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이야기쿠스라는 말은 내가 재미삼아 붙인 글제목이다. 사람은 이야기를 먹고 이야기를 소비하고 이야기에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마치 산소가 없으면 질식하듯 우리는 이야기가 없을 때 질식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어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중의 하나인 아마데우스를 다시 한번 봤다. 아마 이 영화는 열번 아니 스무번은 봤을지 모른다. 나는 한때 중경삼림이나 라이온킹같은 영화를 여러번 봤었지만 그런 영화는 이제 다시 보기엔 지겹다. 그러나 아마데우스는 처음의 그 감동은 없다고 해도 여전히 지겹지 않고 좋은 느낌으로 다시 볼수 있는 영화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생각에 잠긴다. 우리는 왜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할까. 그건 무엇보다 이야기때문이다. 멋진 배우나 특수효과에 혹해서 보는 것들도 있기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야기가 받쳐주지 않으면 제아무리 멋진 배우나 특수효과도 한계는 명백하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보고 듣고 즐긴다.
이야기의 구조
그런데 이야기란게 뭘까. 하나의 이야기에는 세부적인 작은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서로 모순되고 충돌하면서 각각의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할수 있게 만들어 주는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다면적으로 이해하게 해준다.
이 작은 이야기라는 것은 대개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어떤 인물로 나타내어 진다. 예를 들어 살리에리는 신에 대한 헌신을 다짐하면서 성실하게 일하는 음악가다. 그에게 있어서 삶의 어려움, 욕망은 신에 대한 헌신 그리고 그 댓가로 받는 성취로 극복되어진다. 성실하게 일하는 그, 욕망을 포기하고 남을 도우며 살아가는 그가 더 많은 것을 성취해서 신에게 그 영광을 돌리는 것이 바로 그가 살아가는 이야기, 그가 세상을 사는 방식이다.
그런데 여기에 다른 이야기 혹은 다른 삶의 방식이 등장하는데 바로 천재 모짜르트다. 천재 모짜르트는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뛰어난 재능으로 가득찬 인물이다. 음악 그자체 이외의 모든 것은 그에게 별의미가 없다. 그는 교황에게 공손하지도 않고 정치적 메세지에도 관심이 없다.
영화 아마데우스는 스스로 평범한 사람의 왕이라고 말하는 살리에리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말하는 신에게 반기를 들고 아마데우스를 죽이는 이야기다. 여기서 이 영화의 줄거리가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반영하는가는 사실 두번째로 중요한 문제다. 진짜 핵심적인 것은 아마데우스와 살리에리로 대표되는 두개의 이야기가 각각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 하는 것이고 그것들이 어떻게 충돌하면서 얽혀서 서로의 정체성을 보여주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각각의 인물들이 작은 이야기들을 대표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바로 하나의 이데올로기 혹은 이야기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혹은 나는 이러저러한 것을 좋아하고 이러저러한 것이 결핍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러저러한 것을 위해 이러저러한 것을 참고 희생하며 이러저러한 것을 달성하려고 노력한다라는 이야기다.
인간은 이런 이야기에 기반해서 기쁨을 누리고 고통을 참는다. 이야기는 가치판단을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자식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위험하게 만드는 아버지는 그것이 두렵고 싫으면서 동시에 그렇게 할수 있는 자신에 대해 가장행복해 한다. 그는 나는 아버지다라는 이야기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기쁨을 누리고 그것으로 인해 공포와 아픔을 극복할수 있는것이다. 우리가 아무런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삶이 너무나 권태롭고 공포스러울지 모른다. 이때문에 종교도 만들어지고 신화도 만들어 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영화를 볼때 관객으로서 우리는 그 각각의 인물들 혹은 작은 이야기들을 보고 들으며 다시 한번 자신의 이야기를 점검한다. 다시한번 이 세계에서 자신이 속해있는위치에 대한 이야기가 점검되어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삶이 보다 즐거워지고 견딜만한 것이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것이 인간은 이야기로 살아가고 이야기를 소비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의 의미다.
그물과 같은 이야기
우리 모두는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마치 아마데우스라는 영화안에 여러가지 인물이 등장해서 그물처럼 얽히는 이야기를 보여주듯이 여러가지 이야기가 연결되고 사방으로 얽혀있다.
아마데우스에서도 모짜르트와 살리에리의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모짜르트의 아버지의 이야기도 있다. 그를 사랑했던 아버지를 잃고 모짜르트는 방황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이 뭔가 중요한 것을 결핍하고 있었고 그 결과 아버지를 허망하게 잃었다는 것을 그가 느끼기 때문이다.
영화와 현실은 당연히 차이가 있는데 대개 우리는 그 모든 인물들이 대표하는 이야기를 동시에 우리 머릿속에 가지고 있으며 그 이야기들은 그 영화속의 인물들이 대표하는 것처럼 그렇게 정교하고 집요하지 않게 존재한다. 우리는 대개 비극의 주인공도 희극의 주인공도 아니고 천재도 아니며 이야기책에 남을정도의 대단한 애정을 보여주는 부모나 자식도 아니다.
말하자면 영화나 문학작품에 나오는 각각의 인물들이 서로 얽혀있는 모습이 기나긴 끈들이 좌우로 짜여진 그물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정신상태는 짜투라기 실들이 이러저리 얽혀서 간신히 이어져 있는 마구 구멍이 난 그물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심한 경우는 그 그물은 찢어지고 말며 그런 사람의 정신상태는 매우 불안정할수 밖에 없다. 관계에 대한 감성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에 대해 자신감이 없고 결국은 오늘은 어떤 것을 매우 중요시하다가 내일은 그걸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그다음날은 미칠듯이 후회하는 그런 나날이 지속되게 될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인간들은 대부분이 준비되지 않고 과거에서 날아온 원시인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들의 삶이 매우 단순한 그 시절에는 그들의 그물은 좁은 공간에서 튼튼하게 연결되어져 있었지만 현대를 살아가게 되면서 그들은 이제 감당할수 없는 넓은 세계를 준비없이 살게 되었다. 그래서 이것저것을 배우지만 배우는 속력보다 훨씬 더빨리 다양한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고 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상황을 겪게 되기때문에 그가 가진 이야기구조는 매우 매우 부실하고 구멍이 많이 난 불안정한 것이 되고 말기 쉽다.
