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수능시험이 끝나고 예상 합격선이 발표되었다. 그 기사와 현재의 입시현황에 대한 기사를 읽어보니 대충 그런줄은 알았지만 오늘날의 대학입시의 현실이 참으로 혀를 차게 할 판이다. 그야말로 모두가 현실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같이 망하고 있는 형국이랄까.
입시의 당사자라면 뭐니 뭐니해도 수험생과 대학이고 그외에도 부모와 고등학교같은 곳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입시모습은 정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첫째로 수능시험이 대학입시에서 변별력을 상실했다. 의대에 들어가려면 예상합격선이 395점대 이상이니까 400점이나 되는 점수중에서 실수 몇개하면 의대를 갈만한 학생이 못가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실수란게 뭔가. 엄청어려운 문제를 시간내에 못풀었다고 하면 실력이라고 인정할만도 하다. 변별력이 상실된 수능시험에서의 실수란 그런게 아니다.
상황을 좀더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좀더 극단적인 경우를 만들어 보자. 수능시험이 400점 만점이 아니라 4천점 만점이고 더하기 문제 푸는 것 하나당 1점이라고 하면 어떨까. 더하기야 초등학생도 하는 것이며 계산기쓰면 잘 안하는 계산이지만 4천개의 더하기를 주어진 시간내에 하는 것도 능력은 능력이다. 즉 문제는 무척쉽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에 다풀라고 하면 속력이 느리거나 실수를 해서 만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우르르 나올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점수 좋은 사람을 인재라고 뽑아서 최고대학에 합격시키는 기준이 되는 것이 온당할까. 그렇게 뽑은 사람은 뭐에 재능이 있는 사람인가? 공장에서 단순조립공으로 재능있는 사람?
내가 든 예는 극단적이지만 사실 현재의 수능도 이와 정성적으로 다르지 않다. 현재의 수능이 변별력이 없다면 400점 만점 받은 사람과 390점 받은 사람의 재능차를 측정할수 없다. 그런데 390점이면 이미 유명대학 인기학과는 물건너가는 점수라고 한다. 수능은 도대체 뭘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수능을 좀더 어렵게 하자가 내 결론은 아니다. 만약 기본적 학력만 보는 것이라면 고등학교 합격 불합격만 결정하는 시험으로 아예 바꾸는게 좋을 것이다. 그럼 모든 고등학생들이 공부를 한다기 보다는 시험보는 기술, 문제푸는 기술만 반복적으로 연습하는 것이 줄어들 것이다. 사실 공부와 시험보는 기술은 서로 다르다. 시험은 각 문제에 시간을 배분한다던가, 검산을 어떻게 한다던가, 아예 너무 어려운 부분은 포기하고 맞을수 있는 부분에 집중한다던가 하는 여러가지 꼼수에 따라 점수가 차이가 날수 있고 지금처럼 변별력이 없는 상황에서는 이 꼼수가 대학을 결정하고 말수도 있다.
그런데 현실 사회에서 이 꼼수가 도대체 누구에게 도움되는가. 대학에서 학문을 공부할때 시험보는 꼼수가 도움이 되나 아니면 사회에서 사업을 하거나 연구를 할때 꼼수가 도움이 되나. 도움도 안되는 것에 집중하게 하는 교육시스템은 뭐하자는 것일까. 그냥 학생들의 인생을 낭비하게 하는 것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사실 기본적으로는 대학이 각자 자율적으로 자기 기준에 따라서 학생을 선발하게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가 들어갈 대학, 자기 아이들이 들어갈 대학을 못믿는다. 한국최고의 대학도 못믿는다. 신뢰가 없어서 그렇고 그걸 사람들 욕할 문제만도 아니다. 한국의 투명도가 그것밖에 안되니까 그렇다.
그러니까 전국의 수험생이 똑같은 시험보고 그 점수에 따라 대학을 선택할수 있는 학력고사 시험이 있었다. 이 시험은 변별력이 높아서 만점따위는 거의 나오지도 않는다. 이때의 한국교육이 정답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애초에 대학당국에 대한 신뢰가 없어서 꼼수가 나오면서 일은 비뚤어지기 시작했고 그러면 다른 곳에서 모순이 누적된다. 바로 대학서열화가 극심해 지는것인데 왜냐면 대학들의 개성이란게 있을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판단능력이 없는 대학이 한국대학인데 거기서 개성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니까 더더욱 무슨 사회계급처럼 명문대 출신과 비명문대출신에 대한 차별이 심화된다.
