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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의 자리와 윤리적 각성

by 격암(강국진) 2011. 11. 8.

요즘 FTA관련 찬반 논쟁도 많고 그거 아니라도 이런저런 일로 사람들 머리 아픈일이 많습니다. 황우석때문에 줄기세포공부하고 천안함때문에 물리학공부하는 사람들 많지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또한 야권 연대라던가 하는 이야기들을 보면서, 저는 새삼 사람들이 합칠수 있는 것, 합쳐야 하는 것은 합치지 않고 나누고 미룰수 없는 것은 너무 쉽게 나누고 미룬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에는 윤리나 아름다움, 가치를 논하는 주관적 정신적인 측면이 있고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사실들을 논하는 객관적 물리적 측면이 있습니다. 이중에서 후자의 것은 객관화되고 표준화 되기 때문에 일을 나눠서 나중에 합칠수가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꼭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결국 복잡한 현대사회의 일이란 인간들이 복잡한 일을 분업해서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현대사회는 많은 투자를 해서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정신적인 측면은 너무 간단히 넘어갑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가치판단을 대중이나 사회에 전가시킵니다. 그냥 남따라 하거나 누더기같은 규칙을 통해 가치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판단의 기준에 대해, 그 일관성에 대해 치열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그저 엉성한 상식을 이리저리 얽어맨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같습니다. 반면에 사실관계의 문제에 있어서는 전문가들을 신용하는 대신,  자기 손으로 다 하려고 하며 거기서 치열하게 사실을 따지면 올바른 결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커다란 오류입니다. 사실 자기성찰, 자기의 가치판단의 기원을 따지는 일은 남에게 미룰수 없이 치열하고 엄밀하게 해야 하는 일이며, 객관적인 사실의 문제는 사회적 신용의 문제만 없다면 전문가에 어느정도 의존하면서 자신을 편하게 살도록 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자기 마음은 남에게 노예로 주고 시장에서 싼값에 파는 신발은 집에서 직접 만들어 신어서는 안됩니다. 이걸 거꾸로 하는것이 오늘날 많은 사회적 문제의 뿌리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제의 복잡성


사실 문제는 세상일은 주관적 측면과 객관적 측면이 분리가 안되기 때문에 복잡해 지는 면이 있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 서울에 백층짜리 건물을 지어야 하는가라고 했을떄 전문가가 그게 어느정도의 비용이 들고 도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분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종국에 그래서 우리가 그걸 지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결정할때는 그건 객관적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판단의 문제이기 때문에 지식적인 전문가가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고 할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실 사회적인 문제가 터질때마다 사람들이 열심히 법률서적 읽고 생물학 물리학 공부하는 일은 매우 소모적이고 비능률적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 신뢰가 매우 많이 파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전문가가 이러저러하다는 것은 사실이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그냥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생각을 진행 시킬수가 있어야 하는데 항상 이상한 전문가가 등장하여 결국 전문가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는것이 오늘날의 한국입니다. 


결국 자기 손으로 직접 공부하고 이해하여 전문가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 제대로된 사고를 할수 없다는 것은 한국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때문에 4대강건설같은 것을 논하는데 있어서도 턱도 없이 전문적 소양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과 환경적 영향에 대해 무리한 전망을 내놓고는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합리주의가 사망한 상황이라고 밖에 말할수 없으며 공부하는것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사람과 사람이 협동해서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가는 게 아니라 모두가 똑같은 것을 공부해서 1등이 혼자서 모든 걸 결정하는 시스템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똑같은 것을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가는 우리의 모습이 반복되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1등을 잘뽑았건 엉터리로 선발했건 승자가 독식하는 판단시스템은 애초에 엉터리입니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며 객관적인 사실들은 사실 누적되고 조합되기 위해서 정리된 사실들입니다. 못을 박자고 망치를 만들어 놓고 그 망치는 옆에 두고 손으로 못을 박는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열심히 학문적으로 분류해서 조합하기 좋게 사실들을 만들어 놓고는 모두가 각자 그것을 공부한다는 것은 효과적이지 못하며 위험한 일일수도 있습니다. 잘못하면 삼계탕을 어떻게 만드는가를 요리사의 의견에 따라하는게 아니라 요리의 요자도 모르는 대중들이 서로 토론하여 자기들 생각에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따라 삼계탕을 만드는 꼴이 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신용의 붕괴는 결국 사회전체의 붕괴입니다. 그런의미에서 뭐든지 불투명하게, 독선적으로 일을 처리해서 많은 신용을 붕괴시켜온 현재의 정권을 나는 정말로 싫어합니다. 그들은 어떤 의미로 한국 자체를 붕괴시켰다고 할수 있습니다. 


