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보기는 고통을 요구한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이 고통속에 있는 것이 한 이유일 테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 이상으로 우리가 세상을 보는 미디어가 만들어 내는 고통이 크다.
권력을 추구하는 혹은 권력이 선택한 지식 채널
어떤 의미에서 모든 언론과 정보통로는 심지어 모든 노인정의 잡담이나 부녀회의 유언비어조차도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들은 정보를 선택하고 그 정보를 흘려보낸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이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이고 비록 그것이 여러가지 동기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따라서 도덕적 가치적으로 같은 것은 절대 아니지만- 그것이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점은 다르지 않다.
그러나 통상 권력이라고 할때 대표주자처럼 생각되어지는 정치권력과 돈의 권력은 언론사를 장악한다. 때로는 직접적으로 억압을 해서 그렇게 하지만 더 원천적으로는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언론사를 운영하게 해서 그렇게 한다. 어느날 큰 신문사에서 부탁받아 자신의 생각을 발표한 한 대학교수는 그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으며 어떤 억압을 받아서 그렇게 한것이 아니고 언론자유의 국가에서 말을 하는 것은 자유라고 할지 모르지만 애초에 그 대학교수가 선택되어 지면을 차지하게 된 것 자체가 권력의 선택이다.
김어준이 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이것을 나꼼수를 지지하는 세력이 김어준을 강요해서 책을 쓰게 만들었다로 해석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김어준은 김어준으로 존재했을 뿐이지만 대중이 대중의 요구에 적합한 김어준을 뽑아올려서 베스트셀러가 되게 만든 것이다. 언론사를 장악하는 권력도 같다.
문제는 정치와 돈의 권력은 아주 소수가 장악하고 있고 한국은 자유 시장이 세상을 굴리는 자본주의 국가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누가 어떤 논리를 가져와도 이것은 분명하다. 바로 삼성의 주식회사 세습이 이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 그걸 합법으로 만들었건 어떤 논리로 그걸 구부리건 삼성의 세습이 이땅에서 합법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은 이땅이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 국가보다는 왕권통치국가에 더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독과점의 나라에서 소위 제도권의 지성은 구부러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 사람이 선택되고 그런 사람이 출세하고 그런 사람이 살아남으니까. 동아일보같은 신문도 한때는 정론지로 이야기되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들었다. 조선일보도 마찬가지다. 리영희는 조선일보의 주필 김대중을 가르켜 가장 기자로서 자질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니 김대중은 출세하고 리영희가 기자로서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낙마하고 만다.
나는 대중의 인기가 반드시 그 사람의 학문적 능력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김용옥같은 사람도 결국 어느정도 야인으로 떠돌아다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같이 지위가 강조되는 사회도 없다. 꼭꼭 xx교수라고 부르니까. 개인의 선택도 물론 큰 원인이겠지만 왜 김용옥은 제도권과 불화할까 혹은 왜 제도권은 김용옥을 포용할수 있는 자리를 가지고 있지 못한가도 고민해야할 문제다. 미국과는 달리 한국의 이공계는 사회적 철학적 문제에 영향력이 별로 없다. 이것도 과연 한국의 이공계는 어떤 사람이 선택되어 어떤 사람을 길러내고 있는가를 고민할 여지가 있다. 그저 말잘듣는 머리 빈 노동자들을 생산하기 위한 대학이 아니었을까. 과학과 기술이란 무엇을 위한 과학과 기술일까.
코를 땅에 박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원천적으로 도대체 무슨 학문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오늘날의 한국대학인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점은 이글의 범위를 넘어가는 것이므로 여기서 이쯤하자.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언론, 대학, 사법부등 모든 제도권의 지성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독점적 권력에 의해 선택되고 구부러진 상황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디어 스트레스가 만들어지는 한가지 큰 이유다. 권위있는 분들이 보여주는 세상이 별로 합리적이거나 유용하질 않으니까 문제다. 근거있는 권위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억지로 지켜지는 권위란 나쁜 것이다.
