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9
나는 일반론에 근거해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옳다고 생각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내 앞에 있다면 우리는 응당 선입견없이 그 사람을 보는 것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농구선수는 평균키가 크다던가 여배우들은 대개 예쁘다던가 하는 특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직업적 혹은 환경적 특징을 생각해보면 하나의 역설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환경적으로 그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을 혼동하는 데에서 생기는 역설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생명을 다루는 의사는 사람의 생명을 보통 사람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다는 기대치를 가진다. 그래서 의학드라마에 보면 자기가 치료하던 환자가 죽을때 매우 괴로워하는 의사를 흔히 보게 된다. 그러나 현실을 생각해 보자. 과연 우리가 하루에 수백명의 환자를 보고 병원가득히 환자들이 있는 상황에서 한명 한명의 환자가 가지는 아픔과 죽음의 상실에 괴로워한다면 의사라는 직업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이것은 마치 평상시에 가장 매운것을 많이 먹는 사람이 매운 맛에 가장 민감할거라고 예측하는 것과 같다. 그사람이 살려면 그사람은 매운맛에 둔감해야 한다. 그래도 워낙 매운 것을 많이 먹기때문에 매운맛때문에 고생스러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의사라는 직업에 있는 사람도 되도록 빨리 환자와 감정적 거리를 두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의사라는 직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느끼는 감수성의 강렬함은 오히려 많은 의사들보다 일반인들이 더 강하지 않을까?
시골사람들이 보통 도시사람들에게 깍쟁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그것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작은 마을에서 모두 친인척이자 친구로 작은 그룹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달리 수천명이 모여살면서 직장에서 역시 수없는 사람을 만나는 도시사람은 뭔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헤푸게 베풀다가는 남아나는게 없다. 그래서 사람이 많은 곳에서 사는 도시사람은 그만큼 독점적 소유의 영역 문제를 심각하게 느끼지 않을까? 그래서 시골사람이 보기에 도시사람은 깍쟁이 처럼 보이는 것이 아닐까.
선생님도 그렇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인자하다. 자식처럼 키운다. 그러나 수백명씩을 매년 새로 자식으로 들여서 자식처럼 생각하면서 키운다는 것이 가능할까. 어린 아이들이 자기가 뭘하는지도 모르고 선생님에게 손을 내밀 때 거기에다가 아무 생각없이 자기를 던지면 뼈도 안 남는거 아닐까. 결국 선생님이 제일 먼저 배워야 하는 요령은 학생과 선생사이에 선을 그어서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잘 지키는 법이 아닐까.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잘 지킨다는 것은 분명 남에게 민폐를 끼친다거나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그것은 나쁘게 말하면 표현만 번지르르할뿐 실제적으로는 책임질 일은 아무것도 안하는 정치가나 공무원의 태도와 일맥상통하는데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도 비슷하다. 어떻게 말하면 진정으로 경계없이 아이와 가까워 질수 있는 것은 자상할 것이 예상되는 선생님이 아니라 평상시에 그런 부담에서 멀리있는 그냥 일반인일 수 있다.
우리는 경찰이나 법조계에서 일하는 판사나 검사나 변호사가 가장 정의감에 투철할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그런 경찰이나 법조계인물이 있다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들이 늘상 접하고 상대하는 사람은 범죄자들이다. 우리의 행동은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기대에 큰 영향을 받는다. 늘상 거짓말만 하는 사람을 만나던 사람은 인간은 본래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쉽게 믿지 않을까. 늘상 범죄자만 만나는 사람은 이런저런 죄들은 실상 그다지 대단할게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살인범만 보던 사람이 무단횡단같은 것을 죄라고 생각이나 할까?
기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은 부자일까 가난뱅이일까. 가난뱅이는 남에게 뭘 줄 때 마구 주기때문에 가난뱅이고 부자는 안 그러기 때문에 부자가 아닐까. 고급 승용차에 비싼 집에 사는 사람은 작은 돈을 줘버리는 것에 개의치 않을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항상 옳을까?
이런 예들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문제는 경찰은 단지 경찰이 아니고 선생님은 단지 선생님이 아니며 의사는 단지 의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얼마전에 여검사와 결혼한 남자가 마치 취조하듯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아내에게 매우 기분이 나빴다라고 말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선생님이나 국회의원은 과연 좋은 엄마이며 좋은 며느리일까. 직장에서 배운 습관에 따라 거기서도 역시 번지르르하게 말만하고 자기는 빠져나가는 일을 잘하는, 남에게 손해는 끼치지 않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손해는 안보는, 그런 사람이지는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따금씩은 손해보는 일을 개의치 않는 보통사람과 관계를 유지할 때 항상 손해는 한쪽만 보게 될것이다.
하지만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특정한 직업군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자고 말하는 것이 이 글의 결론은 아니다. 내 결론은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소모되는 것에 대해 훨씬 더 민감한 태도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뭔가를 열심히 이루려고 할 때, 큰 기계장치속의 하나의 부품처럼 자신의 직분을 다하려고 할 때 자신은 소모되고 말기 쉽다. 그러다보면 우리는 본래의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의 장소에 있을 수 있다. 사랑한다고 했던 대상을 오히려 누구보다 미워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때는 심재라는 말을 기억해야 하는것 아닐까. 심재는 자기을 잊고 할 수 있는 것을 한다는 태도다. 뭔가를 안하는 것도 아니고 뭔가를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남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시민단체에 들어서 열심히 일하겠다는 야망을 불태운다고 하자. 이런 남자는 대개 가난한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경멸하는 것으로 끝나기 쉽다. 자기가 지켜지지 않으면 남에게 뭔가를 과다하게 기대하게 되고 결국은 본래의 뜻과는 거꾸로 미움이 되기 쉽다. 남을 돕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를 돕고 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를 구하려고 해야 할지 모른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때만 우리는 소모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세상을 구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먼저 그 생각부터 버리고 즐겁게 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세상을 구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없을 때 그사람은 비로소 세상을 구할 능력이 생기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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