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5.26
최근에 제가 쓴 문장중에 제 맘에 드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결국 공포감은 분리된 이질감에서 오고 사랑은 연결되어진 동질감에서 올 뿐 둘 다 불확실성에 관한 것이다.
이런 문장을 쓰고 나자 제게 질문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과연 미움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알게 되면 그것을 극복할 힘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미움이란 뭔가하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움이란 뭘까요. 곰곰히 생각해 보니 미움이란 결국 하나의 이론,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이데올로기는 이렇습니다. 우리의 고통은 뭐뭐뭐라는 어떤 이유 때문에 생긴다. 그것을 없애면 우리의 고통, 나의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이런 이론이 우리 마음속에 있을 때 우리는 그 뭐뭐뭐를 미뭐하게 됩니다. 그 뭐뭐뭐를 제거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며 그렇게 하기 어려울 때 더더욱 뭐뭐뭐를 미워합니다. 그러나 모든 이데올로기는 오직 설사 그것이 틀리지 않더라도 제한되게만 옳다는 것, 즉 궁극적으로 모든 이데올로기는 틀렸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도움이 됩니다. 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혼신의 힘을 다한다고 해도 언제나 우리에게 고통과 어려움은 남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이론은 이것은 여전히 사라지고 있지 않은 그 뭐뭐뭐가 문제라고 말해줍니다. 비록 그것이 낡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대개 우리의 이론이나 이데올로기를 다시 검증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돈이 없어서 비참해 본 사람은 비참할 때마다 이것은 돈이 없기에 생기는 일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겁니다. 돈이 있는데도 비참하다면 돈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아니 비참하다는 것은 돈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의 사고 안에서 돈과 비참함은 이제 원인과 결과로 너무나 확실하게 얽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미워하는 행위가 우리를 소진 시킵니다. 우리는 더더욱 부정확한 이데올로기의 골수 신자가 되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그 미움에 불사릅니다. 이쯤 되면 우리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존재해야 할 이데올로기가 오히려 고통의 원인이 되고 맙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봅시다. 노동자의 고통은 자본가의 착취때문에 생기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 이론은 어떤 사회적 환경에서, 어떤 문맥에서는 더많이 옳고 어떤 환경과 문맥에서는 거의 옳지 않습니다. 19세기처럼 공장주와 노동자가 잘 구분되는 시대에는 노동자 자본가 구분이 더 쉽고 21세기처럼 자영자가 많이 생기고 주식시장과 전자통신을 통한 분업이 거대해져서 국경선을 넘어서까지 펼쳐진 사회에서는 사실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구분은 애매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자본가를 타도하자라는 구호에만 몰입하고 그걸 위해 모든 것을 다바치고 개인적 희생을 무릅쓴다고 할 때 우리는 위에서 말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첫째로 고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둘째로 자본가에 대한 미움은 더 깊어갑니다.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본의 폐해가 깊어진다는 것의 증거로 여겨집니다.
다른예로 한국 시민들의 고통은 한나라당때문이라던가 이명박때문 혹은 조중동때문이라는 이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이론이 어느정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사회의 현실을 만들어 내는데 크게 기여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정당이며 대통령의 권력으로 많은 것을 밀어부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열심히 지원한 언론들이기 때문입니다. 경쟁만능주의 사회를 만들고, 부동산 거품을 만들고, 파괴된 환경을 만들어 낸 사람들은 한나라당이며 이명박이고 조중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이론은 한계가 있습니다. 또한 설명과 이해는 본래 층층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고통이 한나라당때문이라던가 이명박때문이라는 생각에 불타오르면 그들에 대한 미움이 극에 달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제거하는것이 모든 것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하게 되기 쉽죠. 그렇게 하는 가운데 단지 반한나라당이라거나 이명박을 욕하기만 하면 좋은 사람, 좋은 정당이라고 생각해서 이용당하는 사례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사회의 현실은 궁극적으로는 한국 시민들전체의 책임이며 한국 시민들 전체의 의식수준에 딸려있다는 것을 망각하게 됩니다. 대통령하나 갈면 천국올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미움이 모든 것을 불태울때 현실론운운 하면서 승리 제일주의가 등장하고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하기 시작합니다. 한나라당이 싫은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정당의 많은 정치인 예를 들어 민주당의 인사들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흑백으로 한나라당이면 나쁜 인간, 민주당이면 천사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틀렸다 맞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한계를 가진 이론이라는 점을 잊고 미움이 우리를 전부 불태우게 만들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를 들어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극적으로 대선에 이겼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천국이 오질 않습니다. 그럼 사람들은 이 모든게 대통령때문이라고 다시 생각합니다. 자기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알고보니 전에 우리가 미워하던 사람과 차이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속았다고 합니다. 자기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자기손으로 죽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사회적인 것이지만 개인적인 수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이 부모님때문이라던가 지도교수때문이라던가 직장상사때문이라던가 어떤 친구때문이라던가하는 이론을 가질수 있습니다. 그 이론은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론은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게 만들겠지요. 그러나 결코 절대적으로 옳은 100% 옳은 이론이란 없습니다.
심지어 누군가가 나를 칼로 찔러죽여도 우리는 이론에 따라 그 사람을 안 미워할수도 있습니다. 알고보면 그사람은 어떤 강압에 의해 그렇게 했을뿐이며 그런 의미에서 피해자라고 생각해서 불쌍하게 생각할수도 있는 것입니다.
살인범이나 강간범은 모두 처벌받아야 합니다. 그게 법이고 관례이며 살인범이나 강간범은 분명 나쁜 놈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없애야 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분위기, 구조가 살인범과 강간범을 길러낸다는 사실에 까지 생각을 미치지 않고 단순히 살인범, 강간법을 크게 처벌하고 욕하는 것에만 즉 그들을 미워하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거기에는 분명 상황을 좋아지게 만드는데 있어서 한계가 존재할 것입니다.
미움이 가슴속을 채울때 우리는 쉽사리 우리가 느끼는감정을 억누르고 이건 근거없는 것이라고만 할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쁜 놈은 나쁜놈이죠. 그러나 단지 이것은 이론에 대한 것이라는 점도 잊지는 말아야 할것입니다. 미움이 우리를 모두 불살라버리지 않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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