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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없는 40대 자살하는 50대

by 격암(강국진) 2011. 9. 21.

몇일전부터 50대의 자살과 좌절에 대한 기사가 나더니 오늘은 동아일보에서 노후대책이 없는 40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기사내용은 통 신통치가 않았다. 왜냐면 그건 약간 길게 쓴 소위 노후자금 10억 론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즉 40대를 걱정하는 듯보이지만 결국 노후에 살려면 자금이 이만큼 필요한데 부족하다라는 것이 핵심이요 사실은 이 문제를 만들어 낸 원인을 더욱 깊게 하고 있다. 


그 동아일보 기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노후대비를 할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당연히 별로 없다. 그럼 노후대비가 없다라는게 무슨말인가. 과반이상의 나머지는 어디가서 자살이라도 하라는 말인가. 이왕죽을 거 전부 도박판에라도 걸어서 따면 살고 지면 죽으라는 말인가. 곰곰히 생각해 보면 씁쓸한 맛이 배어난다. 


정신적 건강, 사회적 건강


노후대비라는 것은 여러가지 측면이 있다. 돈이란 그중의 하나 그것도 작은 하나에 불과하다. 다른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이란 일단 제정신을 가지고 살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가지는가 하는 것이요 나아가 사회적인 육체 즉 가족과 친구 그리고 전체 사회공동체가 건강한가 하는 것이 두번째다. 


오늘날의 한국을 보면 개인이 가지는 돈에 비해 정신적 건강함이나 사회적 공동체의 건강함이 지나치게 사소한 것으로 여겨지는 바람에 한국은 한쪽을 팔아 다른 쪽을 사는 식으로 부자가 된면이 크다. 즉 정신적으로 협소하고 사회적 신용은 파괴되어 왔다. 


조선시대 선비가 다 옳기야 하겠냐만은 요즘 세상에 선비처럼 수신을 생활의 기본으로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있는가. 선비가 옳으냐 노후자금 따지는 우리가 옳은가는 둘째문제로 간단히 옛것을 의미없는 것이라 생각지 말고 싸구려 윤리라고 생각지 말고 '현실적' 차원에서 생각해 보자. 과연 수신을 무시하고 사는게 현실적으로도 노후대책이 될까. 암묵적으로 자기는 더 수신할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터이니 다른 사람을 객관적으로 쳐다보라. 정신상태는 내팽겨치고 통장잔고만 쳐다보며 사는 인생이 과연 안정적이던가?


사회적 신용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해 보자. 내가 친구집의 문을 수리해 주고 그 집에서는 언젠가 명절에 나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이것을 경제 활동이라고 부르지 않고 정이 흐른다라고 하며 이것은 물론 국민소득이 얼마냐를 따지는데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친구집을 돈받고 수리해주고 그 집에서 나에게 돈받고 음식을 팔면 그건 내 수입과 그쪽의 수입의 증가가 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위에서 말한 것에서 차이는 없다. 돈대신에 정이라는 신용이 흐른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노후 자금이니 소득수준이니 하면서 돈이 중요해 돈이 중요해라는 말만 자꾸 들으면 우리는 정이라는 신용을 파괴하고 돈이라는 신용을 증가시키려고 한다. 그래야 소득수준을 보는 통계에 그게 잡혀서 우리가 잘사는 것처럼 보이니까다. 그결과가 지역사회의 파괴요 가족의 파괴다. 


전통적 관계의 파괴와 대체


지금의 40대는 얼마나 효도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40대가 어린이였을무렵만해도 한국에서 부모자식간의 관계는 훨씬 더 강렬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의 40대는 대학이상의 교육비를 전부 부모에게 받고 결혼 자금이며 전세금이나 집값은 물론 결혼 이후에도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받는 사람이 상당수다. 왜냐면 전통적 사회관계상에서는 가족간에 니꺼내꺼가 없는거가 당연해서 그렇다. 자식을 키우는 것 자체가 노후 대책이다. 자식이 노후 연금이다. 


요즘의 40대 50대가 키우는 자식들은 상당수가 대학등록금을 빚내서 자기가 갚아야 하고 결혼비용같은 것을 줄수도 없고 기대할수도 없다. 그리고 거기서 과연 자식들에게 노후에 기댈것을 기대할수 있을까. 별로 없다.


나는 전통적 효도나 가족상이 좋다던가 나쁘다던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변화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확실한 것은 우리가 사회적 신용을 금전적 신용 즉 돈으로 환전했을때 항상 좋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사회적 신용은 부도가 나기 쉽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즉 친구의 배신, 배은망덕한 자식들등으로- 사실 돈만 가지고 혼자가 되면 그것도 위험하다. 


당연히 돈도 있고 사회적 신용도 있어야지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터이나 그 둘다가 서로 상충하는바가 없고 대부분이 그 둘을 다 가질수 있으면야 노후 대책이 없다는 이야기가 사회문제로 나오지도 않을 것이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공동체정신, 가족정신, 지역윤리등이 파괴될때 위험하다. 그리고 지난 반세기는 개발이라는 이름아래, 배금주의의 선전속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그런 것들이 파괴되었다. 


