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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세상보기

세계 문화적 대안으로서의 한국

by 격암(강국진) 2011. 11. 13.

머릿말


한국은 세계를 무대로보았을때 작은 나라에 불과하다. 더구나 조선패망의 역사와 식민시대가 겹쳐서 대중들의 마음에는 많은 비하의식이 자리잡았고 정체성의 혼동도 상당한 편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어려운 점들을 제쳐놓고 좋은 점을 보기로만 하면 한국은 그야말로 세계문명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할수 있는 입장에 있지않나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와같은 점을 우선 하나를 지적하면서 시작할수 있겠다. 그것은 도대체 서양을 제외하고 이 지구상에서 민주주의 비슷한것을 할것같거나 할수 있는 나라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일본을 보자. 내가 보기에 일본은 민주주의국가가 아니다. 다만 그 형식에 있어서 민주주의를 하고 있을 뿐 국민하나하나의 내부적 심성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민주주의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성공적인 정치체계인 동시에 실은 유럽문화 특유의 특수성을 가진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돌고래의 수영법을 호랑이가 제아무리 돌고래의 수영법을 흉내내더라도 돌고래처럼 수영할수 없듯이 다른 문화적 환경을 가진 나라가 민주주의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만약 민주주의를 할수 있다면 실은 그 사회는 서구의 민주주의를 능가하는 사회를 구성할 잠재성을 가지고 있을때만 그러할수 있다. 더 뛰어난 것이 더 불량한 것을 재현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더 열등한 것이 더 뛰어난것을 재현할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주의는 그 핵심에 있어서 형식이 아니라 즉 법이나 시스템이 문제가 아니라 문화고 인간의 정신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헌법을 배끼는 것만으로는 민주주의를 할수 없는 것이며 삶의 양식과 가치적 선택, 윤리적 기반이 민주주의를 할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데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


그렇다면 메이지유신이후 세계대전을 일으킬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던 일본, 2차세계대전이후 세계 경제1,2등을 다투던 일본이 왜 민주주의국가가 아니라는 것일까. 일본은 한마디로 민주주의로 나아갈 만한 정신적 혁명을 거친적이 없다. 일본은 잘짜여진 기계로서 대단한 생산성을 보여주었을 뿐이며 그 시스템의 한계가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지금 일본을 질식하여 죽게 만들고 있다.


미국이 일본의 문을 열무렵, 그리고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진정한 하나된 일본으로 태어날 무렵, 일본은 사실상 고려시대 초기처럼 각종 호족이 지방을 각각 통치할뿐 거대한 하나의 나라를 이룰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실질적 윤리적 덕목이란 그저 지역장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하고 은혜를 입으면 갚자는 정신이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 일본이 외세의 압력을 받아 하나된 일본으로 만들어졌을때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전체 일본의 가치적 판단을 담당할 근본이었다. 그것은 개개인의 윤리적 각성으로 이뤄진 시민의 연합으로 가지 못했고 결국 남은 것은 하나의 중심에 충성하는 천황제, 즉 천황을 신처럼 생각하면서 천황이 윤리적 판단을 대신해줄 것을 기대하는 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중앙집권적 국가는 도달해야할 목표가 명확할때 대단히 효율적일수 있지만 결국은 파멸하고 만다. 일본천황은 결국인간이기 때문이다. 결국 외세에 의해 생겨난 하나의 집단은 외세와 충돌하고 소멸하고 마는 파멸적 종말을 겪는다. 바로 세계대전의 패배로 천황이 무너지는 것이다. 


우리는 꼭같은 것은 독일의 역사에서도 본다. 독일역시 분열되어 있었고 통합이 이뤄지고 두번의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히틀러에 대한 이해할수 없는 충성의 역사를 보이며 대단한 문화적 사회적 역량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식적 물질적 역량도 중요한 것이지만 민주주의를 할수 있다는 혹은 나아가 더 뛰어난 정신적 역량을 가진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오직 그런 나라만이 높은 과학기술적 발전에도 나라가 망가지지 않고 지식을 축적할수 있으며 바로 미국이 특유의 프래그머티즘으로 그러한 일을 해냈기에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고, 오랜간 인류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미국의 퇴조는 확실하다. 그리고 퇴조의 핵심에는 미국문명의 윤리적 퇴락이 있다. 즉 이제 미국은 비윤리적인 전쟁을 통한 억압이 아니고는 자기시스템을 유지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으며 미국사회내부의 윤리도 세계에 모범이 되지 못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국가운운하면서 미국의 의료보험제도의 현실같은 것을 보면 저 나라가 어떻게 더이상 세계의 미래가 될수있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다. 