개인화, 다양화 된 언론
그러나 21세기들어 미디어가 주는 스트레스는 더더욱 크게 증가하는데 이는 주로 전자통신 혹은 인터넷의 발달로 무수한 정보통로가 만들어 지기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앞에서 제도권 지식채널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러한 정보채널의 증가를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마땅할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말하자면 짜장면만 팔던 동네에서 온갖 종류의 음식이 더 팔리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서 선택의 여지가 넓어졌으니 무조건 좋다고 할수 없는 것이다. 그 음식들이 대부분 상한 음식이라면 말이다. 사실 상황은 이보다 더 안좋다.
요즘 젊은 세대는 티브이를 안본다는 이야기가 나온지도 한참되었다. 종이 신문이 포털의 뉴스서비스에 밀린다는 이야기가 나온지도 이젠 오래된 이야기다. 미네르바와 다음 아고라가 국회를 뒤흔든 다는 사실은 이제 놀랄것이 없고 이제 트위터나 페이스북같은 SNS와 팟캐스트같은 매체가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다.
다 좋은 것이지만 그 다양성앞에서 오늘날의 사람들은 매체 선택이라는 어려운 일들을 해야 하는 문제에 빠진다. 즉 어떤 정보채널을 믿을까를 선택해야 한다. 민주화시대에는 기성언론이냐 학생운동 하는 사람들의 대자보냐 하는 양자선택쯤의 길에 있었는지 모른다. 이젠 수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최고로 목청을 높여 떠들어 대고 있다. 무식하게 XX새끼를 외치는 채널도 있고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나 독일어로 된 전문용어를 휘두르며 이건 원래 그렇다면서 이데올로기 학원을 차린 곳도 있다. 나는 때로 생각한다. 만약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간디나 김구가 이 세상에 있다고 해도 그들이 과연 주목받을 수 있을까.
상업적이 된 것은 기성언론뿐이 아니다. 블로그는 물론 아고라의 글들, 심지어 트위터조차도 자극적인 제목과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들의 상당수는 선정적이고 그렇지 않은것도 극단적이며 대부분은 단순명쾌하다. 물론 그 이유는 그래야 사람들이 많이 보기 때문이다.
단순명쾌가 좋은거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으며 단순명쾌의 장점도 무시할수는 없다. 그러나 세상일은 사실 하나도 단순하게 없다.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지 않는 글이란 당신을 세뇌하는 글이다. 당신이 뭔가 어떤 하나만 보게 하고 다른것에 대해 장님이 되게 하는 글이다. 정말 중요한 것, 원천적인 것, 배울 만한 것은 언제나 애매해 보인다. 그들은 당신과는 다른 패러다임에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당신과 똑같은 패러다임에서 명쾌하다는 것은 대개 선악나누기로 세상을 두쪽내는 것이다. 세상이 두쪽나면 싸움이 생기고 그 싸움은 사실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그저 피해자만만든다. 세상이 좋아진다면 그것은 악이 선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의 패러다임자체가 바뀌기 때문이다. 선악의 싸움은 끝없는 분열의 길이고 패러다임의 변화는 통합의 길이다.
정보채널이 만드는 가상세계
우리가 선택한 매체는 우리 앞에 세상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선택한 여러 매체가 모두 경제적 공황상태나 끔찍한 아동 납치사건, 노스페이스 점퍼 유행을 한목소리로 떠들어 대면 우리 눈앞에는 당장 종말론적 상황에 있는 세계,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학교, 기계처럼 똑같은 옷을 입고 움직이는 인형같은 학생들이 펼쳐진다. 당신이 선택한 매체, 당신이 신뢰하는 매체가 빨갱이들이 국회와 학교를 장악했다고 떠들어 대면 학생들과 국가자체가 인질이 되어 위급한 상황에 빠진 세계가 펼쳐진다. 그런데 그런 상황은 그럴듯할지는 몰라도 기본적으로 만들어진 세계다. 가상현실이다. 세계 자체가 아니다.
