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꼼수 비키니 응원사건은 여러 언론들의 도움과 일부 네티즌들의 도움에 힘입어 계속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실제 그 당사자인 비키니 응원녀는 사과를 원치 않는다는 말까지 했는데도 말이죠. 나는 이문제를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며 현재 한국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로까지 생각합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나꼼수를 언급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포용과 통합에 대한 글들을 몇편쓰기도 했습니다만 나꼼수 이야기가 계속되니 그에 대해 몇마디 써볼까 합니다.
우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는 이게 성추행적 발언이다 아니다 옳다 그르다, 사과해야 한다 아니다 같은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는 그보다 나꼼수 사건을 통해서 이제까지도 많이 있어왔고 앞으로도 많이 있을, 다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핵심은 서로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일의 핵심이 이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도 많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먼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저는 결코 다름을 다름으로 인식하고 무조건 포용해라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꼼수가 싫어졌다. 나꼼수 사과해라라고 말하는 것을 일률적으로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려고 하는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어떤 일들은 분명 범죄이며 사회적 처벌을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모든 것을 다름으로 생각하고 용서해라라고 말하고 싶은게 절대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개인의 느낌이나 주관적 사고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어떤 되먹임 작용이 일어나서 그 차이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확대 생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확대 생산은 결국 우리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만났을때 그 사람을 자꾸 고치려고 하게 만듭니다. 다양성을 죽이고 맙니다.
즉 99점짜리 음식도 있고 70점짜리도 있고 30점짜리도 있어서 나는 50점 미만짜리 음식은 안먹고 그 이상은 참고 먹는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 99점이건 30점이건 틀린 부분을 지적하고 그것을 고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99.9점짜리 음식이라도 거기서 틀린 부분을 발견하면 그걸 고치려고 소금을 더 넣는다, 허브를 첨가한다, 한번 더 끓인다 같은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심지어 바람직한 것이기도 합니다만 99점이라도 틀린 걸 개선하려고 하는 노력은 당연한거 아니냐 라는 것을 당연하다고 강조만 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왜냐면 음식의 맛도 심지어 그러하지만 사회적 현실이나 예술 작품, 한 인간이란 자동차 부품으로 조립되듯이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상호 의존하면서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노래를 똑같은 사람이 불러도 공연장소가 어디냐, 어떤 사람이 듣는가등 사소하다면 사소한 많은 것들에 의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노래를 듣고 아 이건 이게 나빠 하면서 고치려고 하는 노력은 때때로 좋은 것이지만 항상 자명하고 좋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가수가 더 좋아지겠다고 팬들이 나는 이랬으면 더 좋겠어요라고 하는 모든 주장에 맞춰서 자기를 변화시키면 그저 뒤죽박죽이 되고 아무 특성도 없고 장점도 없는 가수가 될뿐입니다. 가수는 열린 자세를 취하되 자신이 자신으로 남아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심지어 모든 국민들이 등을 돌리는 상황이 된다고 해도 말입니다.
문제가 나빠지는 방식
다름에 접했을때 문제가 나빠지는 방식에서 우리는 익숙한 것들이 반복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언제나 제일 큰 문제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사람들은 질문이 일단 던져지고 나면 그 질문의 답이 뭐냐는 것에 관심을 둘뿐 애초에 그 질문이 100% 올바른것인가하는 것을 분석하는 일에는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사회적 이슈가 될때 항상 질문은 암묵적으로 이분법적이 됩니다. 즉 이게 옳은가 그른가, 이게 성추행이냐 아니냐, 이래도 되는가 안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은 어떤 경우에는 피할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법률은 이런 의미에서 이분법적입니다. 즉 범죄냐 아니냐에 대한 선을 긋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불법이냐 아니냐를 선을 긋는 것이 법률입니다. 현실적으로 이런 선을 긋지 않고도 세상이 굴러갈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선긋기는 그 선의 좌우에서 과장을 만들어 냅니다. 법망을 살짝 넘어가서 걸리고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범죄자가 되는 반면에 법망바로 전에 있거나 걸리지 않은 사람은 아무 해될것을 한적이 없는 순결한 시민으로 평가 받게 됩니다. 법이란 결국 필요악인 것입니다.
