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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답은 네안에 있다라는 말의 의미

by 격암(강국진) 2011. 5. 10.

2011.5.10

 

오늘은 내가 항상하던 말을 정리해 볼까 한다. 그것은 답은 네 안에 있다라는 말이 뭘 의미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나는 이것은 작은 세계에 갇혀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된 것과 큰 연관이 있다고 여긴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물었다고 하자. 자동차를 타는게 좋습니까 안타는게 좋습니까. 자동차를 많이 타면 매연도 나오고 몸에도 안 좋다. 가까운 거리를 자꾸 차를 타게 되니까 다리가 약해진다. 이렇게 말하자 이 사람이 그러니까 자동차를 타는게 안 좋다는 이야기군요라고 말하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어가고 응급환자가 생겨도 업고 가며 몸이 너무 안 좋아서 걷는게 몸에 안 좋은 상황에서도 걷는다. 아니 이건 아니지 싶어서 아니 차도 필요하면 타야지 했더니 이번에는 10미터만 가는것도 차를 탄다. 차를 타기도 안 타기도 해야지 했더니 월요일엔 타고 화요일엔 안 타는 식으로 무조건 하루걸러 하루 탄다. 이쯤 되면 뭐라 할 말이 없어진다. 

 

우리는 이렇게 바보가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아니다. 우리는 대부분 혹은 전부가 이런 바보다. 아이를 학원에 보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이야기를 해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돈이 좋은 겁니까 나쁜 겁니까 하는 질문에 대해 이야기를 해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우리는 다문화주의를 실천해야 합니까 라던가 우리는 자유개방시장이라는 목표를 이야기해야 합니까 라던가 지역의 문화나 가게를 살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에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답을 아는 사람도 드물고 설혹 답을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소통이 안되니 세상은 시끄럽기만 하다. 우리가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운다고 하자. 나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분명 자전거에 대한 이런 저런 일반적인 이야기를 해줄 수 있으며 그것은 소중한 지식이 될것이다. 그러나 자전거는 같은 길을 나란히 달린다고 해도 옆에서 나에게 자전거타는 법을 가르쳐 주는 사람의 핸들조작을 그대로 따라한다고 탈 수 있게 되는게 아니다. 

 

똑같이 핸들조작을 해도 그 사람은 잘나가는데 나는 넘어진다. 오히려 똑같이 하려고 남의 자전거에 신경을 많이 쓰면 쓸수록 자기 자전거는 넘어질 것이다. 엉터리 강사는 자전거 타는 사람옆에서 계속 이래라 저래라 너무 많은 말을 하지만 때로는 그 말들에 신경쓰면 쓸수록 점점 더 자전거를 탈 수 없게 된다. 

 

자전거는 기본적으로 노면의 상태, 자전거의 균형, 내 몸의 힘의 분배에 대한 스스로의 감각을 기반으로 해서 타는 것이다. 일반적 지식도 모르면 안되지만 답은 네 안에 있다. 아이를 학원에 보내야 하는가 아닌가. 아이와 대화하라. 자신과 아이와 가정을 둘러싼 환경을 느끼려고 하라. 답은 당신들의 속에 있다. 대형마트가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하는가 아닌가. 지역민들에 대해 생각하고 서로 이야기해보라. 그게 뭘 의미하는지, 뭘 얻고 뭘 잃게 되는지 생각하라. 답은 당신들의 속에 있다. 

 

물론 답은 내안에 있다라는 말하나로 뭐가 되지는 않는다. 왜냐면 우리 안에 이미 우리가 아닌게 너무 많이 들어와 있어서 그렇다. 단순히 그럼 뭐 내맘대로 하지 라는 생각을 하는게 실은 어떤 다른 때보다 남의 생각대로 하는 것일 수 있다. 정말 내맘대로 하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께고 좁아진 시야를 넓여야 한다. 장님이 아 좀더 소리를 잘 들어야 하지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눈을 떠야 한다는 상황이랄까.

 

세계가 좁은 사람이 어떤 건가를 알고 싶으면 어린애를 생각해 보면 된다. 경험많은 어른의 눈에 어린애는 작은 것에 몰두해서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고 결과적으로는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일이 많다. 그들의 세계가 좁기 때문이다. 어린애와의 대화는 맨처음에 말한 자동차타기에 대한 대화를 연상시킨다. 제 아무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줘도 아이는 길을 벗어나 산으로 간다. 세계가 너무 좁기 때문이다.

 

그런 어린애를 웃기게 생각하는 어른들은 자신의 등뒤를 살펴야 한다. 지금 자기가 있는 세계는 넓은 세계라고 확신하는가? 어른은 어떤 때는 아이보다 더 나쁘다. 온갖 교육과정을 통해 남의 시각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정확히 다른 사람을 자기가 원하는대로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런 시스템에게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자기 머리안에 가득있는 확실한 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자기 선택이란 자기 선택이 아니다. 

 

궁극의 상태는 나는 모른다. 그런 건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합리적이란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그런 고민을 통해 조금씩 세계를 넓혀나가고 자유를 획득했을 때 우리의 내부에는 조금씩 살아나는게 있다는 나는 믿는다. 어느날 문득 이제까지 신경쓰지 않았던 아내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던가, 오랜동안 틀지 않았던 재즈음악을 틀어 봤다던가, 문득 책 한권을 샀다던가, 문득 여행을 결심한다던가, 그러면서 내부에서 어떤 감각이 살아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럴때 자기 직장일을 생각하고 아이 교육을 생각하고 가정의 일이며 사회의 일을 담담히 떠올려보면 문득 답이 이미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런 저런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 전투중에 위험한 길을 나서야 한다고 하자. 한사람이 끝없이 이건 할 수밖에 없다, 우린 잘할 수있을 것이다, 왜 이건 해야만 하는가를 떠들고 있다. 언뜻 생각하면 그렇게 떠들고 있는 사람이 확신을 가진 것같지만 진짜 확신은 그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음을 결정한 사람이다. 답은 마음속에 있고 마음에서 이미하기로 했는데 그걸 합리화한다고 떠들 필요가 없다. 

 

이 세상이 이래야 하는가 저래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물론 우린 대화를 나누고 여러가지 주장도 하고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고 심지어 핵심도 아니다. 우리 내부에서 우리 마음에서 그래 세상은 이래야해 라고 이미 납득이 갔다면 말이란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남의 나라 이야기를 하는것도 그렇다. 남의 나라 이야기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남의 자전거 타는거보고 핸들조작하는 일과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자신의 균형감각은 도외시하고 남의 자전거만 흉내내면 자전거는 더빨리 넘어진다. 답은 우리안에 있다는 말을 폐쇄적 민족주의로 받아들여도 곤란하지만 자기를 무시하고 남의 이야기로 혼란을 더 키워서 좋은게 없다. 자유도 잘 모르겠는데 프리덤이 뭔가를 이야기하다가 남의 나라 역사며 문화며 사회환경 전부 다 배워야 하는 것같은 상황으로 만들어서는 도움보다 방해만 된다. 

 

답은 우리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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