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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사람들, 사람들

진중권 칼럼 <언어의 착취 : 소통과 반지성주의>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2. 1. 9.

12.1.9

진중권이 최근에 쓴 칼럼을 읽었다 (http://bit.ly/zKjOZt ). 읽고나서 느낀 첫 느낌은 '매우 기쁜 마음으로 읽었으나 마지막에는 삼천포로 빠진 느낌'이랄까. 그러나 많은 내용은 훌룡하므로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권하는 바이다. 나는 여기에서 진중권이 말한 것을 정리하고 진중권이 놓친, 포용력의 문제를 하나 지적할까 한다. 

 

코드의 문제a

 

그 컬럼의 몸통에서 중요한 내용으로 등장하는 것은 코드의 문제와 인문학의 문제다. 코드의 문제는 서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같은 언어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언어자체 혹은 생각하는 방식자체를 고민하는 것이 문제일때 -철학과 예술이 하는 일이 (올바르게도) 이런것이라고 진중권은 지적하고 있거니와- 같은 언어를 요구하는 일이 일을 망치게 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패러다임의 변화같은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이쪽의 패러다임 혹은 철학에서 세상을 보는 방식에서 저쪽의 패러다임의 언어는 서로에게 애매모호하다. 그리고 결코 명확하게 일대일로 번역이 되질 않는다. 패러다임의 차이는 대개 매우 미묘하고 혹은 매우 원천적이라서 평상시에는 의혹의 대상이 되지 않는 자명한 일에 대한 입장차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영어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프랜드가 친구라는거야 아냐 하고 예스/노의 질문을 던지면 곤란하다. 미국에서 프랜드간에 허용되고 허용되지 않는 것과 한국에서 친구간에 허용되고 허용되지 않는 것은 차이가 있다. 미국에서 지도교수를 가르켜 그는 나의 선생이자 프랜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다. 한국에서 지도교수를 가르켜 저사람은 내 친구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른 문화, 다른 사고방식은 모든 부분이 서로 얽혀있어서 하나의 말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자꾸 더더더 설명을 요하게 되면 엄밀하게 말하면 무한히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설명이 충분해서 일어나는게 아니라 언제나 이쪽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이 어떤 인식의 비약을 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는 제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져도 서투른 흉내에 지나지 않게 된다. 

 

진중권은 이 코드의 문제를 도입하고 나서 단순화하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반한나라당/민주당의 이진법적 코드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통상은 이것을 보수/진보 혹은 우파/좌파의 사고구도라고도 말하는데 진보나 좌파라는 말에 애착을 가진 진중권으로서는 그런 단어들은 이진법적 사고라고 말하는데 거부감을 느끼는 것같다. 

 

이야기의 끝으로 가면 결국 위에 나온 이야기들은 작금의 나꼼수열풍이나 김어준의 인기가 단순한 사고방식에 빠진 대중과 잘 소통하는 김어준의 반지성주의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지성인이란게 뭔가

 

이 끝부분은 내게 매우 유감스럽게 보이며 좀 나아가면 도대체 진중권은 엘리트주의에 너무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코드로 말하자면 사람들이 코드 A에 빠져 있는데 진중권은 코드 오메가로 세상을 보니 사람들이 무지하게 행동하고 있더라 이것이다. 그런데 코드 오메가가 코드 A보다 좋은 거라는 것은 뭐로 보장되는가. 

 

더 복잡하니까? 코드 오메가는 감이나 감성이나 직감같은 것 없이 순수한 논리와 증거로 만들어진 세상이니까? 자전거 고치는데 누가 나무망치 가져와서 감으로 탕탕 여기저기 두들기는데 이런 몰지각한 인간이 있냐면서 복잡한 기계로 가득찬 실험실을 차리는 인간이 반드시 더 옳은 것일까? 나는 틀리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복잡한게 항상 답의 기준은 아니다. 

 

타자가 공을 치면 야구공은 물론 물리적 법칙에 따라 날아가고 떨어진다. 그렇다고 외야수에게 가서, 넌 뉴튼방정식 세울줄은 아냐, 유체동역학 수강은 한 적이 있냐. 그런 것도 모르면서 공이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아냐. 너 미친거 아니냐. 대충 감으로 잡겠다니 그런 불성실한 태도가 문제인거다 이런 소리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런 물리학자에게 박수를 치고 환호해 줘야 할까. 그 물리학자가 실제로 공을 제대로 잡는 걸 별로 본적이 없어도?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결국 감성이다라고 말하는 인간은 반지성주의적 인간이라는 것은 사실일까. 나는 김어준이 구세주라고 생각지 않으며 대단한 학자라고 생각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어준을 평균이하의 지성을 가진 인간이라던가 반지성주의자라고 부르는 게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지성인이고 지성주의적으로 행동한다는게 뭘까? 더 복잡하게 생각하면 답에 가깝다는 것을 믿는 것인가? 난 단순하면 답에 가깝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이게 중요한 문제다. 단순하면 다 똑같고 복잡하면 다 똑같고 하는 식의 태도도 어떤 시각적 장애다. 그래서 이명박과 노무현은 똑같고, FTA 찬성하는 사람은 다 똑같고, 삼성에게 돈받았으면 비자금을 받았건 좋은 일에 쓴다고 기부금을 받았건 다 똑같다는 장애가 발생한다. 

