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세상보기

경쟁같은거 때려치우면 안될까.

by 격암(강국진) 2011. 9. 22.

이 세상에는 절대적의미에서 나쁜 일이란 없거나 말하기 힘들다. 새옹지마다. 예방주사란 병을 가볍게 앓게해서 그 병을 이겨내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이런의미에서 모든 나쁜 일이란 그것이 그 사람을 완전히 죽이는 일이 아니라면 결국 어떤 경험을 남긴다. 그 경험이 나중에 그 사람을 살릴지도 모른다. 


이런 애매함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말해보자면 이런 생각이 든다. 경쟁따위 참 우스운거 아닐까. 칼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기원 혹은 오늘날의 세계의 경제적 기원을 영국의 구호법 스피넘랜드법에서 찾는다. 그 구호법은 당시 암울했던 영국사회를 만들어 냈다 (라고 믿어지고 있었다). 스피넘랜드법은 국민 대다수에게 평등을 강요한다. 다시 말해서 얼마나 열심히 일하건 어떻게 현명하게 일하건 평민은 모두 같은 보상을 받는 사회였던 것이다.  경제학의 시조였던 사람들에게 이건 만악의 근원이었다. 인구론에서 빈민은 도와줘봐야 숫자가 늘어서 결국 굶주릴수 밖에 없다고 냉혹하게 말하는것같은  멜서스는 이런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즉 경제적 원조와 무차별이 사회악이 되는것같은 시대였다. 


그 이후의 자본주의 발전은 한마디로 인간은 욕망을 추구하며 추구하게 해줘야 나태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 세상에 적용하는 역사라고 할수 있다. 바로 자유주의다. 자유가 이 세상에 진보와 올바른 균형을 가져온다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칼 폴라니는 자유시장의 이상은 가짜라고 말한다. 그 출발점을 생각해 보면 오늘날의 경제시스템은 어쩌면 되도록 사람들을 차별하면 할수록 좋다라는 이상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똑같이 대해주면 의욕을 잃을 것이니까. 돈이든 명예든 일한것에는 보상을 주자라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자유시장이니 자본주의니 하는 거대한 것을 제쳐두고 다시 개인으로 돌아와 보자. 확실히 일한 것에는 보상을 주자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게을러진다라는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우리가 모든 월급을 철폐한 사회를 생각해 보자. 모두가 100% 공짜인 시대다. 심지어 공산주의에서 강조하는것처럼 노동의 신성함도 말해지지 않는다. 방에 앉아서 잡담이나 하고 게임이나 하면서 평생보내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고 내버려 두는 사회다. 


우리는 게을러지고, 점점 둔감해지지 않을까. 일부 돈많은 상류계층의 자식들이 쾌락에 빠져들듯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욕망이나 쾌락이란 현실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환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억지로 그런 것이라도 불러일으켜야 살아갈수 있는것 아닐까. 


그러나 다시 경쟁하고 보상받는 사회로 돌아오면 유명한 게를 잡는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한 사람이 게를 잡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는데 그가 잡은 게가 뚜껑이 없는 바구니에 담겨져 있었다. 그는 물었다. 이 게들이 바구니 바깥으로 탈출하지 않냐고. 그가 받은 대답은 이랬다. 게들은 서로를 잡아당겨 떨어뜨리기 때문에 여러마리 게가 있으면 아무도 그 바구니를 탈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반향을 일으키는 이유는 물론 우리의 현실이 이와같기 때문이다. 적어도 사회경험이 좀 있다는 사람은 그걸 느낄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일이란 경쟁에 이기는 일이다. 그런데 그 경쟁은 그가 하고 있는 일의 본질에서 정말로 도움이 되는 것인지 확실치 않을때가 많다. 건강한 비판이나 지적이야 물론 그러하겠지만 이런 말들은 위에서 말한 자본주의 사회의 출발점과 모순된다. 인간이 쾌락이나 보상을 위해 일하는 존재라면 그 일이란 반드시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 아니다. 


당신이 논문을 하나 쓴다고 하자. 그런데 누군가 다른 그룹에서 비슷한 연구주제를 놓고 일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결과를 내는것이상으로 상대편의 결과가 늦게 나오게 만드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쪽도 마찬가지다. 물론 달리기처럼 간단한 상황이라면 그렇게 하기 힘들지만 논쟁이란걸 해본 사람은 현실이 그것보다 복잡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항상 지엽적인 것이 등장하고 논점이 불확실하게 흘러가고 감정이 등장하기 쉽고 그래서 현실은 진흙탕이 되어서 출구가 없어보이게 되는 일이 많다. 바로 잡아당기는 게다. 


어느 직장이나 그렇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힘이 경쟁을 이기는데에 들어간다. 만약 이 세상에 그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밖에 없다면 그 일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영화를 만들어도 천문학적인 돈이 선전에 들어간다. 이기기위해 유명배우를 쓴다. 그 경쟁이 몸값을 올린다. 결국 배보다 배꼽이 훨씬 더 커보이는 게 현실이다. 


전국에는 모든 사람들이 들어가 살수 있을 만큼의 집이 이미 있다. 집을 짓는 건축비는 그 자체만 보면 집값처럼 천문학적이지 않다. 그런데 경쟁이 여러가지 것들의 값을 올린다. 오르고 올라서 결국 사람들은 누울자리만큼의 땅을 사는것도 힘든 시대가 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이런 생각끝에 나올수 있는 답중의 하나는 물론 적절한 수준의 경쟁이라는 애매한 결론이다. 다르게 나올수 있는 것은 결국 경쟁이란 창의성의 부족이라는 것이다. 경쟁이 있다는 것은 나아니라도 그걸 누가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어떤 일이 개인적으로는 가치있어보이지만 아무도 하는 사람이 없어서 경쟁이 없다. 그렇다면 그걸해야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창의성있는 사람이 아닐까. 어차피 나아니라도 누군가 그걸 하겠다는데 그사람과 바구니안에 든 게처럼 사는 것보다 가치는 있지만 하겠다는 사람이 없는 것을 하는게 만족스럽지 않을까.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문제가 하나요 그런 일을 찾을수 있는 창의력있는 비전이 둘이다. 사실 크게 성공한 사람들은 대개 경쟁에 이긴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경쟁자체가 성립하기 전에 뭔가에 몰두했다. 먼저 몰두했으므로 경쟁따위로 소모되지 않았고 그분야가 주목을 받을 무렵에는 맨앞에서 분야의 성장 그자체에 떠밀려올라가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단순히 사회적 성공이나 경제적 성공의 문제만도 아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는 중요하다. 그러나 경쟁에 소모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같다. 그럴에너지를 아무도 안하겠다는 일에 투자하는 것이 모두에게 특히 나 자신에게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