왜 한국은 특이한가


우리는 우리가 세계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던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인위적으로 최근에 만들어진 한글을 대대적으로 쓰는 나라라는 점, 유교적 이데올로기같은 고급한 이데올로기에 따라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졌다는 점 같은 것들을 대개는 사소한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한국이 별볼일이 없이 실패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러나 한국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조선의 역사는 완전히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될것이며 한국이 성공할것은 정해져있던 일이라고 말해질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공산혁명이나 미국독립전쟁, 프랑스혁명같은 것을 세계정치사에 있던 대단한 일로 기억하지만 실은 조선의 개국이 세계역사에서 더 크게 조명될지 모른다. 물론 한국이 크게 성공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조선은 단순히 힘센 세력이 힘으로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 사건이 아니라 공자의 이상향을 현실에 건설하겠다는 높은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국가세우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글의 창제나 지방관의 직접적 파견, 높은 예의와 법질서에 대한 존중등은 전에 없던 나라를 만든 것이며 그것이 얼마나 성공한 것이었건 간에 그 경험은 한국인들의 문화속에 누적되어 남아있기 때문이다. 유학이 대단해서도 아니다. 하지만 유학은 대단한 이데올로기들이 다가지는 보편성이 있다.


유학의 발원지는 물론 중국이다. 중국 문화는 물론 대단한 역량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미 세계경제순위2등인것은 물론 미래에는 미국을 제치고 세계 경제순위 1등을 차지할것이라고 예견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 유학으로 나라를 건국한 사례가 없다. 중국황제가 조선의 왕처럼 일일이 법도에 제약을 받은 적도 없다. 


중국은 민주주의를 할수 없다. 이것은 결정적인 약점이며 이때문에 독일이 그랬고 일본이 그랬듯 중국은 자멸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복잡한 시스템이 굴러갈수 있는 방법은 윤리적 자각을 가진 개개인이 자율적으로 전체적 시스템의 부분부분을 맡을수 있는 유기체적인 능력이 있어야 한다. 중국은 정보관리를 통해 자신들의 썩어가는 모습을 숨기려고 하지만 사실 가진자들은 마음껏가지고 외국으로 도망가서 살려고 하는 경우가 한국보다 훨씬 더 심한게 중국이다. 그저 못가진 사람들에게 애국주의를 주입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한국은 특이한 나라다. 유교적 이상국가의 건설시도라는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불교국가로서의 역사도 가지고 있으며, 서구의 문명도 가장 많이 받아들인 비서구국가중의 하나다. 즉 인류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던 여러문화가 단순히 책몇권들어온 것이 아니라 그 역사속에서 시험되고 융합되고 고쳐졌던 나라다. 


문화적 대안이란게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우린 여기서 문화적 정신적 대안이란게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좀 생각해 볼수 있을 것이다. 그걸 위해 일본을 보자. 


일본은 대단했지만 금새 사람들에게 세계적 문화의 대안으로서 가능성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결국 일본은 황제에 대한 충성이 그 윤리적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패전이후 천황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일본은 점점 속빈 강정처럼 썩어져 무너지고 있다. 


