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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문제라는게 존재하는가.

by 격암(강국진) 2012. 2. 13.

얼마전에 쓴 나꼼수 비키니사건에 대한 댓글에 블로그에 한 분이 댓글을 달았는데 이런 말씀을 하셨다. 


민주주의를 위해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라고 하면서 여성문제를 제기하지 말라는겁니까.


만약 내가 이 세상에 여성문제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면 의혹을 가지고 읽거나 때로 펄펄뛰면서 욕할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여성문제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론 이 말의 문맥이 뭐냐가 중요하겠다. 내가 말하는 건 여성문제, 청소년 문제, 경제문제, 종교문제, 정치문제등 모든 문제가 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문제가 있다면 그건 궁극적으로 한개의 문제다. 여기 개한마리가 있는데 이 사람은 쫑이라고 부르고 저사람은 바둑이라 부르며 또 다른 사람은 철수라 부른다면 이 세상에 쫑이나 바둑이나 철수는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기도 하고 안그렇기도 하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고 내가 여성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고민따위 필요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게 존재하지 않아도 고민은 필요하다. 반드시 필요하다. 오늘은 이문제에 대해 약간 생각을 해볼까 한다. 


왜 여성문제가 없다라고 하는가. 


이런 말은 단순히 이 세상문제는 다 연결되어 있어서 따로 따로인 문제는 하나도 없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 하는 것은 아니다. 그걸 넘어서 여성문제라는게 존재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을 좋게 만드는 것 이상으로 문제를 만들기도 하기 때문에 지적이 필요하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가 그러하듯 여성문제라는 개념도 쓸모가 있다. 다만 이 세상에 여성문제라는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그러하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내말이 상당히 추상적으로 들릴 것이다. 그리고 현실의 아픔들은 이러한 추상적인 단어와는 거리가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다른 예를 들것도 없이 이번에 나꼼수비키니 사건을 통해서 들어난다.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이 있는 사람들이 나꼼수를 지목하고 고치려고 하거나 비판하거나 한다. 그런과정에서 뭔가 소중한게 없어지고 깨어진다. 결국 여성문제라는게 해결될 열쇠도 사라진다. 나꼼수 멤버들이 한국사회의 여성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쪽에 속할까 그걸 없애는 사람속에 속할까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다. 비키니 주가 되었다는 주진우기자가 매춘하고 여성학대하고 그런 사람일까? 어떤 답이 떠오르겠지만 그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보류해 주었으면 한다. 답에는 문맥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이글에서 아직 여성문제라는게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에 대한 문맥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자주하는 말이긴 하지만 다시 기본에 대해 몇가지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규칙과 법과 관습으로 둘러쌓여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우리의 경험과 관찰과 논리가 누적된 결과이며 그것들의 다른 얼굴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사고방식의 관점에서 서구적 과학정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그 뿌리를 가지고 있다. 


여성문제라는게 존재하는 영역은 이런 규칙과 법과 관습에 대한 영역이다.  여기 연쇄 강간범이나 상습적 추행을 일삼는 남자, 여성을 학대하는 남자가 있다. 그런데 어떤 나라에서, 어떤 시대에서 그런 사람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돌아다닌다. 그럴때 누가 여성문제라는 단어를 던진다.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가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이런 경우 법이나 규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그것을 성문화하거나 지킬것을 다짐한다. 이게 여성문제가 존재하는 영역이다. 그리고 물론 경제문제, 교육문제, 노인문제등 다른 문제도 그렇다.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주목하게 하고 느끼게 하고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논리적 대화와 자료수집을 촉구한다. 


문제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논리적 사고방식, 과학적 사고방식에 뿌리깊게 물들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게 다라고 생각하는 경우다. 그들은 마치 반죽에 대고 누르면 하트모양이 나오는 빵틀을 가지고 노는데 중독된 어린 아이처럼 이 세상 모든 일을 다 그 빵틀을 찍어서 본다. 


그들은 마치 이 세계가 부품으로 만들어 진 자동차인것처럼 사고한다. 자동차에는 엔진문제가 있고 타이어문제가 있고 핸들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사고한다. 그러니 각자 좋은 부품으로 갈아 끼우면 자동차는 훌룡하게 수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본래 궁극적으로는 구분할수 없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생명체 같은 것이다. 사람을 이해하겠다고 팔다리 심장 잘라내면 나중에 합친다고 살아나지 않는다. 심장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심장을 쭉 뽑아다가 잘 만질만큼 만져서 다시 돌려넣을때면 사람은 이미 죽어있다. 여성문제는 물론 교육문제, 경제문제등 여러 문제들에 집착하는 것은 때로 이런 문제를 만든다. 치열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같지만 그과정에서 전체 유기체를 죽이거나 굉장한 스트레스를 줘서 약화시킨다. 


