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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를 기다리는 사람들, 진중권강의를 듣고

by 격암(강국진) 2011. 10. 13.

% 2년전에 쓴 글입니다. 최근 진중권이 곽논현 사건 논쟁 끝에 논객사퇴를 선언했다지요. 이건 진중권의 강의녹음을 듣고 소감을 쓴 것입니다만 요즘 시절과 관련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다시 읽어보고 올립니다. 


진짜를 기다리는 사람들


머리말

진중권 씨가 호모 코리아나쿠스라는 그의 책을 기반으로 강의를 한 것을 들었습니다. 전반적으로 그의 주장의 결론 부분들에 대해서는 크게 이의가 없으면서도 왠지 완전히 공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가 말한 것과 관련이 있으면서도 없는 그런 다른 주제로 생각이 흘러다녔습니다.

두 가지의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아주 당연한 것이라도 ‘왜?’라고 묻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과 돈이나 명성 등의 눈앞의 이득만을 소중히 하는 배금주의 세속주의는 배격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윤리적 태도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진중권 씨의 말을 들으며 느낀 것이며 그래서 나는 온전히 강의에 집중할 수 없었다는 생각입니다.

진중권 씨가 그런 강의를 한 것은 꽤 예전의 일이므로 이제 와서 진중권 씨의 말이나 행동에서 뭔가가 틀렸다거나 맞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그 안에서 우리 사회에서 개혁을 말하는 사람들,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저 자신도 자주 빠져왔던 함정입니다. 진중권 씨는 유명인이기에 예로서 등장하고 저에게 생각해볼 계기를 주었던 것이지 진중권 씨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진짜 합리주의

종종 사람들은 말과 행동이 모순됩니다. ‘이성이 중요하다’라고 외치고 이성주의를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만약 그가 왜 이성이 중요한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별로 없이 ‘이성이 중요하다’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종교교리처럼 말한다면 그는 이성주의에 대해 매우 비이성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합리주의를 주장하면서 여러 외국 학자들의 개념을 도입하여 그것에 매달리는 것은 오히려 반 이성적 행동일 수 있습니다. 즉 어떤 생각하는 방법이나 틀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진중권 씨의 예를 들자면 국가주의나 전체주의적인 태도를 비판하면서 아주 쉽게 ‘한국인은 이렇다’라는 말을 쓰는 것을 느낍니다. 뭔가에 쉽게 딱지를 붙입니다. 그는 외국인을 말할 때 국가에 대해 묻고 그것을 기준으로 행동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한국인은 이렇다는 표현을 너무 자주 쓴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한국에서 하는 짝짓기 놀이가 잘못된 문화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억지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게다가 근대니 전근대니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이런 틀로 한국을 본다는 것 자체가 이제는 좀 벗어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답답함이 느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이것은 서양의 사회 변화모습을 분류하고 그것을 발전단계로 봐서 동양을 보는 방법입니다. 대개는 동양의 이러저러한 특징을 바탕으로 동양은 서양의 과거라는 결론이 내려지게 되는 시각입니다.

제가 보기엔 이런 시각과 비슷한 시각이 유전학 쪽에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다운증후군이라는 말이 흔히 쓰이지만, 전엔 다운증후군을 몽골리즘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제대로 된 유전자 상태, 진보한 인간의 상태가 서양의 백인이며 뭔가가 잘못되면 그보다 하위의 몽골인들과 비슷하게 변한다는 인종적 편견이 들어간 이름 붙이기입니다. 후일 동양에서 근대니 전근대니를 따지는 일이 없어지고 나면 한국의 정체성을 논하며 근대니 전근대니하는 말을 하는 것을 비슷한 어처구니없음의 감정으로 말하게 될 날이 오리라고 봅니다. 한국에는 대한민국 이전에 조선시대가 있었고 그전에 고려가 있었던 것이죠. 우리는 서양의 어떤 것이 조선시대나 고려시대와 비슷하다고 결코 서양은 아직도 고려시대에 있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반대도 해서는 안 됩니다. 진중권 씨는 남이 만들어낸 매트릭스에 빠져선 안 된다고 말하면서 강의를 마치는데 과연 자신이 말한 것들이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말들이 아니었을지 생각하게 만듭니다.