윤리적 각성


제가 기회있을때마다 하는 말입니다만 윤리적 각성 혹은 윤리의 문제라는 것은 결단코 우리 착한 사람이 되자는 것같은게 아닙니다. 이런 착오는 바로 자신의 윤리적 행위의 근거나 자기 가치판단의 일관성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이 무비판적으로 이러저러한 규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데서 생겨나는 일입니다.


즉 우리는 뭐가 옳고 뭐가 좋은 것인지는 알고 있다. 다만 우리가 윤리적인 의지가 약해서 그것을 따르고 있지 못하거나 인간은 본래 악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선을 행하자는 의지를 굳건히 하고 그걸 맹세하자. 이런 태도가, 이런 태도가 충분하다는 인식이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권위주의적 학교에서, 권위적 가정에서, 권위주의적 사회에서, 선생님이나 부모가 혹은 사회적 기득권이 노예들에게 주입한 생각에 불과합니다. 


윤리적 각성이라는 것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능력같이 논리와 객관적 진실을 넘어 있는 총체적 현실을 느끼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불가에서 득도를 위해 수행하는 것이나 기독교에서 신을 만나기 위해 기도하는 노력을 하는 것처럼 노력하고 고생끝에 달성할수도 못할수도 있는 것이고, 작은 세계를 차례 차례로 깨고 나와서 더 큰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지 뻔한 사실이 절대아닙니다. 특히 지식을 쌓는 문제가 절대 아닙니다. 


 귀가 먹은 사람들이 모여서 졸업식에 쓸 음악을 선택한다면 제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제아무리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과정을 거쳐도 제대로된 선택이 이뤄질리가 없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해 고민해 본적도 없는 사람이 국토개발이라는 문제를 제아무리 심혈을 기울여서 한다고 한들 그 개발이란 시작부터 잘못된 것일 것입니다. 


우리가 새만금 같은 환경문제를 일으킨 문제를 논할때 흔히 외국의 사례를 많이 드는데요. 이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실은 어느정도는 스스로 자기 가슴에서 가치적 판단을 할수 없기 때문에 자꾸 남의 것을 베끼려고 하는 것도 있습니다. 


무상급식을 해야하는가 마는가. 궁극적으로는 일본이나 미국이나 유럽에서 하고 있는지 아닌지가 중요한게 아닙니다. 우리가 국민소득이 얼마인가조차 결정적인 사실이 못됩니다. 중요한 것은 결국 우리가 지금 이순간의 상황에서 그 모든 이유와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걸 중요하다고 느끼는가의 문제입니다. 자식이 짜장면을 먹고 싶다고 하면 그걸 사줬을때 내가 하루종일 굶는 상황이 발생해도 그럴수도 있는게 부모마음입니다. 이건 논리적으로 잘못된 판단같은게 아니라 뭐가 중요하다고 느끼는가의 문제입니다. 


사실 인간사회에 있는 것중에 논리적으로 따지면 필요한게 뭐가 있겠습니까? 모든 가치나 질을 무시한다고 한다면 음악은 소음과 차이가 없고 누더기나 비싼 디자이너의 옷이나 마찬가지이며 경차나 수억하는 고급차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은 결코 논리나 사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실에 대한 선입견을 다 배제하고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이며 이것은 너무도 간단하고 쉬운 것이거나 남에게 미루거나 하는 게 아니라 각자가 죽을 힘을 다해 닦아야 하는 자기 수행의 문제인 것입니다. 