하물며 법이란 여러 공론을 거쳐서 만드는 것인데다가 불법인지 아닌지가 명확히 공표된 것인데도 이런데 만약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소신에 따라서 각자 자기 법을 만들어 공표하고 그걸로 누구는 범죄자 누구는 무죄하고 판결을 내리기 시작하면 그야 말로 엉망이 되기 쉽습니다.
저는 개개인이 각자의 의견을 가지고 그걸로 저건 저러면 안돼지라고 말하는 것을 나쁘다고 말하는게 절대 아닙니다. 그건 권장해야 할 좋은 것이죠. 문제는 그것이 길거리 공론이든 소셜네트워크 공론이든 밖으로 나가서 내 의견이 이렇다라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바꾸려고 하는 과정에 시동이 걸리는 부분에서 일어납니다. 그럼 의견의 되먹임이 일어나는 겁니다.
내 의견에는 여기까지가 정의고 이선을 넘으면 사악한 일이니 너 바꿔 하는 겁니다. 자신의 판단을 이런 저런 논리와 증거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대단한 단순화가 일어나고 알지 못하는 가정이 마구 들어 갑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란 자동차 처럼 부품만 갈아끼울수 있는 기계같은 존재다라는 가정이 그럴수 있습니다. 또한 정의나 진실이란 마치 돌멩이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러서 증거와 관찰과 논리로 과학적 사고로 제대로 발견할 수 있다는 가정이 그럴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래 조금더 쓰겠습니다만 아뭏튼 우리는 그 결과 종종 누군가를 바꾸려고 합니다. 그것도 매우 빠르게, 불가능한 속력으로 말입니다. 나는 가만히 있고 상대방을 바꾸려고 합니다. 서로 상호소통하면서 시간이 천천히 지남에 따라 새로운 관점과 문화로 새로운 행동을 만들어 나가는 그런 기다림은 실종됩니다. 즉 진정한 공생과 상호소통보다는 이 순간의 진실찾기 혹은 시간에 무관한 영원한 진리찾기에 몰입합니다.
그리고 그런 흐름은 모두를 분열시키고 앞에 나선 사람들을 뒤에서 돌멩이 던져서 죽이는 일을 만듭니다. 나가서 열심히 싸우다 죽은 패장이나 일찌감치 적군에게 투항하고 배신한 배신자나 전쟁에 지면 다 나쁜 놈이라면서 다 욕하고 맙니다. 이럼 결국 모두 죽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분위기에서 최후에 승자가 되는 공동체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논리 안따지고 윤리 안따지는 집단이 됩니다. 왜냐면 열심히 윤리따지고 논리따지던 다른 공동체들은 분열하고 서로 죽이기에 몰두해서 다 망하기 때문에 조폭적 문화로 형님에게 충성하는 문화를 가진 단순무식하고 비윤리적이며 감수성없는 집단이 가장 경쟁력있는 집단이 되는 것입니다.
