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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미국이라는 관념의 몰락

by 격암(강국진) 2012. 3. 8.

2012.3.8

미국 뉴욕에 살때 기이하게 생각했던 일중의 하나가 있다. 그것은 인구가 우리나라보다 3배가까이 크고 돈도 많은 일본인들보다 한국인들이 더 미국에 많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호주며 캐나다 이야기를 들어봐도 영어연수로 유학으로 온 한국사람들이 넘쳐난다고 하고 주변의 교수며 친인척중에도 기러기 아빠가 그리 어렵지 않게 보인다. 그뿐인가 한국에서 교수를 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미국에서 학위를 한 사람들이다. 한국의 우파지지자들이란 자칭 타칭 친미파로 광화문에서 성조기를 흔들기도 한다. 사실 미국이 어떤 의미로건 위대한 나라인 면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미국은 세계를 지배한달까, 세계를 이끈달까 하는 대제국이다.

 

그러나 사실 그런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는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 김광기의 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 (리뷰는 http://blog.daum.net/irepublic/7888122 )에는 미국의 비참한 현실이 그려진다. 시사인에서도 미국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기사가 있었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120125094613219&p=sisain) 그에 따르면 미국의 64%가 현금 천불이 없고 전체인구의 14.6%인 4450만명이 음식을 타먹는 푸드스탬프를 받는 생계보조자이다. 나는 카태리나 태풍때 일어났던 뉴올리언즈에서의 폭력사태가 미국의 현실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고 믿는다. 태풍이 불자 시민들은 폭도와 강도로 변하고 정부군은 총기발포를 해야 했다. 이것은 작년의 대지진사태때 얌전히 줄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일본시민들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미국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 숫자를 나열할수도 있겠지만 나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미국의 몰락을 이야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 단순히 미국이 지금 어렵다는 표면적 문제를 지적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은 미국적 생활 방식 미국적인 삶이라는 관념이 몰락한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것은 제리미 리프킨이 유로피언 드림이라는 책에서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러미 리프킨은 지속가능한 삶, 탈종교, 삶의 질등등을 거론하면서 세계의 미래는 유럽이라는 단어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유럽이란 땅으로서의 유럽이 아니라 유럽적 삶의 방식을 말하는 관념으로 리프킨은 미국이라는 관념이 지고 유럽이라는 관념이 대안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미국이 아니면 유럽이라고 말하는 리프킨의 견해는 서구중심적 사고처럼 보인다. 즉 핵심적인 문제는 개발주의적 성장우선주의적 사고와 지속가능한 삶을 추구하는 사고의 대비다. 미국은 더 많이 더빨리 생산하여 좋은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도전과 성취의 꿈을 말하는 반면 리프킨이 지적하는 것에서 중요한 부분은 바로 지속가능한 삶을 추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단순히 미국과 유럽으로 나뉘어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 것이며 나는 유럽이 과연 그러한 꿈을 이뤄낼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이같은 논의는 추상적인데가 있지만 2008년의 경제파국이래 이같은 논의를 단지 추상적인 것이며 언제터질지 모르는 미래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적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서브프라임사태는 바로 더 많은 소비를 추구하는 미국이 신용을 남발하다가 생긴 문제로 미국이라는 나라의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핵심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단어

 

나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부인하지 않는다. 아니 높이 평가하며 모든 종류의 억압을 받는 사람들이 풀려나기를 바라고 인종차별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차별에 대해 반대한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던가, 내가 이러한 문장을 써야만 한다는 사실은 거꾸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를 보여준다. 이 문장은 마치 나는 기독교인입니다라던가 나는 알라의 자식입니다라는 식의 종교적 선언처럼보이고 실제로도 그런 면이 있다. 기독교인들만 사는 나라에서 나는 불교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듯이 오늘날 자유평등교의 신자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자유평등교의 신자라는 선언을 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당장 악마로 지목되어 처형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메세지에는 문제가 없는데도 기독교인들이 마녀사냥과 십자군전쟁같은 행위를 통해서 많은 죄악을 저질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진리는 단어 몇개, 한두개의 문장에 다 담길 수가 없다. 추상적인 단어들은 종종 정확한 정의가 없고 사실 바로 정확한 정의가 없다는 것이 그 단어들이 중요한 가치판단의 문제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자유니 평등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단어에 열광하면서 가지는 막연한 마음속의 느낌이란게 한계없이 옳은 것도 아니고 어떤 때는 매우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을 수도 있다. 사실 자유란 자신이 뭐에 구속되어 있는지 안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는 그렇게 단순한게 아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단어에 대한 세뇌는 오늘날 너무도 깊숙히 이뤄지고 있으므로 나는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해 한마디를 하면서 문제가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다수결투표를 해서 다수를 이루는 의견대로 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집단적 의사결정과정에 조금이라도 참여해 본 사람은 이런 단순한 생각이 무섭다는 것을 안다. 이렇게 단순하게 접근하면 민주주의라는게 다수에 의한 소수의 착취가 되기 쉽다. 결국 투표를 이기면 전체 집단의 자원을 맘대로 쓸 수 있는 것이니까 다수파가 되려고 이합집산이 생긴다. 일단 다수파가 되고나면 다수파가 다수파라는 이유로 즉 이것이 민주적 의사결정과정의 결과다라고 주장하면서 소수파에게 계속 희생과 양보를 요구하게 되기 일수다.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답게 되기 위해서는 정보의 전달이라던가 전제 구성원의 도덕성문제 같은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위의 단락에서 내가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결국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단순한 정의를 이야기하고 거기에 다른 부가조건을 더하면서 민주주의의 개념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나가면 이 세상에 문제가 되는 개념이란 하나도 없다. 결국 문제가 될 때마다 당신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뭔지 모르고 있다면서 민주주의 개념을 자꾸 바꿔나가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나는 민주주의를 믿는다라는 문장자체가 문제를 일으키는 면이 있다. 진리는 한 개의 단어나 문장에 다 포함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성스런 신비의 단어로 추앙할 때 그게 하나의 이데올로기나 종교가 될 때 민주주의라는 관념은 희생자를 만들어 낸다. 바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엉터리 정치가 세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자유나 평등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사랑이나 도덕같은 단어가 그러하듯이 자유나 평등이라는 단어는 좋은 것이면서도 너무나 많이 사용되어져서 본래의 그 맛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뇌

