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6.29
엘리트 주의는 일반적으로 전체 사회를 소수의 뛰어난 사람들이 주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신분제가 유지되었던 사회에서 이는 왜 잘사는 상류층이 많은 사회적 보상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오늘날에도 실질적으로 신분제가 존재하며, 엘리트 주의가 옳다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 차이가 있을 것이나 적어도 그렇게 암묵적으로 믿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세상에 무시할 수 없게 존재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것이다.
나는 이런 엘리트주의 혹은 엘리트 이론에 대해서는 여기서 크게 거론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너무도 터무니 없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논리나 근거로 믿기보다는 거의 100% 이기적인 이유로 믿거나 종교처럼 아무런 근거없이 믿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사실 엘리트 이론을 망가뜨리는 사례들은 요즘 날마다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방송에 나오는 대학교수나 어떤 전문가의 말을 들어보자. 그들은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힌 엘리트 이므로 일반인들의 지적인 수준을 상회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실은 우리는 종종 그 전문가들의 진정한 합리성수준은 그저 아주 평범하거나 평범이하라는 느낌을 받는다. 뭔가 자기만의 세상에 지나치게 빠졌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합리적인 판단의 규범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이 들지 않으며 오직 일관성없게 쌓아올린 짜투라기 지식들을 가지고 있고 그런 지식과 지위를 가진 결과 자신이 스스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보일 때가 많다. 심한 경우에는 단순히 확신에만 차서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보, 뭐든지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바보에 가까워보인다.
요즘 기자들에 대한 사회적 시각이 차가워지고 있다. 기자들은 적어도 스스로는 자신들이 이 사회의 엘리트층이라는 생각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신문방송의 기사들을 보거나 방송국피디들의 행동을 보면 의견의 차를 넘어서 어떤 엘리트를 자처할 수준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형편없는 정말 말도 안되는 기사를 쓰는 기자들은 헤아릴 수 없으며 요즘은 거의 트위터나 아고라 같은 인터넷매체를 통해 나오는 네티즌의 소식을 그대로 베껴쓰거나 유명 드라마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 같은 것을 기사라고 말하는 경우도 많다.
정치가들이며 재계의 실력자들은 어떤가. 우리는 그들이 빌게이츠나 스티브잡스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대화를 나눈다고 느끼는가? 그 의견에 찬동하냐 반대하냐를 떠나 사고의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 그렇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방송을 통해 보여지는 그들의 대화란 동네 복덕방에 모인 평범한 노인들의 대화보다 못해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자칭 사회적 지도층이 많다. 사회적 지도층이라는 말을 쓴다는 것자체가 실은 어느정도 엘리트 이론을 믿는다는 것인데 그런말을 많이 쓰는 사람일수록 엘리트하고는 거리가 많은 것같으며 정작 그나마 진짜 엘리트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겸허한 탓인지 그런 말을 쓰지 않는 것같다.
엘리트 이론이 옳은가 그른가를 흑백논리로 논해서 논박하거나 증명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부질없는 일이다. 그것은 과연 지도한다는 것이나 주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논하게 하며 이렇게 말의 정의를 따지다 보면 알 수없는 혼란의 장소로 우리를 이끌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극단적인 형태는 이젠 거의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곁에 강력하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논리나 관습에는 약화된 엘리트주의라고 할수 있는 것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지적하고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집단이기주의와 연약하게 얽혀서 존재하는데 그 기본적 주장은 이렇다.
숫자를 조절하지 않으면 인력의 질을 보장할수 없다.