그 모순을 풀어보고 새교육을 시킨다고 이리저리 시스템을 뒤흔든 결과는 그럼 어떤가. 한번 잘못만들기 시작한 요리를 고쳐보겠다고 다른걸 넣다가 점점 잡탕이 되는 것을 보는 느낌이다. 그때 그때 문제점에 대해 누더기로 시스템을 고치고 결국 신뢰의 문제가 해결나지 않는 상황은 상황을 점점 악화 시키기만 한다.
수능이 등장하고 문제가 점점 쉬워지기 시작했다. 내신에 논술도 등장했다. 수시도 등장한다. 즉 대학입시가 점점 더 복잡해 졌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 복잡한 시스템은 그야말로 도둑의 천국이다. 그런데 지금의 대학입시가 그렇다. 온갖 규제가 존재하면서 그렇다고 뒷구멍이 없는 것도 아니다. 시스템이 복잡하니까. 사람들은 열심히 이런저런 스펙을 쌓아서 시스템의 구멍을 뚫어보려고 노력한다.
이런 상황에서 빽없고 가난한 집 출신의 아이들은 정확히 변호사 고용할 돈도 없는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복잡한 사법제도하에서 겪는 사기를 당한다. 잘나가는 사람들 자식들을 보면 군대 안간 사람이 엄청 많지 않은가. 그게 그들은 그럴수 있는 정보와 돈이 있기 때문이다. 그걸로 복잡한 시스템에서 승기를 잡는다. 가난한 사람들은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실로 억울한 일을 당해도 도움을 못받을 뿐만 아니라 도대체 어디가서 뭘해야 도움받을수 있는가 조차가 요지경이다. 부자들은 뭘해도 자유인것같은데 가난한 사람들은 숨만좀 쉬려고 하면 이런 저런 법때문에 안된단다.
이런 현실이 초중고 시절부터 시작하는 나라라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학생들은 이젠 인간이 감내할수 있는 경지를 넘어선 학업에 치인다. 학력고사시절, 승부는 단순했다. 시험만 잘보면 되니까. 청소부의 아들이 참고서만 가지고 공부해서 서울대 법대 진학한다는 미담이 그때는 가능했다. 그때의 경쟁이 노래방에서 노래자랑하기 같다면 지금의 경쟁은 각종 매니지먼트 회사가 스타뒤에 붙어서 경쟁하는 연예계같다. 다시 말해 스타만 뛰어난건 의미가 없다. 옆에서 온갖 매니지먼트를 큰돈을 들여서 붙어줘야 같은 무대위에 설수가 있다. 개천의 용들에게는 혼자서 해결할수 없는 너무나 많은 일들이 주어진다. 혼자서 어떻게 경력을 쌓겠는가. 수능만점받아도 확신이 안서는 판에서 어떻게 노력으로 이걸 뚫을수 있는가.
백번 양보해서 이런 변화가 대학서열화의 폐해나 어려운 대학입시 공부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충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그럼 이런 시스템이 대학에는 도움이 되나? 영어를 제외하면 학생들의 학력이 이전보다 확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그럴수 밖에 없다.
아 단순한 문제 풀이 능력이 아니라 창의력있는 인재를 기르기 위한 것이었다고? 내 개인적 감상을 말해주자면 웃기지 말라고 하고 싶다. 대학입시가 쉬워지니까 문제풀이의 기계로 변하는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게다가 다른 인문학적인 소양은 더더욱 형편없어졌다. 애초에 고금의 명작을 다이제스트 판으로 수십권씩 읽고서 외우고 논술을 쓰는 연습을 하는 시스템은 인문학이 뭔지 그 기초자체에 무지한 상황이다.
그런 시스템이 기르는 인간이란 실속은 텅텅비고 그저 말이 이어지는지 그렇지 않은지 깊은 생각도 없이 말만 잘하는 인간이다. 왜 요즘은 유치원생도 부동산 가격등락이나 성형수술, 다이어트 같은거 걱정한다고 하지 않는가. 단어는 머리에 있되 그것에 대응하는 삶의 경험과 내적성찰이 없다면 그건 아는게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경험하기를 더 어렵게 한다. 온갖것에 대해 다 판단을 마쳐버리게 하니까. 사랑한번 해보기 전에 사랑이 뭔지 다 알고 있고, 제대로 어떤 일에 열정을 쏟아보기도 전에 인생이 이렇다 저렇다 이미 다 알고 있고, 정치가 뭔지도 이미 다알고, 사회가 뭔지도 이미 다 알고, 어른들이 뭔지도 이미 다알고.