엉터리 지식인의 문제
이런 문제를 심화시키는 큰 원인 중의 하나는 엉터리 지식인 입니다. 지식인의 첫번째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나는 안다가 아니라 나는 모른다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간단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두려움을 안다면 세상일을 다 안다고, 이건 절대로 이렇다고 이리저리 단언할수 없어야 합니다. 법률이 그러하듯 지식은 필요악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책읽은 걸로 세상 모든 일에 대해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다라고 말하는 지식인이 있습니다. 그가 입으로 무슨 말을 하건 그가 추구하는 세상은 결국 모든 인간들이 똑같아 지는 기계인간의 사회입니다. 그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도 그렇게 됩니다. 그들은 끝없이 규칙을 만들어 내지 못해서 야단입니다.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기 때문입니다. 행여나 그 규칙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그들은 이번에는 더더더 많은 규칙을 만들어 냅니다. 결국 끝없이 세상을 복잡하게 만드는데 이것은 첫째로 그들은 종종 인간이 아니라 규칙이 시스템이 세상을 좋게 만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축구선수가 축구프로리그가 있어야 먹고 사는 것처럼, 변호사는 법이 복잡해야 먹고 사는 것처럼, 그들은 그렇게 해야 자신의 존재가치가 유지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지식인도 있고 간단한 지식인도 있습니다만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 현란하게 말하면서 이것은 저것과 같다를 반복합니다. 그렇게 해서 한마디 한마디 들으면 다 그럴듯한데 다 듣고 나면 어느새 결론이 이명박과 노무현은 똑같다, 나꼼수와 강용석은 똑같다 이렇게 되는 일이 종종 벌어집니다. 이런 결론은 때로 그런 논증을 편 지식인 스스로를 놀래키기도 합니다만 그들은 워낙 그 수학계산 같은 논리적 논증을 굳게 믿습니다. 말하자면 스스로도 결론이 놀랍지만 나의 논리적 논증에서 나는 스스로 오류를 발견할수 없으므로 이 결과는 옳다라고 믿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도 때로 결과가 놀랍지만 말이 전부 옳은 것같으니 그 결과가 그런게 아닌가 하고 납득하게 됩니다.
이것은 엄밀한 과학에서는 올바른 방법입니다. 이론 물리학이나 수학에서는 옳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일에서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레고블록으로 자동차 만들기 같은 것입니다. 일상 언어로 된 개념은 부정확하기 짝이 없는데 그걸 이리저리 얽어서 나온 결과를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맺는 말
나꼼수는 복잡한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복잡한거 좋아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그걸보고 구세주네 부흥회네 하면서 비판합니다. 그러나 그러면서 그들이 행하는 논리란 결국 권력욕에 불과합니다. 세상을 자기 맘대로 끌고 가려고 다른 사람을 변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꼼수도 세상을 바꾸려고 한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차이가 있지요. 그들은 스스로 편파적이라고 말합니다. 즉 남을 논리로 논파하여 바꾸는게 아닙니다. 나는 이런데 너는 바뀌고 싶으면 바꾸거나 애초에 나와 비슷하면 함께 하자는 겁니다. 나꼼수는 스스로 나는 잡놈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대단치 않다고 말하고 오류가 없는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즉 통하는게 있으면 같이 하자고 하는 것이지 너의 문제를 내가 고쳐주마가 아닌 것입니다. 진짜 문제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제들은 안돼 틀렸어라고 말해버리기도 합니다.
나꼼수를 좋아하던 싫어하던 각자의 가슴으로 그렇게 하는게, 하나의 패키지로 그렇게 하는게 좋은 것입니다. 나꼼수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게 좋은 것입니다. 견디지 못할정도로 나꼼수가 나쁜것으로 생각된다면 그러면 나꼼수를 버려야지요. 애초에 나는 이부분은 좋은데 저부분은 싫니 하는 말 자체가 모순된 것입니다. 그런 것도 분석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한계를 정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우리 서로가 각자를 각자인채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면 끝이지 이건 좋고 저건 나쁘고 나눠서 분석할 일이 아닙니다. 사소해 보이지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고 많은 자칭 진보주의자의 오류입니다.
이건 당연히 나꼼수 옹호론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지금까지도 세상을 좋게 만들겠다는 개혁의 시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타났고 나타날것입니다. 우리가 다름에 대처하는 일관된 공감대가 없다면 결국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약해지고 결국 가장 무식한 집단이 가장 성공하는 사회가 계속될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꼼수 논란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일을 가르쳐 준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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