진정한 합리주의는 당연한 것에 대해 왜냐고 묻는 것이며 유명한 사람들이 하는 말도 왜 그런가라고 이해하려 하고 이유를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유럽이나 미국의 유명한 사회학자나 과학자가 뭐라고 했다고 해서 그러니까 그것은 옳은 것이며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고 시작하자는 것은 합리주의가 아닙니다. 특히 사회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 대단한 지성은 한국에 적용되지 않는 다른 문맥에서 말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진보는 대중성이 없거나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비합리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반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런저런 유명인사들의 주장과 개념과 외국어 낱말을 나열하는데 익숙한 사람은 대화의 상대를 무시하는 사람이거나 합리주의자가 아닙니다. 자기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거나 남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서 가장 많이 허우적거리는 것이 자기 자신이면서 남을 해방시키겠다고 합니다. 이성주의를 주장하면서 악습이라는 권위를 다른 권위로 대체하려고 합니다.

당신이 선하다고 믿는 것에 대하여

두 번째로 윤리적 태도입니다. 이것은 무언가를 주장하는 데 있어서 이것이 좋은 것이다. 이것이 옳은 것이다, 선한 것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연한 게 아니냐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겠습니다만 이 당연한 것에 대해 왜 당연할까 하고 잠시 생각해 봅시다.

피 터 싱어(사진)가 쓴 실천윤리학은 윤리라는 문제에 대해 철학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쓴 윤리적 논의입니다. 거기에 맨 처음 나오는 말이 논리적으로 윤리의 근거를 확실하게 만들려는 수많은 서양철학자의 노력은 아직까지는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윤리는 수학이나 과학처럼 명확한 토대에 서 있지 않습니다. 윤리철학의 전문가가 책을 쓰며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이걸 하면 돈을 많이 법니다’라는 말은 돈을 숭배하는 저질 가치관적인 시각일지 몰라도 사실적인 주장입니다. 벌거나 벌지 않거나 이니까요. ‘착한 사람은 이걸 합니다’라던가 ‘이게 좋은 겁니다’라는 주장은 그에 비하면 보다 옳을 수는 있으나 보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즉 검증되지 않은 어떤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당연한 거 아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윤리적 기반이 뭔지도 확실치 않습니다. 외국문화 추종자인 경우 그 기반은 미국사람은 이런다, 프랑스 독일사람은 이런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것일까요. 윤리와 과학을 혼동하는 경우 세상에는 사상의 폭력적 광신도가 나타납니다.

진중권 씨의 말을 듣고 있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를 포함한 운동권세대나 한국의 진보들은 독재나 배금주의와 싸우다 보니 생긴 일일 수 있습니다만 무엇 무엇이 옳다, 착한 일이다, 윤리적으로 소중하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그저 독일에서는 다릅니다. 일본에서는 다릅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에서 그칩니다. 저는 이것을 ‘결백만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돈보다 소중한 게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도덕적 윤리적 우위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외국을 기준으로 사고하는데 익숙한 것은 합리주의가 아니라 신 대신 외국을 그 자리에 세운 윤리주의입니다. ‘왜’가 없는 것이죠.

저는 배금주의를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덕적 윤리적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주장 가지고는 뭔가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둘을 적당히 섞는 것도 아니고 다른 차원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사실 사람들 윤리 이야기하면 찬성하면서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재테크나 내 자식 잘 키우기 이야기하면 솔깃합니다. 윤리적으로 나쁜 사람이 되자고 주장해서는 안 되지만 윤리를 따지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고 설득력도 적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평등과 자유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로워야 합니다’라고 말할 때 공식석상에서 무슨 바보 같은 소리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그냥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아주 당연한 것에 대해 왜냐고 물어봅시다. 왜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롭습니까.

