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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사회적 성공과 자기지키기

by 격암(강국진) 2011. 6. 2.

2011.6.2

 

인간관계가 사회생활에서 중요하다는 말이 참 많다. 사실 살아보면 사람을 안다는 것이 곧 힘인 경우가 많다. 사람이 원숭이보다 잘사는 이유는 한 개체를 볼 때 사람이 원숭이보다 타고난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다. 원숭이 무리 속에서 길러진 인간이 타잔처럼 동물의 왕이 될거라는 생각은 인간의 자기 미화에 불과하다. 인간은 혼자일 때 원숭이 보다 생존능력이 훨씬 떨어진다. 인간의 힘은 대부분 인간끼리 협동하는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간은 의사소통을 하는 능력을 발달시키고 문명을 축적시킬 기술도 발전시켜서 다른 동물들과는 비할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어느정도까지 그렇다. 조직되고 협동하는 집단앞에서 개인의 힘이란 참으로 미약하다. 이것이 인맥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개인 사이의 차이이다. 

 

하지만 인맥과 개인의 능력은 닭과 달걀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인맥이 능력이지만 능력이 인맥이기도 한 것이다. 능력이 없다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자기 인맥속에 끼워주지 않는다. 그 네트웍에서 도움을 받기만 할 뿐 다시 그 도움을 돌려 보낼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충분한 능력을 가진다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인맥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투자를 하려고 하며 어떤때는 댓가를 돌려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기꺼이 호의를 베푼다.

 

이렇게 해서 능력이 있는 사람의 능력은 마치 인기 좋은 회사의 주식처럼 인맥의 성장과 함께 마구 성장하고 그 반대라는 이야기가 돌면 인맥과 능력이 떨어져 나간다. 좋은 집안의 자식이 실제로도 능력자가 되기 쉬운 이유는 능력에 대한 보장때문이고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은 이유는 그 유명세가 사람들에게 믿음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한때 사기로 체포당했던 사람이라도 유명하기만 하면 그 사람은 뭔가 능력이 있을거라고 믿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그 사기꾼에게 정말 다시 능력을 준다. 

 

세상에서 한번 대단하신 분이라는 인정을 받으면 이젠 그 개인의 능력이상으로 네트웍자체가 그 사람의 능력이 된다. 아는 사람이 많으니 이쪽을 저쪽에 연결시켜주는 것만으로 많은 일을 처리할 수가 있다. 아는 의사가 있다던가, 가수가 있다던가, 피디가 있다던가, 교수가 있다던가, 정치가가 있다던가 하는 식으로 연결하는 힘이 그 자체로 힘이 되는 것이다. 유명집안의 자식이 가지는 능력이란 개인의 능력이상으로 이런 능력이다. 

 

이러한 것들은 어느정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한국문화는 유독 개인적 접촉을 중요하게 여기고 가족윤리를 사회로 확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인맥이 성장하는 일이나 개인으로서의 자기를 지키는 일을 유독 조심스럽고 복잡한 일로 만든다. 한국 사람들은 서로간에 적당한 거리를 지키지 못하거나 고의적으로 그러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 중에는 오늘 처음 만나서 밥먹는데 형이라고 불러도 되겠냐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좀 오래 알고 지내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참많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걸 미덕쯤으로 알것이다. 친하게 지내는게 좋지 않은가 하는 식으로. 

 

하지만 이런 문화속에서 검찰이나 회사나 청와대가 팔이 안으로 굽는 행위를 한다고 비난할수 있을까?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아버지를 숨겨야 하는가 아버지를 처벌받게 해야 하는가. 답이 뭐건 간에 이 질문은 적어도 심각한 윤리적 갈등을 발생시킨다. 이것이 가족이다. 그런데 한국은 너무도 쉽게 가족윤리를 확대한다. 다 아버지고 형이고 아들이고 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잘난 사람들은 아무래도 인맥을 맺기 쉽다. 그 잘나고 성공한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금방 금방 형동생하면서 지내면 거기 어디에 양심이 있을 곳이 있고 공공의 윤리가 있을 곳이 있겠는가. 그런데 한국은 그렇다. 

 

수천명의 사람들과 가족처럼 지내면서도 선을 넘지 않고 잘 처신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가르켜 사람이 원만하다고 말하고 칭찬할지 모른다. 그나 그녀는 그 집단의 지도자적인 인물로 존경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사회적 이득보다는 사회적 악을 실현하기 쉽다. 왜냐면 그가 전세계 사람 모두를, 한국 사람 모두를 알고 지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 관계와 공공의 선을 공존시키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내가 이스라엘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 차를 고치러 자동차 수리소에 갔는데 처음에는 턱도 없는 가격을 불렀다. 그런데 나를 거기로 보낸 교수의 이름을 말하자 가격이 몇분의 일로 줄어든다. 그렇다면 그들은 사기를 치는 사기꾼인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친구들을 돕고 사는 좋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말할 것이다. 본래 나에게 불렀던 가격이 정가인데 아는 사람에게는 크게 할인을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인맥이 없는 이방인이라면 혹은 유태인들과는 별로 인맥이 없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면 가격이 크게 달라진다. 이럴 때 이게 사기나 차별이냐 아니냐는 보기 나름의 문제다. 