윤리적 중심의 문제가 무너진다는 것은 그 나라의 국민들이 겉으로 어떻게 보이던 삶이 공허하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여기 수재민에게 성금을 내는 행위를 생각해 보자. 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내부적으로는 다를수 있다. 하나는 그저 규칙을 지키고 명령을 지킬 뿐인 경우다. 돈은 내지만 수재민에게 대해 느끼는 바가 없다. 또하나는 개개인이 내부적으로 윤리적 감성을 발휘하여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돈을 내는 경우다. 이 둘은 크게 다르다. 일본에서 윤리의 중심인 천황이 무너졌다는 것은 일본인들이 규칙은 잘지킬지 모르지만 뭘하고 살아야 할지에 대한 가치적 판단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즉 자기가 스스로 느끼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일본에서 한때 지하철에서 목숨을 구하려다가 죽은 한국인이 크게 사회적으로 화제가 된적이 있다. 즉 자신의 그룹내부에서는 그렇게 상냥한 일본인들이지만 자신과 상관없이 자신의 윤리적 결단으로 행동을 취해야할 동떨어진 상황에서는 행동력이 없는게 많은 일본인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을 취하는 한국인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 일본인들은 유럽이나 미국같은 외국으로 나가면 종종 매우 바보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는데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판단의 문제다.


윤리적 중심이 무너진다는 것은 심하게 말하면 매국노를 양산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우익은 한류열풍같은것에 민감하다. 일본사회의 윤리적 허약함을 알고 있는 그들은 외국문화에 매료되었을때 일본인들이 얼마나 쉽게 거기에 정체성을 잃어버리는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다. 


윤리적 허약성은 결국 사회가 물질적으로 발전하면 더 큰 문제를 노출시킨다. 그 사회를 멸망하게 만든다. 그건 마치 나무로 만든 초정밀기계처럼 결국 무너질수 밖에 없으며 무너지기 전에는 사회를 이루는 부품으로서의 개인을 무리하게 억압한 나머지 인권억압과 기괴한 정신세계를 창출하게 된다.


문화적 대안의 참뜻


우리는 끝없이 미국이며 중국이며 인도며 유럽의 나라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무너져가는지를 논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동시에 우리의 마음속에는 그럼 한국은 그들과 다르다는 말인가. 한국은 그들보다 더 착한 사람들이니까 성공할수 있다는 말인가 같은 말이 나올수 있다.


문화적 대안이란 결코 착하다 착하지 않다같은게 아니다. 내부적 시각으로 보면 항상 자신들이 더 착하고 외부문화는 나쁜 사람들의 문화로 보이게 된다. 자전거와 자동차중 더 잘만들어 진 기계란 있을수 없다. 둘은 서로 다른 종류의 기계다. 더잘달리는 기계가 있을 뿐이다. 자동차는 자전거의 눈으로보면 가장 엉터리로 만들어진 자전거다.


결국 서구문명의 쇠락은 20세기 내내 이야기되었던 근대주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과학주의, 이성주의가 발달하면서 제국주의가 발달하고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가 발전한 서구의 역사는 이미 한세기전부터 파멸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실존철학이니 해체주의니 하는 철학들이 그런 흐름을 막으려는 시도였지만 그것은 결국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문화는 결코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상당수의 인간들이 공유하는 가치다. 따라서 서구의 석학들이 열심히 스스로 사고하고 인도종교며 불교같은 것에서 지혜를 빌어와 서구를 개량하려고 해도 그것이 자신들의 문화에 중독된 서구대중의 흐름을 막아낼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대전들을 막아낼수도 없었고 미국문명이 망해가는것을 막을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결국 거대한 땔감처럼 스스로가 스스로를 태워가면서 전부 재가 되는 길을 갈뿐이었다.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보다 더더욱 꿈이없고 그저 돈이나 주는 금융에 지원하고 대학원의 상당부분은 외국의 인재들로 채워지는 것이 그 예다. 결국 미국도 이런 저런 이민자로 채워져서는 자신의 문화를 거진다 잃고 말았다. 젊은 세대들도 미국인답지 못하고 이민자도 미국인답지 못하니 미국이 미국답게 존재할수는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문화적 대안은 어떤 의미에서 이미 제출되어져 있다. 그것이 생의 철학이고 유기체 철학이다. 문제는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있는 것은 문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도 몰수 없는 자동차는 자동차가 아니다. 이 문화적 대안을 실천하고, 개량해서 실질적인 것으로 만들어 낼만한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런 공동체가 있을때 비로소 세계는 진정한 문화적 대안을 가지게 된다. 나는 수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그럴수 있는 가장 유력한 공동체는 한국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을 믿는 이유


