 정체성 찾기를 과학과 혼동하면 어떤 의미로 처음부터 역사쓰기와 자기 찾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절대적 역사와 절대적 자기란 없기 때문이다. 학창시절에 시험볼 때 쓰던 논리적 소거법따위로 나는 누구가 아닌지를 지워나가기 시작하면 당신은 아무 곳에도 도달할 수 없다. 현실은 언제나 회색이고 확률적이다. 

 

과학에 비하면 역사는 그 대상에 대한 거친 이미지같은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 때 생기는 일처럼 그  이미지는 틀린 사실에 기반했을 때도 어떤 의미로 정확할 수 있다. 드라마나 영화는 짧은 요약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역사는 사실에만 기반해도 틀릴 수가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결코 모든 사실들을 알지 못하며 모든 사실을 안다고 해도 그 중의 일부에 기반하여 이미지를 만든다. 성추행문제로 고발당한 남자는 사실은 집에서 아내에게 매우 다정하고 헌신적인 남자일 수 있다. 고등학교때 학폭에 가담한 사람도 사실은 매우 정의롭고 따뜻한 남자일 수 있다. 이런 문제는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관찰이 있어야 어느 정도 전체그림이 보이게 되는 문제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다. 시간이 없고, 관심이 없고, 아니면 애초에 적당한 사실들을 충분히 모으는 것이 불가능하다. 

 

최근에는 삼국지의 관우장군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관우는 유명한 실존인물인데 이 이야기는 관우의 청룡언월도에 관한 것이다. 삼국지를 읽고 관우를 아는 사람은 그가 휘둘렀다는 거대한 청룡언월도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실은 관우는 언월도를 본 적도 없다는 재미있는 주장이 있다. 언월도가 세상에 등장하는 것은 그가 죽고 나서 한참 뒤인 당나라때의 일이라는 것이다. 유비가 촉나라를 세운 것은 221년의 일이고 당나라가 세워진 것은 618년의 일이다. 관우의 청룡언월도는 사실일까 환상일까? 사소하다면 사소하지만 이 하나의 차이가 이미지에 주는 영향은 아주 크다. 

 

조선에 대한 이미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조선시대 전기쯤에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6백년전에 조선이 살기 좋은 나라였을까? 당대의 프랑스와 일본과 영국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잘 살았을까? 당신은 이 질문을 매우 학문적인 질문으로 생각하고 이에 대한 통계를 구하고 이를 통해서 정답에 도달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비록 당신은 확답을 줄 수는 없을지 몰라도 아는 것이 많은 역사학자가 어느 정도 연구를 하면 그 정도는 확실한 답을 말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러니까 2021년에 우리가 같은 질문을 던져 본다고 해보자. 한국을 프랑스나 미국이나 일본과 비교한다면 어느 나라가 더 살기 좋은 나라인가? 아마도 1인당 GDP같은 것을 비교해서 이 질문에 우리가 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미국과 일본에서 각각 4년과 10년씩 살아본 내 입장에서 말해보자면 이 질문에 확고한 답은 없다. 한국을 좋게 말하자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생활의 질이 형편없어지는 부분이 미국이나 일본같은 곳에서 살면 있다. 그런데 2021년에 확실히 대답 못하는 질문을 6백년전의 세계에 대해서는 확실히 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을까? 

 

많은 사람들은 600년전의 조선이 프랑스, 영국, 일본같은 나라보다 못 살았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 답이 반대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사실들은 몇가지 말해 보겠다. 고려는 청자로 유명했고 조선도 백자로 유명했으며 조선의 도공들이 임진왜란때 일본으로 잡혀가서 일본이 자기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요즘엔 자기가 별 것이 아니니 이걸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나 당시에는 자기는 최고의 하이테크 제품이었고 굉장히 비싼 교역품이어서 유럽에서는 자기 하나가 성 하나 가격을 할 만큼 비쌌다고 한다. 그런데도 청은 자기 수출을 끊는다. 그 덕에 일본은 자기를 많이 팔아서 돈을 벌었고 유럽에 일본의 이름을 알렸다. 자기의 포장지의 형태로 일본의 그림들도 유럽으로 많이 건너갔는데 여기에 영향을 받은 사람중에는 고호도 있다고 한다. 일본이 지금의 일본이 된 것에는 자기기술이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자기를 왜 유럽은 오랜동안 수입했을까? 자기는 1300도 이상의 온도로 구워야 하는데 이 가마기술이 없어서 유럽은 자기가 아니라 도기밖에는 굽지 못했던 것이다. 안한게 아니라 못한 것이다. 이 하이테크 제품으로 일찌기 유명했던 것이 고려고 조선이다. 가마기술은 도자기에만 관련되었을까? 금속도 고온이 있어야 제련하지 않는가? 왜 유럽보다 우리가 먼저 금속활자를 만들고, 왜 주변 나라와는 달리 우리는 금속 젓가락을 오래전부터 썼을까? 왜 신라의 금관이 그렇게 대단한 예술품일까?  금속이든 나무든 그 대단한 영국에 포크가 보급 된 것은 17-18세기의 일이었고 미국은 그보다 늦어서 18세기에나 포크가 보급되었다. 그러니까 영국인이나 미국인은 그 이전에는 칼만 들고 빵과 고기를 베어 먹거나 손으로 집어먹는 무식해 보이는 식사를 했다는 말이다. 도자기와 금속활자 그리고 젓가락은 모두 연결되어 있는거 아닐까? 정말 조선이 문화적으로 기술적으로 뒤진 나라였을까?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 어느 쪽이 더 부자나라처럼 들리는가? 