이 논리에 따라 우리 주변에는 소수의 사람들을 뽑아서 매우 높은 물질적 명예적 보상을 하고 대개 일은 엄청 바쁘게 하는 집단들이 있다. 대개는 자격증을 가진 집단들인데 예를 들어 의사가 그렇고 교수가 그러하며 판사나 변호사 검사 같은 법관이 그렇고 선생님이 그러하다. 예전에는 무슨 신춘문예같은 문학상을 받아야 작가로 인정되는 등단 제도 같은 것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작가집단도 그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보기 바란다. 이들이 얼마나 바쁜지. 의사도 검사도 교수도 선생님도 판사도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 일이 힘에 겹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그러므로 더 많은 사회적 보상을 해달라고 하지 봉급이 줄어들고 사회적 희귀성이 줄어드는 한이 있어도 숫자를 확늘려서 일을 줄여달라고는 하지 않는다. 바쁘니까 인력을 두배로 늘리고 일을 절반으로 하고 봉급은 절반만 받겠다고는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여기서 다시 위의 주장이 등장한다. 숫자를 조절하지 않으면 인력의 질을 보장할수 없다. 다시 말해서 이건 상당부분 국민을 위한 것이다.
나는 이 주장이 무조건 틀렸다거나 또는 옳다는 말을 하지는 않겠다. 실제로는 경우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주장을 긍정적으로 수용했을 때 생길 수 있는 결과에 대해서만 몇가지 이야기하고 싶다. 숫자를 늘렸을 때 생겨나는 부작용이 정말 참을 수 없는것이라면 우리는 이 약화된 엘리트주의를 유지해야 할지도 모른다.
약화된 엘리트주의가 적용되는 직장을 편의상 엘리트직장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엘리트직장의 특징은 무척 인기가 좋다는 것이다. 외국에 비하면 처우가 좋은 것도 아니라는 둥, 어디보다는 형편없다는 둥, 일이 매우 힘들다는 둥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런 말은 한편으로 참 쓸데없는 말이다. 여기 아이스크림이 있다고 하자. 어떤 어린이가 이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나 싫어하나를 알고 싶다고 하자. 우리가 아이에게 이 아이스크림이 어때라고 물으면 그 아이는 이건 별로 크지 않다는 둥, 좀 녹은 것같다는 둥, 딸기시럽이 너무 많다는 둥 여러가지 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결정적 질문은 그럼 안 먹을래? 라고 묻는 것이다. 아이는 얼른 고개를 흔들고 아이스크림에 손을 내민다. 결국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던 것이다.
엘리트 직장은 어쨌건 인기가 좋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에게 너 이거할래 라고 하면 대개는 네 하고 싶어요라는 말을 듣는다. 외국의 교수나 교사, 의사나, 변호사등과 비교하거나 내가 다른거 하기 위해 이정도했으면 더 잘먹고 잘 살았을 거라는둥하는 소리는 다 쓸데없는 소리다. 어쨌건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줄을 섰다. 다른 직장도 그렇지만 선생님만 해도 그렇다. 요즘엔 서울대 연고대에서 석사까지 한 사람들이 선생님하려고 길게 줄을 서있다. 박사학위가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한국의 선생님의 처우가 좋은가 나쁜가를 다른 수치로 판단하는건 불필요하다. 인기가 증명해 준다.
문제는 인기가 좋으니까 점점 조건이 나빠진다는 것이다. 고용인들이나 이 직업에 종사하는 상사들은 이렇게 말할수 있다. 너 치사하고 힘들어? 그럼 그만둬. 다른 사람들이 줄서있어라고 말이다. 엘리트직장인들은 물론 그만둘 수가 없다. 대부분은 그만두면 다른거해서 그만큼의 만족도를 얻기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객관적 상황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그렇게 느끼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 아뭏튼 다 죽겠다고 치사하다고 하면서도 그만두질 못한다.
