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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사람들, 사람들

진중권문제, 정의란 무엇일까?

by 격암(강국진) 2011. 10. 7.

11.2.7

진중권교수가 쓴 정의란 무엇인가 (http://www.hani.co.kr/arti/SERIES/57/499048.html)라는 글이 연일 비판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박동천 교수 (http://j.mp/qE186m)와 한상희교수 (http://www.newsface.kr/news/news_view.htm?news_idx=3341)가 모두 반박의 글을 올렸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서 찬반도 갈리는 것같고 진중권도 (이하 호칭 모두 생략) 그다지 공감하지 못한다는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현재다. 그래서 이와 관련된 몇가지 생각을 여기 정리해 보고 싶다.

 

문제의 중요성

 

나는 이 논의가 단순히 곽노현의 진실이 무엇인가라던가 진중권 개인이 옳다던가 틀리다던가 하는 것을 넘어서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말하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현 시대를 상징하는 질문이 되었다. 노무현대통령이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라는 구호를 대선에서 들고 나와 큰 호감을 얻은 것은 물론이고 한국에 그간 있었던 디워파동, 황우석파동, 파블로 문제가 그러하며 정의란 무엇인가하는 책이 이례적으로 백만부가 팔려나가는 것도 그렇고 이번에 영화 도가니가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것등도 모두 이 질문 즉 정의란 무엇인가 혹은 공평한 사회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때문이다.

 

도가니 문제도 그 핵심적부분은 이 세상에 파렴치한 변태성범죄자가 있다는 사실보다도 왜 그런 인간들이 처벌을 그정도 밖에 받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이번에 도가니 문제로 불거진 성범죄 관련 기사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질문한다. 강간으로 한사람의 인생을 파멸시킨 범죄자에게 내려져야 하는 적당한 수준의 처벌이란 어느정도일까. 어느 정도가 정의일까.

 

정의란 무엇인가같은 질문은 피 할수 없는 질문인 동시에 어떤 의미로 인류가 수천년간 고민해서 아직도 별로 진전을 보지 못한 난제다. 칸트같은 사람이 윤리의 합리적 근거를 구성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그 이후의 시대를 살았던 저명한 윤리학자 피터싱어는 이것이 어떤 합의점에 다다른것과는 거리가 먼 문제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으며 철학자 칼 포퍼는 윤리학에 대해 씌여진 것은 사실 별로 읽을만한게 없다라고 말했다. 

 

불행한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학을 전공한 진중권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를 보면 별로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래 정의란 무엇인가는 불행하게도 지저분하고 애매한 문제다. 그것을 지저분하고 애매하게 만들어서 정의의 심판을 피해간 나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정의란 그렇게 복잡한 문제가 아니다', '뻔한걸 복잡하게 만드는 괴변을 늘어놓지말라'라고 하는 말이 지지를 받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원래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간편하고 단순하게 해결하는 것은 나름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무능한 정의가 되고 말며 억울한 피해자를 만드는 정의가 된다. 

 

하나의 사회가 워낙 엉망인 경우에는 일단 질서란걸 창출하기 위해 정의에 대해 단순한 접근을 하는 것이 바람직했을 수도 있다. 복잡하게 논의해 봐야 질서와 규칙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전두환시대에는 몇천억씩 요즘 돈으로는 몇조씩 비자금이 흘러다녔다. 그런시대에는 돈을 안주고 안받는 것을 실천하는 정도라도 꿈꾸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단순한 정의라도 실천하자고 길에나가서 구호외치고 돌던지면 그걸로 충분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민주화시대이후 이제 그런 단순한 정의가 힘을 잃고 있다. 이제는 훨씬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복잡한 사회속에서 사람들은 항상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말한다. 어떻게 된게 정의라는 이름으로 항상 선한 사람이 두들겨맞고, 선거에서 떨어지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더라는 것이다. 거기서 단순한 정의를 세게 외치면 외칠수록 그렇게 되는 것같다. 재벌이나 권력자는 장막의 뒤에서 편하게 지내고 유모차끌고 나와 시위대에 합류한 사람이나 인터넷 게시판에서 자기의견말한 사람은 이런 저런 법을 어겼다면서 처벌받거나 조사라는 이름으로 괴롭힘을 당한다. 이런 현실앞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이제 정의가 뭔가는 확실하니 실천할 의지만 있으면 된다는 식의 단순한 태도를 넘어 시대적 질문으로, 심각하고 조심스럽게 고민해야 할 질문으로 떠오르고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얽힌 두가지 중요한 요소1 : 인간에 대한 믿음

 

정의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면 우리는 적어도 두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그 중 하나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고 또하나는 테두리와 구분 혹은 공동체다. 