 

이런 사실들에 대해 누군가는 다른 해석을 내놓고, 다른 사실들을 내놓을 수 있다. 나는 이런 몇가지 사실들로 조선을 최첨단 하이테크 지상천국으로 주장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유럽의 멋진 기사와 왕이 나오는 영화나 일본의 사무라이의 자랑이 좀 퇴색되어 보이지 않는가? 그게 이미지다. 우리는 계속 못살았고, 지금 부자들은 아주 예전부터 원래 잘살았다는 식의 이미지. 그리고 그건 완전 사기는 아니라고 해도 무시당해온 한국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사기다. 

 

역사라고 하면 고리타분한 분야처럼 생각되지만 나는 오늘날이야 말로 역사가가 할 일이 많은 시대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일찌기 일본의 경제학자 오마에 게이치는 1995년에 국가의 종말이란 책을 썼다. 통신의 발달과 경제적 소통이 지역국가의 국경선이란 것을 무력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이다. 비록 반세기 뒤인 지금도 국가는 종말을 고하지 않았지만 국가간의 소통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이 말은 각 국가가 내부적으로 가지는 환상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세계는 이제 모두가 믿을 수 있는 보다 광역적인 역사를 요구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을 때 서로의 환상이 충돌하는 것이 괴로운 나머지 경제 활동이 위축되거나 심하면 전쟁이 날 수도 있다. 좋은 역사가 있어야 평화가 있다. 역사란 단순한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 자아발견이라고 하는 말을 기억하라.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이 금방 자동번역되어 외국으로 번질 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사람들이 기사에 다는 댓글이 바로 바로 번역되어 한국으로 전달되기도 하는 그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는다. 중국인 중의 상당수가 한국전쟁은 한국의 북침으로 시작되었고, 한국은 중공군의 참전에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거나 일본인 중에는 세계 2차대전은 미국의 공격으로 시작되었고 일본인들은 그저 전쟁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다. 한중일의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서로가 가진 환상의 거리가 아주 멀기 때문이다. 

 

세계는 열려있는 것같았지만 진정한 열림은 이제 시작인 것같다. 그리고 만약 세계가 점점 더 열려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닫혀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글로벌한 역사에 대해 무관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미국인은 미국인대로, 일본인은 일본인대로 자기 찾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모두 모여서 인간의 역사가 어떠했는가에 대해 논해야 할 필요가 증대하고 있다. 사실 중국의 영토분쟁만 해도 극동지역의 역사에 대해 국제적인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힘쎈 중국이 그저 자기가 조금만 관련되었다 싶으면 문어발식으로 모두 중국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세계평화를 위해서 절실한 것은 세계인을 위한 역사, 인류 전체를 위한 이야기다. 

 

이제 개인의 자아발견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고 글을 마치자. 역사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한국의 입장이라던가, 한국의 정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역사란게 뭔지 우리가 어떤 영향을 주변에게 받는가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바로 그렇게 배운 것을 스스로의 네러티브를 만드는 데도 적용해야 한다. 우리는 그냥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만들어지고 키워진 정신이다. 우리가 누구인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특정한 사실들에 주목하도록 교육받았거나 회피하도록 교육받았다. 우리는 스스로 그렇게 하기로 선택했다. 그런 행동과 선택이 이어지면서 지금의 내가 것이다. 역사는 과학이 아니다. 그리고 자아발견도 과학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를 위한 하나 뿐인 역사저술가로서 좋은 이야기를 발굴하려고 애쓰고 있다. 이야기를 완성하고 사는 것이 아니다. 살면서 이야기를 바꿔가는 것이다. 오늘도 자기를 주인공으로 하는 멋진 이야기를 만드는데 애쓰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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