뭐든지 이미 다아는 얄팍한 인간들이 무슨 열정이 있어서 학문을 추구하고 진정한 가치있는 일을 위해 뛰겠는가. 일찌감치 대학은 취업을 위해서 가는 것이고, 인생은 돈벌어 쾌락을 즐기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결정 다 내렸는데 무슨 삶에 대한 질문이 있어서 그걸 파고들 것인가. 이런게 창의력있는 사람들이고, 미래의 인재라고? 내 주관적인 느낌으로는 한국의 젊은 세대는 다양성과 창의성이 더더욱 떨어졌다. 박원순을 보라. 그가 최고의 교육현장이라고 말한 것은 대학1학년때 구속당하고 들었갔던 책 읽던 감옥이었다.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어떤 가치를 위해 움직이고 있을때, 개인의 창의성은 발화한다. 그런데 일찌감치 초등학교시절부터 미래 다 정하고 인생이 어떤 건지 다 정해놓고, 머릿속에 온갖 잡동사니 단어들만 아무런 성찰없이 집어넣고는 그런걸 창의성 교육이라고? 아예 한국의 대학을 전부 문닫고 대학원만 남긴후 알아서 경험쌓고 대학원에 오고 싶은 사람은 나중에 오라고 하면 창의성이 훨씬 더 늘어날 것이다.
나는 젊은 세대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이 측은하다. 그들은 안철수 박경철 청춘콘서트 같은데서 그나마 빛을 보려고 한다. 가치를 말하는 선배, 부모 세대를 갈구하지만 한국 사회 어디를 둘러봐도 그런 사람 드물다. 그저 냉정히 친구가 굶어도 도시락나눠주지 말고 니공부나 신경써서 좋은 취직자리 잡으라는 식의 부모만 많을 뿐이다. 그런데 그러면 삶이 무의미해지고 삶이 무지 심심하고 외로워진다. 그러다 충격받으면 죽을 만큼 외롭다.
삼성같은데서 일하고 검사나 판사가 되고 의사가 되는게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데 나이든 세대는 모르겠지만 젊은 세대가 대기업에 취직하고 판검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교수가 되면 그안이 또 한심하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앞이 캄캄한 것이다.
안타까움에 글이 길어진다. 정리하고 끝내야 겠다. 문제의 근원에는 신뢰의 문제가 있다. 사학법통과로 천국이 왔을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교육기관들의 운영투명화와 '정신적' 독립으로 신뢰의 문제를 해결하는게 첫번째 걸음중의 하나일 것이다.
또다른 문제의 근원에는 사람들이 삶과 교육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일이 있다. 이를 위해서 닐포스트만의 교육의 종말을 참조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내 독후감은 여기에 있다. http://blog.daum.net/irepublic/7888100) 모두가 부동산 투기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에서 안정된 주거환경, 사람을 위한 주거환경을 만들어 내는 시스템은 존재할수 없다. 아무도 학문에 신경쓰지 않고 졸업장 얻어서 취직하는 것에만 신경쓰는 사회에서 제대로된 대학문화라는게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본래 이상적인 것은 최소한의 시스템, 최소한의 복잡성을 가진 규칙만 존재하고 나머지 모순과 어려움은 인간의 유대로 해결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대학입시에서 대학당국을 믿을수 없었던 문제를 온갖 기괴한 방법으로 땜질해온 결과 우리는 오직 가진자들만 통과할수 있는 괴물 시스템만 만들었다. 이거 다 치워버리고 교육의 본질이 뭔지, 대학의 본질이 뭔지, 신뢰의 중요성이 어떤 건지 본질부터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도 지엽말단적인 문제 내밀면서 더 새로운 시스템 시스템 외치는 사람 많은데 중요한 건 인간과 가치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울리는 약간의 시스템이다. 발이 없는데 좋은 신발 찾는건 웃기는 일이듯이 인간과 가치를 실종시켜놓고 좋은 교육시스템을 위한 법규 찾는거 하나마나한 일이다. 그 가장 좋은 시스템아래에서 현실에 존재하는 한국인들은 별로 행복하지 않을테니까. 그런데 한국인들은 자아찾기를 마쳤는가? 시스템 열심히 수리하면 되는가? 그걸 뒤집어쓸 자아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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