위에서 다른 나라 이야기를 쭉 쓴 것을 보고 사실 우리나라도 이렇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한국에 대해 비하의식을 가지는 것은 좋지 않지만 사실 한국은 문제점도 엄청 많다. 심하게 말하면 단숨에 벼락부자가 될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죽어버릴것인가하는 위기상황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죽던가 아니면 대단하게 살던가의 기로에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정체성위기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아직도 뜨겁다. 그 뜨거움이 한국인의 저력이다. 87년 민주화운동을 끝으로 한국 사회가 형편없는 보수성향으로 식어버렸다면 그것이 한국사회가 가지는 한계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아직도 뜨겁다. 아직 한국사회에 체념하지 않고 노력하고 감동하고 기꺼이 감옥에 가고, 직업적 위험을 무릎쓴다. 


이것의 바탕에는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이 있다. 우리는 선비의 나라의 후예다. 일본사람들은 대부분 우리나라사람들처럼 시시비비 열심히 안따진다. 중국인도 그렇다. 인도인도 그렇다. 한국인들이 한국인들의 대충주의를 말하고 분명 어떤 점은 그렇지만 형평성이나 윤리를 따질때 한국인들처럼 집요한 사람들이 없다. 일본인들은 돈계산을 확실하지만 윤리적 감성에 이르면 대충대충이다. 한국인은 여전히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면서 합리주의를 추구하려는 열망이 있다. 이것은 5백년을 그렇게 살았던 우리의 피에 존재하는 문화유전자의 차이다. 


또다른 문화적 바탕은 바로 앞에서 말한대로 우리는 서구문화를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유교와 불교, 도교의 전통도 같이 흡수한 나라라는 것이다. 한국드라마는 가족의 문제가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모순을 만드는가를 매번 파헤치고 있다. 그것이 대부분 그저 막장드라마를 만들뿐이긴 하지만 사실 이문제는 오늘날 세계가 겪는 문명의 위기적 문제다. 바로 서구를 망하게 하고 있다는 근대주의의 한계가 한국에서 피터지게 융합을 노리는 것이다. 합리주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공존을 도모할수 있는 유기체적 철학이 한국사회에 뿌리내릴수 있는 이유다. 


 한국사람이면 기독교신자라고 해도 색즉시공 공즉시색 한마디 정도는 들어서 안다. 이게 생각보다 대단한 것이다. 이해하기 어렵기로 유명한 하이데거의 철학은 한국사람이라면 친숙한 노자나 장자로보면 혹은 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마치 도나 공의 도리를 어려운 서양말로 억지로 설명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게 생각보다 대단한 것이다. 


서구문화와 동양문화를 그정점의 수준에서 동시에 가진 나라가 없다. 서구국가말고 일본제외하면 선진국수준에 도달한 나라가 한국말고는 없거나 드물기 때문이다. 있다고 해도 한국처럼 조선5백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가 아니다. 한국은 이미 불교와 유교의 싸움에서 어느정도 근대의 모순을 미리겪었다. 조선성리학이 조선을 망하게한 경직화의 문제가 이미 어느정도 근대화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망한 경험이 있기에 희망이 있달까.


맺는말


거듭 말하지만 미래는 모른다. 우리는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은 나라다. 어디가서 잘난체를 할수 있겠는가. 우리의 정체성은 지금 큰 위기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것은 변화를 결단해야 할 시기라는 것이다. 모두 새로운 철학으로, 스스로의 시각을 가진 철학으로 새로운 삶을 만들어서 나아가 통일도 하고 그 문화적 영향력을 세계에 퍼뜨리고 세계에 한국을 우뚝세우는 대단한 길을 갈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작고 보잘것없는 나라로 해체되어 버릴것인가. 한국의 비극은 한국만의 비극이 아니다. 세계의 비극이 될수도 있다. 한국을 빼면 더더욱 대안이 없는 것이 한국이기 때문이다. 



%P.S. : 이코노미스트가 한국을 다루는 What do you do when you reach the top?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에 대해 이렇게 썻다고 하는 군요. 


"South Korea is the only country that has so far managed to go from being the recipient of a lot of development aid to being rich within a working life."


즉 원조받고 살던 미개발국가중에서 유일하게 한세대만에 부자나라가 된 유일한 나라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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