나는 한국에서 종교단체들이 이렇게 활발한 이유를 그것때문이라고 본다. 전체 사회를 모아줄 사회정신의 파괴속에서 교회같은 집단공동체 안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생활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친족공동체, 지역공동체를 교회가 대체한 면이 크게 있다는 것이다. 이웃끼리 돕고살던 풍습이 자본주의의 공격을 받자 교회같은 종교단체 안으로 숨어들어 결합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체로 보면 이것은 여전히 분열이 되고 공동체 의식의 소멸이 되며 윤리의 파괴가 된다. 다시 말해 사회적 신용은 줄어만 가고 공동체로서의 한국은 점점 희미해 지고 그저 각자의 자산을 불리려는 개인만 남는다. 겉으로는 건물이 올라가고 국민소득이 증대하니까 부자가 되어가는 것같다. 그리고 실제로도 해방이후보다야 부자가 된면이 있을것이다. 그러나 사라진 사회적 신용 즉 돈으로 잡히지 않던 부분을 고려해서 생각하면 한국의 발전이란 생각보다 훨씬 초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진짜로 얼마나 부자가 되었을까


국민소득은 미친짓이지만 아파트한채에 100억씩에 사고팔면 단숨에 올라간다. 은행에서 마구 돈빌려주고 하면 사람들의 명목자산은 미친듯이 올라갈 것이다. 이것을 미친짓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미 한국이 해온 짓이다. 자산의 대부분이 아니면 전체 자산 이상의 값을 가진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 한국이 가진 돈이란 어떻게 보면 신기루같은 것이다. 


어렸을때 흔하게 먹던 꽁치며 고등어며 참외며 수박이며 요즘보면 얼마나 비싼지 모른다. 나는 그 가격을 보면서 과연 정말 우리가 부자가 되긴 된것지에 대해 회의적이 될때가 많다. 우리 할아버지는 농부셨다. 그래서 방학이면 시골로 기차타고 내려가서 넓은 마당이 있는 시골에서 놀았다. 할아버지가 대나무로 저금통을 만들어 주셨던 기억이 있다. 많은 집이 그랬다. 요즘에 사람들은 시골체험 캠프에 간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대도시의 작은 아파트에 사시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이들은 비싼 돈내고 여행을 간다. 예전에 우리 부모님이 사시던 서울 변두리 마을은 연립주택 앞의 평상에 사람들이 나와 떠들면서 살았다. 지금의 고층빌딩 아파트촌은 아무래도 예전 분위기 같지 않다. 


중요한 건 다시 삶의 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진짜 가치를 느끼고 보는 것이다. 동아일보기사같은데서 노후 자금이 얼마니 하는 그 공포에 목을 매는 건 사는 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몇사람이 살자는 이야긴데 결국 대부분이 죽는다. 


한국은 실질적으로 전세계에서 가장 대학등록금이 비싸고 70%의 학생이 대학에 가고 자살율이 전세계에서 가장 높다. 젊은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결혼을 못하고 국경을 넘어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가난한 나라에서 밀려온다. 배가 물이새서 반쯤 물에 잠겨도 잘 살려면 배의 높은 부분에 있는 것이 필요하다는 한가한 논평을 하는가. 그배가 더 가라앉으면 어떨까. 그 높은 부분에 올라가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냥 죽으라는 말인가. 


최면에서 깨고 사회를 바꿔야 한다


내가 보기에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급한 노후대책은 개인의 통장잔고가 아니다. 최면에서 깨는 게 가장 먼저 필요하다. 제대로된 가치판단을 하지 못하게 하는 목소리들에게서 풀려나는게 필요하다. 그리고 한국 사회를 바꿔야 한다. 


전세계에서 가장 자살율이 높은 나라에서 영리병원같은 걸 추진하는 한가한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저소득 노인층의 최대고민은 아픈것과 병원비다. 외롭고 가난한 노인들이 병걸렸는데 병원비 왕창나와 그나마가진 저금 다까먹을 것같으면 그냥 죽으라는 말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영리병원을 추구해서 살리게 되는 사람, 더 좋은 서비스를 받는 사람도 분명있을것이다. 그러나 죽어나가는 사람의 숫자가 그것을 훨씬 앞도할 것이다. 반세기전에 이미 캐나다의 의사 노먼 베쑨은 페렴과 싸우다가 가장 강력한 질병이란 병원균이 아니라 가난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살하는 50대, 대책없는 40대라지만 집없는 30대에 고아나 다름없는 20대라고 해야 할것이다. 지금 정부가 엄청나게 쌓고 있는 빚은 온전히 젊은 세대가 갚아야 하니까. 지금도 죽겠다고 야단이지만 20년 뒤까지 사회가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지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의 평균국민소득이 뭐가 되건 대부분의 20대는 지금의 40대보다 훨씬 열악할 것이다. 지금 40대는 그래도 전세금정도는 있고 결혼해서 자식은 키우잖는가. 40대가 되서 결혼도 못하고 쪽방에서 살면서 언제밀려날까를 생각하는 인생보다는 좋지 않은가. 


최면에서 깨야 한다. 그리고 우리를 지켜줄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병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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