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이 만들어 내는 감옥
오늘은 화이트헤드의 advantures of ideas라는 책을 조금 봤습니다. 아직 조금 봤을 뿐이지만 공감이 가는 예가 있어서 몇마디 써볼까 합니다. 화이트헤드가 책의 부분부분에서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정신 깊숙한 곳에 있는 가정이나 생각입니다. 그가 말하길 우리는 그것을 볼수 없고 느낄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시시비비를 가리면서 최대한 뭔가를 따져도 결국 그것은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는 그 기본가정의 테두리 안에서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가 예를 들고 있는 것은 바로 로마시대와 오늘날의 정치사회적 가정입니다. 우리는 플라톤이나 키케로같은 고대그리스 로마의 인물들을 알고 있고 그들의 정신이 높은 수준을 유지했던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시대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노예제도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즉 그 시대에 민주주의를 말하건 황제가 다스리는 왕국을 말하건 기본적으로는 어느쪽이나 노예가 저밑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 당연시 되었고 때문에 그 시대의 가장뛰어난 지성들이 옳고 그른 것, 좋고 나쁜 것을 아무리 치열하게 논해도 그것은 노예제를 당연시하고 말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자유와 평등이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노예제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봅니다. 이전의 철인이나 변호사들도 물론 노예제의 존재는 인식되는 것이지만 마치 우리가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종종 잊어버리듯 노예제는 의식의 저 밑에서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이런 예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즉 우리가 그저 무조건 인정해 버린 사고의 바닥이 정말 당연한 것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 아무리 치열하게 사고를 한다고 해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박스안에서 맴을 돌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곳이 중요한 이유
몇년전에 한형조교수라는 분이 중앙일보에 조선유학을 다시 보자면서 조선유학을 조선유학의 시야로 봐야 한다는 연속칼럼을 쓰신적이 있습니다. 그같은 지적에 공감하는 바가 컷지만 정작 몇개인가의 칼럼을 읽고는 저는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왜냐면 그 칼럼들은 오늘날 우리가 가진 서구적 시각으로 보지 않고 조선시대 선비의 시각으로 유교를 본다는 점에서는 다른 시각을 보여주었지만 두개의 시각을 통합할수 있는 더 큰 바닥을 찾았다기 보다는 그저 유교적 시각을 보여주는 것같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여러개의 시각을 가지는 것이 좋다는 말이 흔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동시에 다른 신을 믿지 말라는 여러개의 종교를 동시에 믿는다는 자기모순적인 일입니다. 진짜로 그중의 어느 신을 믿는다면 다른 신을 믿을수가 없는 것이죠. 다시 말해 유교적 시각이란것이 서구적 시각과 상충하기 때문에 두개의 시각을 진짜로 동시에 가질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여자만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는 마음을 두여자 모두에게 느낀다는 것은 말장난이며 자기모순입니다.
왜 이런말을 하냐면 오늘날 서구적 시각이 세계적 주류로 올라선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선시대 유교학자의 시각으로 돌아갈수도 없고 돌아가서도 안됩니다. 그러니까 조선시대 선비가 읽는책들을 나열하면서 하나의 세계관을 서술하는 방식은 사실 위험하거나 무의미한 것입니다. 무의미한 것은 읽는 사람이 그것을 믿지 않으면 무의미하기 때문이고 위험한것은 믿으면 그사람은 이번에는 오늘날 우리주변을 지배하는 서구적 과학의 시각을 잃어버리고 황당한 이야기로 빠져들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대화자체가 안됩니다. 이니 기니하는 이야기를 아무리 해봐야 소통할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서구적 사고방식이 지탱하는 바닥을 더 파고들어서 유교적인 시각까지 포용할수 있을 만한 바탕을 찾아야 합니다. 서구적 사고방식의 핵심은 과학이므로 과학자체의 비판을 철저히 해서 과학을 믿으면서 동시에 과학의 한계까지를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나 유교적 사고방식까지 같이 포용할수 있는 것이죠.
사고의 바닥은 바로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왜 그럴까를 파고 들어서 그 바닥에 뭐가 있는가를 철저히 사고하고 그렇게 해서 바닥을 뚫고 들어가고 나서야 우리는 다시 유교로 돌아갈수 있습니다.
맺는말
절에도 좀 가고 교회도 좀가는 사람, 그저 심드렁하게 이곳저곳 가본 사람은 사실 여기저기 다 가봤는데 종교란게 다 그렇더라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면 그는 결코 한가지 종교도 제대로 믿어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은 상태에서 그 종교가 어떠니 하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종교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불교나 기독교를 생각하지만 사실은 넓은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는 모두 종교같은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수집할수는 없습니다. 그런건 아무것도 아직안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세계가 넓어져서 그 모든 이데올로기를 하나의 특별한 경우로 포용할수 있게 되고서야 우리는 여러가지 이데올로기를 같이 믿는다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그저 작은 것을 따지기 좋아하는 학자적 취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많은 사람, 작은 세계에 머무는 사람, 작은 이야기에 지배당하는 사람은 큰 맥락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물에서 의미를 볼수없고 때문에 가치판단에 있어서 다른사람과 불화가 자꾸 생깁니다. 모두가 행복하게 같이 살고 싶다면 모두를 포용할 만한 이야기가 될수 있는 사고의 기본까지는 가야 가능할것입니다. 무엇이 당연하지 않고 불확실한가를 고민하고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노예제는 당연한게 아니다라는 것같은 깨달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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