어느날 당신이 직접 동네의 학교앞에 가보면 노스페이스 점퍼가 유행이기는 하지만 활자로 읽고 충격적 사진으로 봤을때처럼 그렇게 말도 안되는 상황이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수 있을지 모른다. 아이들은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덜 폭력적이고 훨씬 상식적인 아이들일 수 있다. 당신이 직접 만난 빨갱이 국회의원은 그렇게 빨갱이스럽지 않을지 모르고 당신이 직접만난 민주화투쟁의 영웅 국회의원은 세상을 구할 지사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세상을 직접 다 볼 수는 없다. 직접 어딘가에 간다고 해도 당신이 그 상황을 해석하는 것, 그 상황이 이해될 문맥은 다른 정보들에 의존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직접적 경험따위란 하나도 없는 것일지 모른다. 독립투사가 피흘리고 싸웠던 유적지에 가서 감회에 젖는 것은 역사를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천조가리 같은 비싼 옷을 사는 것은 그 상표때문이거나 어떤 유명인이 그런 옷을 입어서 그런 것일수 있다. 아는게 있어야 보이는게 있다. 그런데 그 아는것이란 전부가 아니면 상당부분 어떤 정보채널에서 듣고 배운 것이다.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그렇게 단순한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디어 스트레스를 날마다 받는다. 누굴 어떻게 믿는가에 따라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이 순식간에 재조립되어 전혀 다른 모양으로 펼쳐지기 때문에 긴장하면서 살수 밖에 없다. 마치 수없이 많은 채널을 가진 케이블 방송에서 계속 채널을 바꾸고 있는 상황과 같다. 아무리 돌려도 쓸만한 채널이 안나온다. 이따금 충격적이거나 선정적인 영상에 눈을 빼앗길 따름이다. 그래서 엉터리 같은 종교지도자도 잘나간다. 그들이 보여주는 세상이 그나마 견딜만 하다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복잡한 세상 안보고 산다면서 뉴스 안보는 사람도 많다. 그것도 권장할 만한 방법이다. 그렇지만 요즘같이 변화가 빠르고 폭이 큰 세상에서 그것은 또한 눈감고 자동차 운전하는 것처럼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계속 뉴스 안보다가 어느날 아파트 반값세일 한다고 아파트를 사면 어떻게 될까, 무슨 복지혜택이 바뀌었다는데, 무슨 금융상품이 새로 나왔다는데, 당신이 든 보험상품을 더 좋은 것으로 바꿔준다는 전화가 계속 오는데 뉴스 안보고 그냥 살수 있을까. 뉴스는 안본다지만 사람은 만나야 할것이고 사람하나 하나가 사실은 정보채널이다. 누굴 믿을 것인가. 궁극적으로는 산에가서 혼자 살아야 할것인가.
맺는말
미디어 스트레스는 사회적 공감대가 실종되어 있기 때문에 생긴다. 즉 전략전술은 다를지 몰라도 지금 우리는 축구를 하고 있다라는 큰틀에서의 공감대는 모두 같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사소한 작은 것들에 대해 조절할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게 축구인지 농구인지도 구분이 안되는 불확실성과 부딪히면 우리는 우리가 뭘해야 할지 알수가 없다.
요즘은 정치인은 물론 대학교수도 의사도 판검사도 기자도 불신의 대상이다. 정수기를 사려고 해도 보청기를 사려고 해도 집을 지으려고 해도 어디나 들리는 이야기는 세상에 도둑만 가득하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전문가들도 못믿는다는 말이 가득하다.
사실 4대강 논란과 천안함논란 같은 상황에서 국민들은 전문가라는 사람들에 대해 불신을 더더욱 키우게 되었다. 그것들 뿐만이 아니다. 그런 상황이 계속 되었다. 아라뱃길은 2조를 들여서 만든 뱃길이고 유지비가 한해 200억이나 들어간다고 한다. 그런데 뱃길은얼어 있고 엄청난 돈을 들여서 사들인 배는 항상 정박되어 있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한쪽편에서는 학생들이 알바에 시달리고 등록금 비싸다고 야단이다. 애들 무상급식하면 나라가 망한다면서 모든 사람이 투표를 해서 결정하고 미국같은 큰 나라와 FTA를 맺는 것은 재협상후에 따질 것도 없이 날치기로 통과된다. 전문가나 합리성이라는 단어는 여기서 실종된 것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상식이 실종되는 시대이므로 미디어 스트레스가 있는 것이다.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 앞에 펼쳐지는 세계가 매우 불안정하다. 세상에 안정성을 가져 올것은 그럼 무엇인가. 신뢰, 믿음, 철학, 일관성, 자기성찰 같은 단어에 좀더 중요성을 두어야 한다. 바깥만 두리번 거리지 말고 자기 안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같은 원천적인 질문을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기초가 불확실한데 끝자락에 보이는 정보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일은 끝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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