거꾸로 된 대처의 결과들


여기 한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친목계를 만든다고 해봅시다. 거기서 제일 중요한것이 공평하고 잘 검증된 회칙을 만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런 시스템적인 것은 2차적인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서로 서로를 인정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공동체로 뭉치겠다는 의지를 가지는 것입니다. 공통된 부분을 느껴서 서로를 믿고 사랑할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그저 서로에게 아무런 애정도 없는 한무리의 사깃꾼들일 뿐이라면 거기에 어떤 시스템을 도입하건 그 집단이 유지될리 없으며 시스템이 돌아갈리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궁극의 사이즈를 가진 신발이란 없지요. 자기 발에 잘맞는 신발이 있을뿐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 사람들이 어떻게 변해가는가에 따라 시스템이 좋고 나쁨이 거기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사람을 빼고, 예를 들어 한국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될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외하고 좋은 나라의 규칙은 이러저러한 것이다를 논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허무한 것입니다. 


요즘 야권통합에 관련되어 이따금 나오는 것이지만 충분히 강조되지는 못하는 것이, 통합이란 결국 감동과 감성이 핵심이되는 것이고 그걸 시스템으로 논리로 보완할뿐이라는 것입니다. 나꼼수를 광신도 집단처럼 비판하는 몇몇 진보세력의 비판은 이같은 것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공동체를 만들지도 못할뿐 아니라 어찌 만든다고 해도 결국 감옥과 같은 불편한 세상을 만듭니다. 그런 사람들을 동양에서는 흔히 덕이 없다라고 하지요. 논리만 있을 뿐 느끼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신용과 사랑이 없으면 어떤 사람들은 그러니까 우리 더 확실하게 검증하고 더 머리터지게 생각하자고 말하곤 하는데요. 공부하고 검증하고 하는게 잘못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신용과 신뢰와 사랑과 감성인것입니다. 길바닥에 쓰러져 우는 아이를 보면 일으켜 세워주는 감성인것이고 고민에 찬 이웃을 보면 신경써주고 말이라도 걸어주는 마음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어떤 도덕적 규칙을 실행하는 게 아닙니다. 모짜르트 음악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걸 즐기지도 못하면서 의무적으로 전부 씨디 한장씩 사라는 말이 아니라 그걸 듣고 감동받을수 있는 가슴을 기를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고 또한 매우 시급한 일입니다.


윤리적 각성이란 우리가 가진 모든 선입견들에 대한 검토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왜 그걸 그렇게 하는가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이러저러하게 사람들을 구분해서 대접하는가, 우리는 왜 결혼은 이렇게 하고, 집은 이렇게 사고, 주말은 이렇게 보내는가. 


그건 너무 어렵고 힘들고 난 안돼. 그거 아니라도 좋은 세상 만들수 있지 않아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제 한가지는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사람들 하나하나가 윤리적 각성을 하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가 더 좋은 사회로 발전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심지어 전문가적 지식도 활용을 못합니다. 전문가란 사실 사회적 신용위에 적응한 연약한 지식인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좋아진 만큼, 한국이 좋아질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음악을 사랑하는 만큼 한국이 음악을 사랑하고 한사람이 음식에 대해 더 많이 느끼게 된만큼 한국의 음식문화가 발전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석과 쓰레기를 구분할수 있는 감수성이 없는 사회가 지식으로 좋은 사회로 변할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흔히 두가지의 목소리만 가득한 것같습니다. 하나는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자는 노예적 도덕적 각성을 외치는 것이고 또하나는 더 확실한 지식과 논리로 좋은 세상 만들자는 시스템적 개혁자들의 목소리입니다. 그 두가지는 모두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있어 충분한 것이 못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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