이 세상에 지상낙원이 있다고 한들 그 나라의 법을 가져와 우리나라에서 실시한다고 우리나라가 지상낙원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침대는 어떤 사람의 체형에 맞췄을때 그런것이고 최홍만 같은 거인이 누우면 별로 안편할수 있다.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사람들만 가득있는 나라가 행복한 나라가 혹은 여성문제가 없는 나라가 될 규칙이나 법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문제라는 시각이나 법도 필요하다.


여성문제라는 시각이나 법도 필요하다. 좋은게 좋은거고 인화를 깨뜨리면 안되니까 다들 참고 견뎌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성추행당하고 범죄의 대상이 되는 일을 막을 법과 관습과 시스템을 만드는 일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 법이나 시스템이라는 것도 정해진 것이 아닐것이다. 부동산 투기를 막으려고 어떤 강력한 제약을 주는 법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모든 법은 사실 다 무리가 있는 것이고 부작용이 있다. 따라서 강력한 투기바람을 막아보고자 만든 강력한 투기 억제법은 다 부작용이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변해서 투기적 심리로 무모하게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상황이 되면 그런 투기 억제법은 제거해야 하거나 완화해야 부작용이 생기지 않는다. 


여성과 관련해서 뭘 해야 하고 뭘 하면 안되고 하는 일도 나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남자들이 여자만 보면 끌고 가서 강간하고 성추행하는 무법천지의 사회라면 이웃집 여자와 대화를 나누려고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비도덕적이고 불법적인 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여자들은 천으로 온몸을 가려서 성적인 매력을 철저히 감춰야 하는 것이 지당한 법이 될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는 아프칸의 탈레반에 대해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탈레반정권이전에는 사회가 완전한 무정부상태로 부녀자 강간이나 길거리 총격전이 일상이었다고 한다. 오랜 전쟁으로 무기가 사방에 뿌려진 탓이다. 그런데 탈레반은 매우 잔인한 방식으로 공개처형과 엄격한 규칙적용을 해서 이런 상황을 개선했다는 것이다. 그 과정은 서구인의 눈에 보면 인권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탈레반 이전의 지옥은 탈레반에 의해 오히려 개선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건 예일 뿐이다. 아프칸에 대한 진실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게 아니라 절대적으로 올바른 규칙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규칙과 법이란 옷처럼 사람몸에 맞추는 임시적인 것이며 사람과 세상이 바뀌면 그에 따라 바뀌어야 할 것이다. 


여자들이 하의실종 패션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자명한 권리이며 사회적 규칙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현대의 한국에서 통하는 규칙인 것이지 어디 성서에 씌여진 하늘에서 내려온 규칙같은게 아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서양에서건 한국에서 어떤 특정한 시점으로 남자들은 응당이렇게 여자들은 응당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라고 썼다고 한들 그리고 누가 그걸 어긴다고 한들 무조건 화를 내고 볼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건 말을 넘어서 한개로 구분된 행동을 넘어서 전체적인 세상, 사람전체를 보는 것이다. 그것을 놓치면 정의란 그저 법에 씌여진 것 혹은 어떤 이데올로기나 사상이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어떤 국회의원이 아나운서 지망생들 모아놓고 아나운서 되려면 몸바쳐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어떤 남자가 섹시한 여자의 가슴을 놓고 낄낄대고 성적인 흥분 운운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그걸 권력구조의 문제로 해설할수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사람을 느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느낌 믿음따위의 주관적이고 맹신적인 것은 버리고 우리 논리적으로 따져보자는 것도 경우에 따라 좋다. 그런 이야기하는 사람 요즘 너무 많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남을 고소해서 법정에 세우기 좋아한다. 기소하고 변론하고 무죄 나오면 무죄나왔으니 좋은거 아니냐고만 한다. 비판과 분석이란 필요악이다. 나는 모든 판사가 법이 필요악이란 것에 동의할 거라고 생각한다. 필요하니까 존재하고 적용하기는 하지만 사람들을 끌어다 놓고 증거가 이러하니 이러니 저러니 하는 행위들은 인간을 파괴한다. 그런데 우리 열심히 상호 비판하고 상호 분석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피학대음란증환자가 아니라면 매우 무감각한 감각이상자이거나 혹은 그런 과정이 주는 고통을 제대로 겪어본적이 없는채 남을 괴롭히는 사람들이다. 