그런 주장의 대표격인 미국에서 그 질문을 한다면 반드시 인용될 것은 아마도 미국의 독립선언서일것입니다. 독립선언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실이 자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만들어졌으며 신으로부터 빼앗을 수 없는 권리들을 받았습니다. 그것들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포함되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보듯이 신을 언급하지요. 유럽 윤리의 중요한 토대는 하나님입니다. 그걸 우리는 그냥 받아들일 수 있는 걸까요? 미국사람이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할 때 우리가 당연하지 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하다는 것일까요.

물론 서양에서는 자유에 대해 신만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존 바그넬 베리가 쓴 책, 사상과 자유의 역사에서 자유는 이렇게 옹호됩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토론하고 의견을 나눌 때 인간의 지식은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바로 서양역사 자체입니다. 서구는 지식의 축적과 발전으로 세계를 제패하고 부자나라가 되었으니까요. 합리주의의 적이 신학적 권위주의이었으므로 이것은 신을 배제한 자유의 옹호논리입니다. 자유가 우리를 번영하게 만드니까 그랬었으니까 자유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윤리적 시각이 아니라 실리적 시각입니다.

아 복잡하게 이유 따질 거 있나. 결론만 외우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우리는 종종 느낍니다. 실제로 아주 엄밀하게 증명되는 수학이나 과학적 사실에 대해 대부분의 일반인은 그런 태도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개념이나 주장은 그런 게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럴듯해 보이는 것을 그냥 받아들이면서 이야기하면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 같아도 맹목적 종교신자와 크게 다르지 않게 됩니다. 물론 이것도 힘든 것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사람들끼리 의견을 나누고 스승을 골라 의견을 경청하는 것이 현실적 방법입니다.

맺는 말

명문화된 규범을 지키는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윤리의식, 이정도를 가지고 우리는 좋은 세상을 만들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윤리 즉 삶의 질을 추구해야 합니다. 기계적 논리뿐만 아니라 감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윤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가치관이 매우 비슷한 사람들 안에서 만으로 자제해야 합니다. 그럼 윤리 말고 이렇게 하면 부자됩니다로 가야 하는가. 그렇습니다. 단지 더 높은 수준에서 그렇습니다. 단기적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렇게 해야 번영하고 돈을 번다고 해야 합니다. 돈을 버는 목적이 뭔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고 해야 합니다. 윤리가 아닙니다. 돈을 어떻게 벌어서 어떻게 써야 나의 행복이 최대화되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자식들이 잘 크고 부부는 화합하여 행복해지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미 이런 것은 우리 사회 안에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골의사 박경철 씨는 재테크의 전문가이지만 단순히 돈이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피터 드러커 같은 사람이 쓴 경영학이나 자기 관리에 대한 책도 읽힙니다. 아이들 교육방법에 대한 책은 언제나 인기입니다.

그런데 진보적 지식인이나 진보적 정치인, 진보와 개혁을 믿는 사람들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근거가 희박한 낭만적 교육관이나 윤리주의를 외치고 그저 따라갈 뿐입니다. 어떤 고상한 이론을 말하거나 어떤 지적 권위를 내세우거나 완벽한 순결주의를 외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사실 그들은 시대를 앞에서 이끄는 게 아니라 뒤에서 따라가면서 자신이 사회를 개혁한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산업이나 과학기술이나 세계조류의 변화에는 무지하면서 자신이 사회를 개혁한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경제를 살릴 거냐는 질문에 잘하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박정희 시대식으로 국민들이 단결하여 열심히 일하면 된다고 말하는 한나라당 계열의 정치인들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 있질 못한 것이 현실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진짜로 한국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조용히 책 읽고 공부하고 자기 일을 하는 것이죠. 자기들을 불러낼 만한 진짜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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