 

먼저 우리는 모든 사안에는 불확실한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법과 규칙을 만들어 처벌하기는 하지만 정의는 사실 법과 규칙보다도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곽노현의 경우는 아직 유죄판결이 나지도 않았으므로 법적인 유죄여부는 논할바도 아니거니와 곽노현의 행동이 과연 정의인가 아닌가는 객관적 증거이상으로 불확실한 부분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여고생의 엉덩이를 성인남자가 건드리는 행위를 생각해 보자. 이렇게 들으면 이것은 당연히 성추행범인것 같다. 누군가가 그런데 그 남자는 실은 아빠였다고 말해보자. 그러면 사람들은 둘로 갈라질수 있다. 하나는 더욱 화를 내는 사람이다. 아빠가 성추행을 하다니 뭐 이런 인간이 있나 하는 식이고 또하나는 그래 그럼 별거아니네하고 반응하는 사람들이다. 아빠는 딸을 여자로 보지않을테니 그건 성추행같은게 아니라 어쩌다가 장난을 친거겠지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한 법률로 우리는 성인남자가 여고생의 엉덩이를 건드리면 성추행으로 체포해야 한다는 규칙을 만들수는 있겠지만 과연 정의가 뭔지 하는 것이 그런 규칙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거기서 중요하게 떠오르는 것이 인간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일반론적인 규칙을 어긴 사람들은 모두 부정한 사람들이고, 규칙을 집행하는데 있어서 다른 해석을 내놓는 사람들은 괴변론자거나 성추행범을 옹호하는 무리라고 비난할지 모른다. 즉 어디까지나 인간의 내면같은 주관적인 것은 무시하고 객관적인 그 행동만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동주의는 시대에 뒤쳐진 것이다. 마음과 믿음을 부정하는 그런 것이 정의고 진보라면 그런 것이 정말 인간을 위하는 따뜻한 정의고 따뜻한 진보일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런 눈먼 정의때문에 죽어나가고 억울한일을 당하는 사람이 많을 뿐만 아니라 정치권에서 야당이 사소한 규칙이나 명분에 얽매인탓인지 제대로 뭔가를 개혁해 나가는 것이 하나도 없어보일 때 사람들은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았던가. 

 

박원순에 대한 이런 저런 비판을 봐도 그렇고 노무현에 대한 비판들을 봐도 곽노현에 대한 비판을 봐도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다. 법이란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전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의 사실로 하나의 인생전부를 쉽게도 뒤집는다. 김서방이 오이밭에서 신발을 고쳐매건 조서방이 그랬건 둘다 그랬다면 둘다 똑같이 나쁜 사람이다. 김서방은 평생 돈벌기회마다하며 다른 사람을 도와온 사람이고 조서방은 평생 그런일 한번 안하고 출세와 돈만보고 뛰어온 사람이라도 결론은 재빨리 둘다 나쁜 사람이다. 

 

이런 결론의 뒤에는 인간에 대한 심각한 불신이 있다. 물론 세상에는 나쁜 사람도 많다. 그렇지만 모두가 모두를 불신하면서 어떻게 정의가 실현될 수 있을까. 곽노현의 사회봉사를 인정하던 사람들이 사건이 터지자 하루도 안돼 그에 대한 평가를 백퍼센트 뒤집는 것은 매우 실망스럽다. 차라리 조갑제처럼 일관성을 보이는 사람쪽이 안정되게 느껴지는 면이 있을 정도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얽힌 두가지 중요한 요소 2 : 테두리와 공동체

 

정의란 무엇인가를 논할때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두번째의 것은 공동체다. 즉 현실적으로 테두리없고, 어떤 공동체를 전제하지 않은 정의란 존재할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건 적어도 사회적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사람들은 종종 테두리를 치는 것이 정의를 깨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테두리 없는 절대정의를 추구하고는 하지만 그런 것은 적어도 사회적으로, 언어로 논의할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정말로 테두리가 없다면 아메바 하나와 인간한명 그리고 코끼리 한마리의 생명중 더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 있을까. 어떤 사실명제 즉 어떤 과학적 증거를 가지고 와도 가치판단으로 인간 한명이 아메바 하나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다는것을 증명해낼 수는 없다. 사실명제는 가치명제를 증명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메바 수억마리쯤 인간한명을 위해서 간단히 죽일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테두리를 치고 인간을 서로 공동체로 인식한 상태에서 아메바를 보기 때문이다. 

