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나꼼수 비키니 관련글이 쏟아지고 있다. 이 문제가 생각보다 커진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그만큼 기본이 허약하다는 증거다. 즉 이정도의 문제가 벌어졌을때도 문제가 아름답고 완벽하게 봉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과하는가 안하는가의 답찾기에 실패하냐 안하냐가 아니다. 어느쪽으로든 결국은 감정이 남고 화합의 분위기는 깨진다. 사과를 촉구하는 집단 성명이 나오고 정봉주가 사과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사과를 한다는 것은 앞으로 행동을 고치겠다는 것이다. 그럼 다른 일은 없을까 다음번에는 또 어떤 일로 사과하게될까. 중요한 것은 사과를 요구한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모든 사람들이 마음 깊숙히 납득할수 있는 방식을 찾아내는 것인데 이것은 여태까지 성공하지 못한 일이며 이것은 단지 나꼼수에 관련된 일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문제다. 그렇기에 지금 여러사람이 여기에 입을 대면서 나름대로의 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문제를 논하면서 놓치고 있는 것은 이것을 공존을 위한 틀의 문제로 보는게 아니라 정답찾기의 문제로 본다는 것이다. 즉 사과해야 한다 혹은 사과할 필요없다의 답중에 어느것이 참인가를 논하는 것이며 이렇게 되면 이문제에 대해 개인적의견이란 것을 전제하고 이러이러하므로 사과할 필요없지 않을까요라던가 이러이러하므로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어떤 경우든 답은 둘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할수 있는 말일뿐 해결책은 아니다.
이런 가운데 몇일전에 한윤형이 나꼼수 비판이 그들을 무릎 꿇리려는 것인가 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 http://bit.ly/AyM6qD ) 이글은 그 전에 나온 정희준의 칼럼에 대한 비판을 하고 나꼼수에 대해 그가 바라는 것을 적는 형식을 택했다. 나는 한윤형의 글에서 나꼼수를 옹호(?)하는 입장에선 정희준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은 지당한 비판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면에서 이 긴글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정돈된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 멀리가지 못한 결론으로 빠지고 만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희준의 오류, 한윤형의 오류
정희준의 핵심적 오류는 바로 그가 진보나 보수를 자기 멋대로 정의하고 따라서 진보라면 나꼼수를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있었고 이는 정당하게도 한윤형에 의해 지적되었다. 그가 말한 진보나 보수의 입장이란 이러하다.
“자고로 다양한 인간군상의 인생살이를 하나의 잣대로 재단하며 집단적 ‘바른 생활’을 요구하는 것은 보수의 덕목이다. 진보는 그들이 사는 방식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 아닌가.”
이런 의견이 올바르지 못하다고 한윤형은 지적하고 있다. 나는 한윤형에게 동의하지만 절반만 동의한다. 즉 이것이 한계가 명백한 진보의 정의라는 점에서 동의하지만 그게 어설프다는 것을 지적하는데서 멈추는 것으론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진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는데 누군가가 이게 진보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 아닌데 그건 이래저래서 답이 아니야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우리는 하나의 잠정적인 가설을 받아들이는 형태가 되기 쉽다. 즉 진보가 뭔지를 정확히 알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게 답이야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한윤형은 그건 답이 아니야라고 말했는데 정말 물어야 할것은 왜 진보가 뭔지를 물어야 하는가 왜 그질문을 던저야 하는가 하는 점이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질문의 문제는 한윤형이 정희준의 답을 비판한후 스스로 내놓은 새로운 질문과 답을 보면 보다 확실히 들어 난다.
한윤형은 스스로 문제의 핵심은 공과 사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즉 공인에게 요구되어야 할것이있고 사사로운 개인에게 요구되어야 할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꼼수는 언론상도 받았으며 진보를 대표하는 지명도를 가지게 되었으므로 바로 공인으로 분류되어야 하고 따라서 그들의 언행에 의해 상처받은 사람이 있다면 유감이다라고 한마디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한윤형이 쓴 글의 핵심이다.