 

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친절함에는 역설이 있다. 내가 내 주변사람에게 친절한 것은 거꾸로 보면 내가 알지 못하고 나와 연결될 수 없는 사람들을 차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 주변을 무시하고 온 세상만 생각하며 살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이 문제가 특히 심각해 지는 것이 바로 잘난사람들이 서로서로 형동생하면서 사회를 지배하는 독과점을 형성하는 때이다. 그렇게 되면 그 좋은 인맥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차별을 행하고 죄를 짓는다는 느낌을 전혀 가지지 않으면서도 커다란 사회악을 행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는 무수히 많은 죄없는 사람들의 피땀을 쭉쭉 빨아 자기들끼리 잘먹고 잘사는데도 그들은 그저 서로가 참 좋은,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자기들끼리는 뭐든지 쉽고 자기들끼리는 서로를 고마워 한다. 

 

정도의 문제일 뿐 대단한 사회적 명사가 아니라도 이 문제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예를 들어 한국인과 르완다 사람을 생각해 보자. 사회적 폭력에 찌든 르완다 여자중에는 나도 한국에서 한국 여자들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똑같은 일을 해도 봉급은 적고 미래는 암담하니까. 그녀와 한국인여자와의 차이는 뭔가. 결국 인맥이다. 한국인들은 한국사회라는 인맥시스템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살기때문에 르완다여자보다 쉽게 사는 것이다.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훨씬 저렴한 월급을 받고 일을 한다. 그 이득은 미국이나 일본은 물론 한국의 소비자도 누린다. 그 차이는 뭔가. 결국 인맥이다. 잘난 사람들은 사회안에 또다른 사회를 만든다. 그래서 그안에서 더 쉽게 산다. 다른 한국사람들이 뼈빠지게 일할때 어려운 일을 쉽게 해결한다. 우리가 인도네시아 소녀가 힘들게 만든 싸구려 장난감을 턱도 없는 푼돈으로 사면서 인도네시아 소녀를 알지 못하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듯 잘나가는 인맥사회속의 사람들은 가난한 한국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고 아예 그들의 존재를 느끼지도 못하기 쉽다. 

 

여기서 법은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걸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하고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다. 합법이라고 해도 윤리적으로 깨끗하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법도 인간이 만든 것이다. 나라 법에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난 죄없는 아이를 차별하라고 되어 있다고 해서 우리 마음이 100퍼센트 개운해 질 수 없는 것은 이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법 이상의 문제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선택에 대한 고민이다. 

 

인맥은 힘이지만 동시에 나를 잃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거대한 시스템의 부속품일 때 내가 그 시스템의 힘을 소유한 것일까 아니면 그 시스템이 나를 소유한 것일까? 인맥을 가진다는 것은 이런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인맥을 가진 사회 안에서 자기를 지키기 힘들다. 우리가 인맥을 가지고, 우리가 물질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인맥이 우리를 소유하고 물질이 우리를 소유하게 된다. 남들은 우리를 부러워할지 모르나 결국은 남의 심부름꾼으로 분주하기만 할뿐이다. 자기를 지키지 못한다면 결국은 껍데기만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한국사회는 워낙에 사람을 쉽게 껍데기만 남긴다. 성공하면 할수록 자기가 없어지기 쉽다. 한국에서 성공했다는 것은 룸싸롱가서 비싼 창녀와 자고 백화점에서 점원에게 갑질을 하며 남들은 다 지키는 법률을 무시할수 있고 사람들이 굽신 굽신 거린다는 것이다. 이 말에 충격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요즘은 그렇지 않다거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어느 정도의 진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종종 자기가 그런걸 안좋아해도 그런걸한다. 그게 성공의 증표니까 그렇다. 분위기가 그러니까 그렇다. 자기가 없어진 대신 보상으로 받는게 그런 것이다.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이해가 안가는 것을 참고 견딘 후 받는 보상이 그런 것이다. 곰곰히 생각하면 내 양심에 반대되는 나쁜 일을 하고 망가진 그 양심을 마취시키기 위해 하는 일이 그런 것이다. 그게 정말 행복한 삶일까?

 

극단적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사람은 고독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를 잃어버릴 만큼 성공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자신을 있게 해준 많은 것들에 대해 감사함을 잊지 말아야 하지만 사람은 고독해야 한다. 불필요한 능력은 숨기거나 아예 없는게 좋다. 먹고 살만한데 복권맞아서 재산이 생기면 싸움만 난다.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 지면 가정이 파탄나고 심지어는 죽는수도 있다. 자기가 그 유명세와 재산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훌룡한 사람은 대개 고독하다. 친구가 천명 만명이 있어도 고독하다. 자기를 지키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오늘의 모습이 내일과 같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어차피 그런 사람의 사는 모양은 거울에 비친 그림자 같은 것으로 입장이 달라지면 말과 행동이 전혀달라진다. 그리고 거기에 취하면 언제 자기가 어떤 모습이었던가 하는 기억도 없어진다.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났다. 이 둘은 서로 한마디도 없이 앉았다가 30분쯤후 일어나면서 오늘즐거웠습니다하고 말하고 헤어진다. 남들이 보기엔 황당하지만 어쩌면 자기를 지키는 사람들의 진정한 사귐이란 이런 것인지 모른다. 시끄럽게 떠든다고 뭐가 더 좋기만 한것은 아니다. 물론 조용하다고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다. 인연대로 만나는 것이다. 

 

한국만큼 인간관계 많이 따지는 곳도 별로 없다. 많은 사람들이 형동생하면서 인간관계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우정을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렇게 아름답지 만은 않은 것같다. 아름다운 인간관계란 평생 한번도 보지 못하고서도 서로 존경하는 그런 관계고 그러면서도 일부러 서로를 찾지 않는 그런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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