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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사람들, 사람들

김영하-소조 논쟁에 대한 단상

by 격암(강국진) 2011. 2. 17.

11.2.17

최근 작가 김영하가 비평가 소조와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인터넷 토론을 벌였다는 기사가 있었다. 그 토론의 결과 김영하가 트위터와 블로그 활동을 접겠다는 선언을 하고 소통에 대해 염증을 내비쳤다고 한다. 이 소식에 관심을 가지게 된 나는 문제의 소조의 블로그에서 그 토론의 글을 찾아 몇개 읽어보게 되었다. 이는 한편으로 나와는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하는 작가와 비평가들의 이야기를 읽음으로서 새로운 것을 들을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또한 한국의 지식인 사회의 한 축을 만드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은 생각이었다. 

 

몇개인가의 토론글을 읽었지만 실상 김영하의 의견 본글은 지워졌으므로 소조의 글에서 인용된 부분만을 읽을 수가 있었을 뿐이었다. 이 점은 아쉽지만 김영하는 인용된 것만으로도 내 의견은 충분히 알수 있을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소조의 글은 여기서 읽을수 있다. (http://blog.daum.net/kundera/12610121)

 

내가 이들의 대화를 읽으며 극명하게 느낀 것은 소조는 사회나 세계가 인간을 만든다는 세계관,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소조는 '문학가는 세상의 편견이나 불합리한 제도와 싸우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작가란 생계수단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며 생계수단만큼 소중한 것은 없기 때문에 소통을 위해 목숨을 걸고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런 그의 태도와 글은 스스로 낭만주의를 말하는 김영하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성공한 작가의 배부른 소리, 현실과 유리되어 자기 만족에 빠져서 사는 사람이라는 말을 던진다. 그의 글을 읽으면 던지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던지고 있는거나 마찬가지라고 느껴진다. 

 

나는 작가가 아니므로 소조처럼 작가지망생들에게 메세지를 던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또한 글이란 문맥에 따라 누구를 향해 글을 썼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우리나라의 문학이 어쩌면 우리나라의 현실을 개혁하는데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일 수 있으며 이것은 현실과 분리되어 환상속을 헤매는 작가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책임을 충족시키지 못한데서 오는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소조의 메세지는 나름의 가치와 의미를 가진다고 느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소조의 입장과 세계관은 매우 폭좁은 것으로 보여진다. 보통사람에게건 작가지망생들에게건 그가 인용한 김영하의 글들이 훨씬 더 길게봐서 도움이 되는 글이 될 것이라는게 나의 소감이며 이는 심지어 그가 그렇게도 강조하는 세계를 변혁하는 일에서 조차 그러할 것이다. 이는 왜 소조가 아니라 김영하가 인기작가인가하는 이유인지 모른다. 사람들이 그의 글에서 가치를 느낀 것이다. 소조는 그것이 착각이라고 하겠지만. 

 

작가는 글로 돈을 버는 사람, 시장의 요구에 화답하는 사람, 세계를 변혁하는 사람이라는 식의 그의 논법에는 세계와 싸우는 개인의 그림이 그려진다. 즉 세계가 개인을 결정한다. 사회가 어떤 사람이 작가이냐 아니냐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 개인은 이젠 세계를 변혁하려는 투쟁에 나선다. 이것은 세계가 나를 결정할 것인가 내가 세계를 결정할 것인가 하는 투쟁이다. 개인은 세계와 끝없이 불화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빠져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도대체 뭐가 옳은가 하는 것이다. 세계가 정상적이고 내가 삐뚤어져 있다면 세계가 나를 바꾸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세계가 삐뚤어져 있고 내가 올바르다면 나는 삐뚤어진 세계를 수정하고 고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부분이 삐둘어진 것이고 어느부분이 올바른 것인가. 내가 작가로 인기를 얻어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계가 정상적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쓰레기같은 내 글에 환호하는 세상이 잘못된 것인가. 만약 내가 틀렸다면 나같은 사람이 돈버는 세상을 고쳐서 나같은 사람은 작가로 굶어죽게 만드는 세상으로 개혁해야 하는 것인가. 

 

김영하의 글은 부분적으로 밖에 인용되어 있지 않지만 김영하의 글에는 김영하가 있다. 그런데 소조의 글에는 온 세상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온 세상을 흉내낸 시스템이 있다. 김영하는 자신의 목소리로 자기의 이야기를 한다.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김영하가 하는 말은 자신의 말이지만 소조는 온갖 개념과 유명인의 인용문을 등장시키며 역사적, 법칙적 맥락을 등장시킨다. 한마디로 거대한 이론의 시스템을 소통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 시스템은 서구와 일본지식인들의 견해로 범벅이 되어 있는 어떤 것이다. 