법은 필요하다. 그러나 법은 필요악이다. 여성문제라는 시각도 필요하다. 그러나 결국 필요악인 것이다. 잘살아보자는 경제문제도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경제적 시각이 필요악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지 않는가? 


맺는 말


총이나 자동차 같은 기계가 무기가 되는 것처럼 사람들이 만들어 낸 관념이나 이야기도 무기가 된다. 무기는 종종 약자를 지켜주는 좋은 도구가 되기는 하지만 연쇄살인범의 흉기가 되기도 한다. 누가 자꾸 칼질 총질을 사방에 해대면서 나 힘쎄거든 나 잘났거든 하고 행동한다면 결국 다른 사람도 무기들고 나온다. 총기난사범은 죽거나 감옥에 가기 마련이고 그런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이 살인이 일상이 되는 흉흉한 곳이 된다.


이게 옳은데 그른데 라고 질문을 던지면 그 순간 세상은 둘로 쪼개진다. 그리고 일단 진영이 나눠지면 양쪽진영에서 가장 저열한 집단이 주목을 받는다. 이쪽에서는 저쪽을 보면서 봐 저놈 제가 이렇게 저렇게 말하잖아. 저사람들은 저래라고 말하고 그것이 반대쪽에서도 반복되는 것이다. 나는 나꼼수를 옹호해 준답시고 나꼼수같은 훌룡하신 분들에게는 여자들이 몸좀 주면 안돼냐고 말하는 인간도 어딘가에서 본적이 있다. 이런 턱도 없는 이야기를 보고 나꼼수 비판진영의 누군가는 또 펄쩍 뛰면서 역시 마초놈들의 본성은 이래라고 하면서 이야기가 흘러간다. 


좀 더 수준높은 곳은 특별히 다른가. 정성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여성문제라는 무기를 잘쓰면 도구가 되지만 그것을 너무 휘두르면 이젠 다른 누군가가 무기를 들고 나온다. 그렇게 칼과 총을 겨눠서 결국 누가 이긴들 승리는 없다. 나꼼수 비키니 논쟁이 오래가는 것은 그리고 공지영작가를 원망하는 사람도 있는 것은 이런 일들 때문이다. 꼭 그 칼을 거기다가 휘둘러야 속시원한가 하는 것이다. 몇몇 소위 진보적인 사람들은 잘한다. 칼은 마구 휘둘러서 그렇게 해서 살아남는 적자생존의 존재가 바로 발전과 진보를 가져오는거야라고 추임새를 넣는다. 신자유주의 비판하는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는 정글을 가장 좋아한다. 


좋은 세상은 믿음, 사랑, 감수성, 이해 그런게 만드는 것이다.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 만드는 것이지 어떤 철학이나 이념이나 주의가 그렇게 하는게 아니다. 남자들에게 이런 거 저런거 하면 안된다고 법과 규칙을 정하는 것만으로 여자가 살기 좋은 세상이 오는게 아니다. 설걷이는 남자가 한다는 규칙을 정해야 가사분담이 되는 가정이 만들어지는게 아니라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이해해야 그렇게 되는 것이다. 남자대 여자로 인간대 인간으로 서로의 아픔을 느낄수 있는 감수성있는 인간들이 성공하는 문화를 키워가야 그렇게 되는 것이다. 법과 규칙에 너무 의존하면 그런게 오히려 안된다. 행동에 선택의 자유가 없으니까. 나무가 되기위해 싹이 났는데 이 싹은 왜 내가 생각하는 나무와 다르냐면서 여기저기 가지치기를 하거나 당겨댄다면 빨리 나무가 될까? 나꼼수를 두들겨 패고 사과하게 해서 그들이 음담패설을 못하게 하면 좋은 세상이 올까? 그런건 못하게 하는게 옳은 규칙이라는 것은 영원히 그러할까? 앞으로 올 세상이 어떤 세상일지 모른다. 20년전과 지금문화를 비교하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일이 20년전에는 도저히 용납되지 못하는 일도 많다. 


유교경전인 대학의 한구절로 끝을 내기로 하자


근본이 흐트러져 있는데 말단이 다스려지는 일은 없다. 


근본이 뭔지에 대한 사색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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