 

지성적인 것중의 하나는 분명하다. 그건 내가 세상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 내가 무지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대중의 선택이 내가 보는 것과 다를 때 다시 말해 세상사람들의 코드가 나의 코드와 다르고, 내가 인식하는 나의 세계가 세상사람들이 인식하는 세계와 다를 때, 나에게 설득당하지 않는 사람들을 원망할 수는 없다. 인간적으로 실망감을 느끼게 될수는 있지만 결국은 어쩔수 없는 것이다. 내가 세상의 가치기준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망한다는 것은 사실 이 코드에 얽힌 말들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누구도 가치적 세계에서 자신을 잣대로 삼아 옳고 그름을 절대화 할수 없다. 나는 축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농구를 하고 있어서 손을 쓴다. 손을 쓰는 사람들은 미친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다만 지금 농구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그 사람들이 축구를 하는 나를 보고 지금은 축구를 해야지 농구가 아니다라고 생각해 주면 고맙지만 그들이 나를 '믿어주지' 않는다고 그들이 미친사람들이고 욕할 수는 없다. 진중권은 감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반지성주의라고 비난하는데 패러다임의 변화에는 믿음이 핵심적으로 중요한 일이다. 내가 옳으니까 나를 믿는게 당연한거 아니냐고 말하는 것이야 말로 반이성적인 태도다. 내가 세상의 가치의 중심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대망상이니까.   

 

진중권에게 없고 김어준에게 있는것

 

나는 김어준이 구세주라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진중권이 그게 내마음이라니까라고 말할지도 모르는 단순화의 문제를 같이 지적하고 싶다. 나는 김어준의 탈권위주의에 박수를 보내지만 그것만으로 세상이 개혁될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나는 김어준이 이뤄내고 있는 공감대가 있다는 사실을 과소평가 하지 않을 뿐이다. 그가 이뤄내고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런 믿음의 공동체가 있지 않으면 패러다임의 변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사회적인 문제로 모여서 기꺼이 성금내고 자원봉사하지 않는가. 그걸 굳이 나쁜 일이라고 매도할 이유는 없다. 진중권의 문제는 진중권의 코드 오메가가 김어준이라는 세상의 일부를 포용할수 없다는 데에 있다. 과연 김어준이 포용이 안되는 진중권의 코드 오메가가 만들어 내는 세상이 좋기만한 세상일까?

 

진중권에게는 부족하고 김어준에게 있는 것은 포용력이다. 연합의 능력이다. 내가 굉장히 자주 말하는 말이지만 이건 단순하게 진중권은 마음이 좁쌀같고 김어준은 마음이 넓은 대인이다라고 말하는게 절대 아니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오히려 반대일수 있다. 

 

이것은 코드의 문제고 철학의 문제고 태도의 문제다. 진중권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진중권의 옆에 가면 부담스럽다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왜냐면 진중권은 시시비비다 가려서 너는 나쁜 놈이라고 말하고 면박줄것 같으니까. 사실 진중권은 지금도 그러고 있다. 본인은 어떻게 말할지 모르나 결국 김어준 잡고 이사람은 뭐가 부족하네 뭐네 하고 떠들고 있으니까. 사람들은 이 나쁜 놈 많은 세상에 왜 김어준을 잡고 시시비비를 논하는거야 하고 어리둥절하는데 말이다. 

 

그에 대해 김어준은 반격하지 않는다. 김어준은 싸움의 핵심주제를 자기가 싸워야 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집중하는 모양인 반면 진중권은 스스로를 세상의 모든 문제의 잣대로 등장시키려는 모양이다. 그것도 나는 결코 틀릴 리가 없다는 자신감으로 그렇게 한다. 그것때문에 몇몇 사람들이 뒤에서 진중권 욕을 한다. 그 사람들을 논쟁에서 싸워 이길 수는 있겠지만 논쟁의 승리가 공감대를 가지고 사회적 선을 향해 같이 싸우는 공동의 연대를 만들어 내는 일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다시말하지만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좀더 마음을 넓게가져라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철학의 문제다. 그래서 큰 문제고 김어준의 코드가 문제를 가졌다면 진중권의 코드도 큰 문제를 가졌다는 이야기다. 그 코드로 소통하는 세상이 결코 문제없는 세상이 아니라는 걸 사람들도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느끼기 때문에 진중권코드가 김어준코드를 다 지워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진중권은 지성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겠지만 사실 진중권과 김어준이 학자가 아니라 인간적 철학으로서 비교했을때 어느쪽이 더 깊이가 있는지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중요한 건 진중권도 김어준도 아니다. 미안하지만 답이 되는 코드는 아직 적어도 집단적 추종자를 만들어 냈다고 할정도의 경우가 없는 것같다. 김어준이 뭐가 틀렸나, 진중권이 뭐가 틀렸나가 아니라 답이 되는 코드 즉 한국인들을 모두 편안하게 포용할 세계를 만들어 내는 그런 코드를 찾는게 시대적 과제다. 능력이 된다면 그런 쪽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런 문화적 개혁이 가능한 빨리 올 수 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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