여기서 문제는 뭘까? 문제는 정희준은 문제의 핵심이 진보와 보수의 구분에 있다고 본것인데 한윤형은 공인과 개인의 구분에 있다고 본것이다. 그 구분의 잣대가 올바른가 아닌가를 떠나 이 두개의 답은 어떤 하나의 구분의 선을 긋고 그 구분선을 긋는 규칙을 제시함으로서 문제의 해결을 하려고 한다는 데 있어서 형식상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한윤형이 제시한 공사구분의 방식은 틀렸다고 말하는 글을 써서 한윤형에게 반박할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공인운운하면서 누군가를 제약하는 것자체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반박이 계속되어져 가는 것, 그래서 공사구분에 대한 정답을 찾는 것이 아름다운 토론이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중요한 질문에 대한 질문이 빠져있다. 정말 그런 구분이 문제를 해결할까? 다수가 공감하는 공사구분이나 진보의 정의가 등장하면 그에 공감하지 않는 소수의 사람은 이제 나쁜 인간으로, 불의한 인간으로 낙인찍혀야 하는 것일까? 한윤형도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을것이다. 결국 사과를 하건 말건, 논쟁에 이기건 말건 애초에 어떤 선을 그어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방향을 잡았기 때문에 누군가는 마음속에서 불만을 가지게 되고 화합은 깨어진다. 논쟁에 이기면 뭐하겠는가. 공동체의 화합은 깨졌는데. 공동체의 화합이 깨졌다면 문제는 해결된게 아니다. 이런 문제가 반복되면 여러가지 규칙이 생겨난다. 우리 그룹에 드는 사람은 뭐뭐뭐에 찬성하고 뭐뭐뭐에 반대하고 뭐뭐뭐를 안하고.. 결국 사람들은 탈출은 안해도 불편해 한다.
물론 좋은 답이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나는 이런 과감한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는 글을 읽은 적도 있다. 그 네티즌에 의하면 진보란 본래 프리섹스라는 것이다. 따라서 나꼼수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진보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런 과감한 문제해결법에 비하면 물론 정희준이나 한윤형의 해결책은 훨씬 더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무시할수 없을 만큼의 사람들이 그들이 내놓은 답의 바깥에 있고 그런 식의 해결은 결국 그들에게 너희는 우리와 공존할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이슈가 될일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존재자체가 민폐가 아닌 사람이 있는가
못생긴 사람들은 전부다가 아니라면 대부분 못생긴 사람의 비애를 경험한다. 예를 들어 내가 부탁하면 씨도 안먹힐일들이 잘생긴 누군가가 부탁하면 당연하다는 듯이 성사되는 일을 본다. 이렇게 못생긴 사람들이 차별당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누군가는 이렇게 주장할 법하다. 못생긴 사람들, 차별받고 애인도 없는 사람들이여 차별에 저항하자. 우리도 평등을 주장하자. 이것을 임시로 어글리즘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러면 공인인 장동건에게 누군가가 편지를 쓴다.
나는 어글리스트 입니다. 당신은 잘생긴 얼굴을 자랑스럽게 들어내 놓고 다님으로서 못생긴 사람들이 차별받는 문화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잘생긴 얼굴에는 응당 가면을 쓰고 다녀야 하는게 옳은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당신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 상처받았습니다. 공인이신 당신은 응당 유감이라고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장동건은 지난주에는 이런 편지도 받았다.
나는 한우를 키우는 농민입니다. 당신은 유명한 배우이며 공인인데 지난주에는 미국소고기를 파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시더군요. 당신은 한우를 키우는 사람들을 반대합니까. 그러한 행동을 하신것에 매우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에 대해 사과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장동건은 이게 단순히 사과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가 사과를 한다는 것은 과거만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는 계속 얼굴을가리고 다니겠다는 약속이고 미국소고기는 절대로 먹지 않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런예가 극단적일까? 물론 극단적이다. 그러나 이 예를 곱씹으면 뭐가 문제인가를 명확히 알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답이 뭐라고 생각하건 이것이 옳다 그르다로 나가면 결국 우리는 앞에 나선 누군가를 자꾸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되며 그것은 단지 한번의 망치질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망치질은 수없이 가해지고 결국 앞에 나선 사람은 죽는다.
나는 극단적으로 이런 요구가 모두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공무원 특히 권한이 막강한 대통령같은 사람은 국가라는 시스템의 일원이므로 어느정도는 기계처럼 정밀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런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결국 앞에 나선 사람을 이슈마다 따져서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행위가 되기 쉽다. 우리는 이미 노무현을 죽였다. 그러나 아직도 이런 점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럼 어쩌라는 것인가.
문제의 일부는 책많이 읽은 이론가들이다. 이들은 너무 많은 일에 분석적이고 환원론적이다. 무슨 무슨 주의를 배우면 그걸로 자꾸 세상을 보려고 하며 분석을 행한다. 결국 그같은 분석은 하나의 행위, 하나의 말로 사람들을 판단하게 만드는 함정을 판다. 사실 모든 말과 행위는 어떤 문맥에서 했는가에 따라 모두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남자산부인과 의사가 남의 부인의 알몸을 본다거나 아빠가 딸의 엉덩이를 때리는 행위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명한 의미를 가지겠지만 아무리 자명해도 그것은 절대 절대적인 해석을 가진것은 아니다.
돌아보면 분명하다. 나꼼수가 여자를 밝히는 호색한 잡놈들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남의 아픔에 무관심하고 무각감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나꼼수를 왜 나꼼수로 보지 않는가. 인간을 통채로 평가하지 분석하고 나눌일이 아니다.