 

이런 차이는 물론 댓글에서의 지적처럼 작가와 비평가라는 각자의 직업적 차이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도 옳은 말이지만 나는 이는 그저 견해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끝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인용구가 많다고 비판하는게 아니다. 소조는 인간의 눈으로 보고 만들어낸 법칙과 역사적 맥락을 실체 그 자체로 인식한다. 인간이 세계를 통째로 제대로 인식하고 그것에 진실된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가 나는 낭만주의자라고 하면 역사적 맥락에서 낭만주의란 이렇게 정의되고 이런 시기의 생각이니 이사람은 이런 저런 사람이다라고 문자그대로만 받아들인다. 그는 한국문인들은 감수성은 넘치게 있으니 현실을 보라고 말한다. 말하지 않아도 그에게 있어서 이 세상이란 곳에서 뭘 고쳐야 하는 것인지, 뭐가 나쁜 것인지는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마디로 소조는 특정 이데올로기에 빠진 인간처럼 보인다. 우리가 기본적 인권도 가지지 못했던 독재정권때나 해방운동 벌이던 일제시대라면 뭐가 옳고 그른지는 분명하다고 현실을 바꾸자고 주장하는 태도가 보다 설득력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의 한국은 그렇지가 않다. 물론 요즘에도 분명히 잘못된 것이 있다. 그러나 많은 잘못들은 다른 사회적 현실과 얽혀서 등장한다. 매듭진 것을 칼로 뭉텅잘라서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깊이와 넓이가 요구되는 시대다. 

 

소조의 그것은 일견하기에 정의감으로 가득찬 것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실은 지적독재를 꿈꾸는 이데올로기 신봉자에 가깝다. 소조는 서로 반응하지 않는 한국문단의 현실이 안타깝다고 한다. 그것은 그나름 적절한 지적이겠으나 그것은 또한 냉정한 반대의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닐까. 즉 실은 그런 언어와 말들이 현실에서 무력하다는 것을 모두가 느끼고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번역서나 비판서가 철저히 무시당하는 것은 실은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치있게될 큰 그림도 없는 부품에 불과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꼬여져 있는 현실앞에서 사람들이 무기력하게 있는 것은 나쁜 것이지만 칼들고 와서 '이렇게 저렇게 팍팍 자르면 되잖아. 내 말 틀려? 이거 위선자들아냐?' 하고 외치는 사람이 반드시 보다 더 정의로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길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문학인, 지식인의 무능을 비판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리고 물론 용기가 없고 비겁한게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칼들고 설치는 자가 더 용감하다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현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반드시 현실을 기억하고 느껴야 한다. 그러나 보이는 현실을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상업적으로 유명세로 평단에서 성공한 작가가 작가는 남의 평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무모한 도전을 하고 외부세계와 무관하게 흥미를 잃지 않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물론 그 작가는 등따시고 배부른 상황에서 하는 소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전적으로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은 거꾸로 춥고 배고픈 자신의 현실에 완전히 지배당하는 것이다. 

 

왜 성공했는가 아닌가에 집착하는가. 김영하가 성공해서 이젠 성공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면 아직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 성공에 집착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성공의 유무에 상관없이 뒤쳐진데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적으로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인지상정일 수 있어도 그것이 반드시 당연하고 옳은 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회적으로 대중적으로 성공하지 않아도 내적 자신감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소조처럼 단언할 수는 없다. 

 

작가란 무엇인가를 소조는 이렇게 정의하고 김영하가 다르게 정의한다고 한들 그것 자체가 이상할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사람들이 각각 독자들에게 어떤 삶의 태도를 제시하고 있는가하는 점이다. 소조는 너무 간단히 자신부터 개혁하는 것을 세계와 동떨어져서 비현실적이 되는 것이라고 말해 버린다. 소조건 김영하건 한국의 땅에서 나고 자라거나 그와 관련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내부에 사회적 현실의 그림이 들어 있다. 자신을 개혁하고 자신을 바꾸는 일이 어떻게 세상을 개혁하는 일과 분리될 수가 있을까. 사회적 모순의 큰 뿌리는 이미 내 내부의 개인적 고민으로 들어와 있다. 

 

만약 누군가가 사회적 소통을 완전히 포기하고 자신만의 환상속에서 산다면 그것은 바보같은 일이다. 그러나 누가 그렇게 살고 있는가. 예를 들어 김영하는 그렇게 살 수 있는가? 나를 먼저 바꾸고 나야 세상이 바뀐다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것은 세상이 나를 결정하니 세상을 바꿔야 내가 바뀐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나와 세상은 본래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 자기 자리에서 자기 할 일만 해도 바쁜 세상에 좁디 좁은 눈으로 세상은 이런거라고 단정짓고 세상을 이리저리 주물러 대려고 하고 어차피 인간이란 사회적 환경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보통 서로 말을 주고 받고 있으면 그것이 소통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설혹 서로에게 크게 소리지르고 있다고 해서 소통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침묵이 더 많은 의미를 던져줄 때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김영하와 소조의 논쟁은 소통이 된 것이 아니라 싸움이 되고 괴롭히기가 된 면이 있다. 여기에는 공공의 장소에서 뭔 일이 벌어지면 그것이 구경거리가 되기 바라고 싸움이 되어 승자와 패자가 갈리기를 바라는 군중의 심리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한 대화였다. 다음번에는 누군가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더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는 대화, 보다 진전한 소통의 예를 보여주는 경우가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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