 

아메바의 예가 비상식적인것 같다면 이런 걸 보자. 아이 한명의 목숨과 아이 백명의 목숨중 어느것이 더 중요할까. 당연히 백명이라고 답하거나 생명의 중요성은 숫자로 논할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우리의 아들이나 딸 한명의 목숨이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백명의 아이의 목숨보다 덜 중요하다고 말하나? 한국에서 한 아이를 키울 돈정도를 아프리카로 가지고 가면 엄청난 숫자의 아이들을 살릴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물한병, 약한알이 없어서 죽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정의란 뭔가. 과연 우리는 당당히 정의란 무한대로 테두리 없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며 우리가 그걸 실천한다고 주장할수 있는가? 

 

또한 테두리나 공동체의 문제는 권한과 의무의 문제에서도 중요하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공동체의식이 실종된 사람이, 문제가 생기면 국민을 보호해 달라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을 것이다. 즉 의무는 다하지 않고 권한만 이야기하는 것은 정의가 아닐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한다. 그런 예는 아주 많지만 전에 선교단체가 문제를 일으켰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가지 말라는 나라에 선교를 굳이 나가서 잘되면 하나님의 은혜고 문제가 생기면 나라가 국민을 보호하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것이 그들의 언행이었다. 이는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더구나 그 당시 지구상의 다른 장소에서 피납된 한국인들도 있었지만 거의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해서 형평성 이야기도 논해졌었다. 과연 그것이 정의냐는 것이다. 

 

테두리에 대해서는 복잡한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곽노현의 경우로 돌아가기로 하자. 진중권은 돈을 준 곽노현을 변호해 주는 사람들을 거의 위선자처럼 이야기한다. 곽노현의 총체적 진실은 둘째치고, 곽노현의 사법적 진실도 아직은 드러나지 않았다. 판결이 나지 않았으니까. 

 

진중권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거기에 어떤 테두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고로 말하면 나는 이 글에서 전부가 아니면 대부분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전제로한 정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진중권의 정의에는 테두리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정의를 논할때는 테두리가 안느껴지는게 좋다고 할지 모른다. 다시말하지만 진정 테두리가 없는 궁극적 정의란 곽노현을 저기 태평양 섬에 사는 불가사리중의 하나쯤으로 여기는 태도로 논하는 정의다. 그런건 정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곽노현을 아끼는 사람들이 있다. 곽노현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위해 노력하고 봉사한 것에 대해 인정하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그들의 착각일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적어도 곽노현이 공평한 수사를 받게 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단순하게 판결도 끝나지 않은 사건으로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실제로 보면 곽노현은 공정택의 경우와 비교했을때 결코 공평하다고 할수 없는 대우를 받고 있다. 공정택은 관련된 사람도 많고 사안이 훨씬 분명했는데도 잘도 근무를 계속했었다. 

 

곽노현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그런 인간적 감정을 간단히 무시하면서 그것을 부패와 동일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면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논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정의는 논리나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가치에 대한 것이며 아끼는 마음과 사랑에 대한 것이다. 무한히 객관적인 태도로 높은 곳에 앉아서 '돈줬습니까? 그럼 아웃입니다'라고 선언하는 기계는 정의를 실천하고 있는게 아니다. 이는 정의를 법전에 씌여진 문구나 논리와 혼동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그런 정의란 없다. 그런 식으로 정의를 추구한다면 그런 정의가 넘치는 세상은 지옥같아 진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사람들이 정의에 대해 자꾸 다시 묻는 것이다. 

 

이걸 패거리주의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렇다고 해야 겠다. 그러나 사실 궁극적인 의미에서 패거리주의가 아닌 정의는 없다. 곽노현이든 진중권이든 노무현이든 모두 어떤 사회적의미, 어떤 공동체라는 문맥속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런 의미, 그런 인간적 감정을 누르라고 주문하면서 정의를 논하는 사람은 실은 사회를 무서운 기계나 동물들의 세계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간단히 저사람들은 미쳤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맺는말

 

정의란 무엇인가는 당연히 글하나에서 몇줄로 논할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글하나가 아니라 책한권이라도 내가 어떤 최종적 답을 제시할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너무도 명쾌하고 간단한 답만 추구하지 않았으면 한다. 시골집에서 농사짓고 살던 노무현이 죽고 엄청난 재산을 내돌린 사람들이 호의호식하는 시대가 우리 앞에 있다. 뒤에서 니들은 다 똑같은 사람이야 라고 말하기는 쉽다. 노무현과 이명박은 똑같은 사람이고 공정택과 곽노현은 똑같은 사람이고 박원순과 나경원은 똑같은 사람이고. 그렇지만 그런게 정의일까? 시대는 적어도 그 이상의 수준의 고민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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