21세기에 나타난 원시인은 모든 것이 낯설다. 기껏 배운 몇가지 잔재주로 아닌척하고 겉을 가리지만 실은 속으로는 불확실한 환경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으로 가득차 있는 경우가 많다. 지속적으로 사기를 당하고 있는 느낌, 뭐가 뭔지 모르면서 끌려가고 있는 느낌이 끊이질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매일 매일 밥을 먹고 숨을 쉬듯이 이야기를 소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뉴욕커들의 사랑과 삶을 그린 미국드라마를 보거나 하이킥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혹은 막장드라마를 보거나 사랑에 대한 영화를 보면서 예능 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이 서로 치고박는 것을 보면서 아 이게 요즘 세상사는 방식이 구나하고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들을 만나서 서로 온기를 나누며 완전히 쓸모없는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서로의 이야기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아파트평수가 이정도가 안되면 안된다던가 옷이 이래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우리는 괜찮다는 메세지를 서로 주고 받아들 필요가 있다. 그 인간사회가 비록 매우 잔인하고 비정한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것은 마치 위에 구멍이 뚫려가는 노동자가 매일 위통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마취제를 먹는 것과 같다. 때로 위는 완전히 고장나고 말며 마취제가 듣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십중팔구는 그사람은 죽는다. 삶을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은 삶을 유지하지 못한다. 오늘날 한국의 자살률은 기이할정도로 높다. 세계1등인것도 모자라 2등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1등이다. 이것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맺는말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은 무한대로 뻗어가며 무한대의 연결고리를 가진 그물이다. 그 그물의 끄트머리들이 어딘가 안정된 땅에서 우리를 지탱해 줄때 우리는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수가 있다. 그런데 그 안정성을 얻는다는게 보통 일이 아니다.
그걸 어렵게 하는 일중의 하나는 그물을 충실하게 짜나가려고 하다보면 우리는 영원히 손바닥만한 그물밖에는 가지지 못하게 된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손바닥만한 공간에서만 튼튼할뿐 거기를 벗어나고 나면 아무 근거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므로 우리는 굉장한 공포를 느끼게 된다.
이것은 지식의 무한함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전문화되어 아주 좁은 세상에서만 살때 그래서 그저 주부일뿐이고 그저 엄마일 뿐이고 그저 사원일 뿐이고 그저 딸일 뿐일때, 우리는 저밑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공포의 냄새를 항상 맡는다. 그래서 자신을 확대해보고자 이런 저런 공부를 하려고 하지만 지식은 무한하고 안정을 주는 언덕은 어디에 있는 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다. 우리가 닥치는 대로 공부한다면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게 다 흩어지고 말뿐이요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저 잡학박사가 되어 이리저리 이야기를 할수 있을뿐 사실 내가 하는 이야기는 전부 어떤 원리가 없이 즉흥적으로 하는 이야기라는 것에서 벗어날수가 없다.
천재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 택할수 있는 길은 두가지밖에 없다고 나는 느낀다. 하나는 믿을수 있는 사람들과 얽혀서 안정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혼자라고 느끼지 말고 혼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남편이 있고 아이들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가족인것은 아니다. 그저 가끔 수다를 떤다고 해서 친구인것은 아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지지해 줄수 있는 가족과 친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사실 이것만해도 쉬운 일이 아니며 노력과 중심이 되줄 사람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집안으로 말했을때 가장이랄까. 친구그룹이건 가족이건 동네의 커뮤니티건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하고 그 중심이 되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랬을때 질서와 공평함을 믿을수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첫번째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길고 긴 한줄기 이야기를 얻는 것이다. 하나의 길고 긴 이야기가 그물이 될수는 없다. 그 이야기에서 가지가 쳐져서 나갈 부분이 끝이 없다. 그러나 믿을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를 얻으면 그 이야기가 다른 것들을 지탱해줄 디딤대가 된다. 우리는 그걸 기반으로 우리정신상태의 안정을 찾는다. 천재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 할수있는 것은 이 한줄의 이야기라도 얻는 것이 아닐까.
한줄의 이야기는 일종의 장인정신이나 예술이 된 삶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어떤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할수 있다. 우리가 아쉬웠던 것, 우리가 결핍한 것에 대한 어떤 질문에서 그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그 질문을 놓지않고 계속 추구할때 우리는 하나의 긴 이야기를 얻게 된다. 어떤 사람은 농사를 짓다가 그런 이야기를 만들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은 가수로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노래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그 이야기를 만들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과학자로 생각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만들고 어떤 사람은 어느 동네에 대한 애정을 실천하다가 그런 이야기를 만든다.
내가 강력하게 추천하는 책중의 하나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란 책인데 이런 책이 바로 그 한줄기 이야기에 대한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에 대해 꼼꼼하게 산다는 것은 필요하지도 않고 현실적이지도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수천권의 책을 책장에 꽂아 놓고 사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에 다 대충일때 우리가 단한번도 아주 몹시 진지해지질 못했을때 그 사람은 정신적인 위기에 있기 쉽다. 그 혹은 그녀는 단한줄의 긴 생명선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물이 끊어져 너덜거리면 사람은 죽는다. 우리는 호모 이야기 쿠스다. 이글을 읽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찾을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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