나는 나꼼수를 나꼼수로 보는데 그들은 그냥 잡놈이다. 나는 그들 믿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아니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응당 나는 나꼼수를 믿지 않는다고 그들의 믿음을 고백할 일이다. 그렇지 않고 나꼼수를 믿는 사람들은 종교적 광신도이며 자신은 논리와 증거에 의해서만 움직인다고 말하지 말라. 정말로 자신이 논리와 증거에만 기반해서 움직인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인간이 뭔지, 가치나 윤리가 뭔지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적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당신은 위선자다. 뭐가 논리고 증거인가. 결국 당신은 당신의 불신을 고백할 뿐 아닌가.
누군가를 불신한다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다만 뭔가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일이 일어나려면 상당수의 사람들이 서로를 믿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공동체정신이다. 증거가 있고 논리적인 것만 믿는 건 믿는게 아니다. 그런데 한줌의 사람도 서로 믿지 못하고 모래알처럼 흩어지면서 그들이 여러가지 논리와 증거로 불신을 전파해 봐야 좋은 세상 절대로 안온다.
그런데 사실은 불신과 증거 관찰은 바로 계몽주의이고 과학정신의 근간이다. 그래서 서구적 교육에 많이 빠진 식자층은 손쉽게 여기에 빠져든다. 나는 이런게 필요하지 않으며 맹신이 무조건 좋다고 하는게 아니다. 그러나
좀 믿어야 할때는 믿으란 말이다.
믿음의 중요성을 무시하면 아무것도 이룰수 없다.
맺는말
의심이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노자나 장자를 읽기를 권한다. 바가바드기타도 좋고 금강경도 좋다. 과학적 정신을 온전히 포기하고 신비주의자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불확실성, 신비감, 무지에 대한 고민이 없는 사람은 제대로 공부를 한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가치가 뭔지 진정으로 고민해 보지 않았으며 윤리학 서적을 줄줄 외워도 결국 남의 말을 외웠을 뿐이다.
믿는 것은 가치나 윤리의 문제가 그런 것처럼 논리와 증거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관찰에 근거하지 않은 믿음을 맹신으로 미친짓으로 말하는 과학적 정신의 호소가 머리에 가득하겠지만 절대 그게 다가 아니다. 나쁜 믿음이나 나쁜 광신이 좋은 사람들이 서로 믿는 것과 형식적으로 같은 모습을 띈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미친짓으로 생각하는 것으로는 절대 좋은 세상 오지 않는다. 왜냐면 사회적 변혁의 힘은 논리가 뭐고 증거가 뭐건 결국은 서로 믿는 것에 대한 감동에서 오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결국 한국사람들은 나쁜 사람도 좀 있지만 결국 다 괜찮은 사람들이며 한국사회는 살만한 사회다라는 공감대가 있어야 모두가 선함을 전제로 하고 행동하게 된다. 그래야 좋은 사람이 오는 것이다. 문화의 확산과 설득은 논리로 되는게아니다. 아름다운 모습과 행동이 그렇게 만든다.
성추행이 두렵다고 해서 뭐가 성추행인지 선을 그어서 허용되는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추구해 봐야 진짜 성추행없는 세상은 오지 않는다. 법은 그런 것을 위한 것이지만 그건 필요악일 뿐이며 결국 사람들의 가치관, 문화가 바뀌어야 그런게 없어지는것이다. 문화는 결국 서로가 서로의 감정을 느끼고 소통하는데서 퍼진다. 저사람이 물건이 아니라 피와 감정이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할때 그사람을 괴롭히지 못하는 것이지 법이 무서워서 그러는게 아니다.
남자를 믿지 못하는 여자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모든 개인은 나름의 삶에서 그렇게 행동할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절대 나는 어떤 일에 대해 각자 개인의 판단을 내리고 그에따라 행동하는 것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론화를 조심하고 무슨 주의따위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주의하고 결국 어느쪽으로 선택하고 행동하든 그 근원에는 믿음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믿는바대로 행동하고 있다. 스스로 자기가 뭘 믿는지 의식하지 못할때도 말이다. 그것이 증거와 답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그것들을 찾기전에 질문자체가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말이나 행동이 죄가 있지는 않다. 나쁜 것이 있다면 그걸 행하는 인간이다. 인간을 쳐다보고 그게 어떤 인간을 느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인간은 괜찮은데 말이 틀리다고 하지는 말자. 남을 바꾸고 변화시키려고 하더라도 매우 느리게 천천히 해서 하고 너는 범죄자야라고 선언해서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은 되도록 피하도록 하자. 분석과 비판이란 그런 것이다. 남을 분석하는 것은 본래 좋은 일이 아니다. 모든 논리적 비판은 필요악이다. 본래 인격은 하나니까. 누구도 분석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누구도 무죄판결 받기만 하면 재판정에서는건 아무일도 아니라고 하지 않는다. 범죄자에게나 마땅한 무기를 마구 휘둘러대지는 말자. 논리는 꼭 필요할때만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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