위아래도 열심히 따지는 권위주의도 금새 정착된다. 군대에서 졸병을 굴리면서 너도 참으면 병장될거라고 말하는 식의 관습이 정착된다. 어렵게 얻은 엘리트 직장을 포기하기 싫다는 약점을 잡혔기 때문에 위에서 무리한 주문을 해도 참고 견디는게 반복되고 반복이 되면 그게 문화가 되고 관습이 된다. 이 엘리트 직장의 계단에서 탈출할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결국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뭘 하게 만들까. 우리는 처음에 숫자를 조절하는 것은 인력의 질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논리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일련의 상황들은 그 엘리트 집단을 대다수 군중을 착취하는 시스템으로 변질시키기 쉽다. 왜냐면 그 엘리트들이 바라는 명예와 돈을 누가 주는가. 대다수 국민이? 그게 아니다. 소수의 기득권이 준다. 내 직업 평가를 국민이 해주나? 아니다. 내 직장상사가 해주고 그 직장상사는 다시 그 위에 충성을 해야 좋은 평가를 받으며 철밥통이 유지될 수 있다. 즉 숫자를 조절하는 시스템은 바깥을 보지 않고 소비자를 보지 않는 이기적이고 권위적인 조직으로 변하기 쉬운 것이다. 여기까지 이르고나면 애초에 처음에 시작했던 인력의 질이라는 말이 매우 무색해진다. 뭐를 위한 인력의 질인가. 이미 국민에게 봉사하지 않는 집단이 되었는데.
이런 경우 누군가 매우 높은 사람이 나타나서 나에게 충성하지 말고 국민에게 봉사하세요라고 말해도 이미 말을 들어먹질 않는다. 미쳤나. 내가 여태까지 줄선게 얼만데. 병장되면 신처럼 산다고 박박 기어서 계급이 좀 올랐는데 이 시스템을 엎어버리자고? 이렇게 되기 쉽다. 왠지 사법개혁을 하려고 하던 노무현대통령이 그 검사들에게 당하던 일이 생각나지 않는가?
오해는 없기 바란다. 모든 엘리트 직장에서 이런일이 100%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던져진 쇠구슬이 아니라 인간이니까. 각자의 자유의지를 가진 판단에 의해 이러한 점을 극복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극복할 수도 있다는 것은 질 수도 있다는 것이고 어떤 엘리트직장이 이미 국민에게 봉사하지 않는 이익집단으로 자본과 권력과 명예에만 봉사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각자 판단해야 할 일일 것이다.
나는 때로는 그래서 어떤 직업군이 위기를 겪고 인기가 전혀 없어지는 때가 있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모든 조건이 열악할 때는 정말 그걸 하고 싶어하는 사람만, 정말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며, 이건 더이상 직업도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그걸 하고 싶어서 어쩔 수가 없다는 사람만 그 일을 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가 않을 때 또 칸막이를 치고 방어막을 치고 권위주의가 설치고 본래의 순수한 의도는 없어지고 관습이 넘쳐나고 하는 일이 자꾸 벌어지니까 말이다.
미국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식당의 웨이터나 웨이트레스는 다 작가 지망생이라고. 미국에는 대단한 학자도 많지만 그저 보통의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즉 대단한 업적을 내지는 않지만 연구생활을 근근이 이어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도 그들이 모두 적당히 살 수 있을 정도의 환경을 가진 나라가 미국이다. 전부 노벨상수상자급만 있는게 아니다. 그러니까 학문을 좋아하면 회사취직 안하고 학계에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글을 쓰고 싶으면 그럭저럭 작가지망생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가 보면 그 중에는 후일 천재로 불릴만한 사람도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엘리트주의가 없기 때문이다. 즉 일찌감치, 너는 수준이 안되니까 완전포기하라고 길을 막아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은 다르다. 똑같아 질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쓴 것이 어느 직업군에서 얼마나 심하게 진행되고 있는지, 선진국이란게 뭔지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는 시간은 필요하지 않을까? 한국에는 자칭 엘리트라고 생각하는 집단이 엄청나게 많다. 우리는 선택된 엘리트집단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투성이다. 다 자신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다들 이렇게 저렇게 선을 그어서 우리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그건 그만큼 위에서 말한 엘리트주의가 망해가는 과정을 따라갈 집단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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