 

우리는 우리가 세뇌되어 있을 때 종종 세뇌되어 있다는 것을 모른다. 똑같은 메세지가 너무도 자주 너무도 강렬하게 우리에게 전해지기 때문에 그 메세지는 당연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즉 그게 우리 자신의 판단처럼만 느껴진다. 너무도 자주 너무도 강렬하게 전해지는 메세지는 당연히 도서관의 두꺼운 책에만 있는게 아니다 우리가 매일 보고 듣는 매스미디어에 흘러 넘친다. 

 

우리가 거의 파블로프의 개처럼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두개의 메세지는 바로 자유와 평등이다. 미국 영화에서 우리는 자유야!라고 외치는 멋진 미남 미녀 배우의 모습을 보며서 가슴뭉클해 하거나 우리는 똑같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눈물흘리는 배우의 모습은 너무 흔하고 우리는 그것에 감동받기 때문에 그같은 메세지에 대해 약간이라도 다른 측면을 말하는 것은 바로 이교도나 악마로 말해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하나의 문장이 옳다고 해서 정반대의 문장이 틀린 것은 아니다. 즉 우리는 모두 똑같은 사람입니다라는 문장이 말하는 인간의 평등이 지당한 진리라고 해서 우리 모두는 한 사람도 서로 똑같은 사람이 없습니다라고는 문장이 말하는 존재의 다양성이 지당한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의 문장과 하나의 단어는 그게 어떤 장소, 어떤 문맥에서 쓰이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까 자유나 평등이 멋진 단어들이라고 해서 그 단어만 들으면 항복할 준비가 된 상황은 세뇌되어진 옳지 않은 상황이다. 

 

문제는 자유주의

 

문제의 핵심에는 자유가 좋은 것이라는 관념이나 교리가 있다. 이 관념은 자유주의로 사실상 서구문명의 골수에 해당하는 것이다. 서구사람들이 그리스까지 소급하여 올라가 그들의 역사를 치장하지만 사실 서구세계가 적어도 물질적으로 세계에서 뛰어난 장소가 된 것은 고작 몇세기전의 일이다. 세익스피어가 글을 쓰던 시대에도 유럽에는 포크를 쓰는 문화도 없어서 왕도 손을 음식을 뜯어먹었고 동방견문록의 마르코폴로가 중국의 번성을 말한 것이 큰 농담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서구는 미개했다. 

 

이런 서구가 물질적 성장을 이룬 역사속에서 서구 사람들의 뼈와 핏줄속에 깊숙히 자리잡은 것이 바로 자유라는 것이 번영을 가져다 준다는 생각이다. 물질이 똑같은 원자로 이뤄져 있듯 사회는 개인이라는 원자로 이뤄져 있다는 생각도 자유라는 관점에서 영향받는 것이다. 인쇄술은 더많은 사람들에게 지식을 보급했을때 더많은 발전이 온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것도 결국 칸막이 없는 자유로운 경쟁이 번영을 가져온다는 믿음을 가져다 주었다. 물론 자유하면 자유시장에 대한 믿음도 버릴 수가 없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내가 왜 아주 당연하고 옳은 것을 믿음이라는 단어에 가져다 붙이는지 알 수없다고 느끼거나 이거 자유의 가치를 부정하려는 거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중에는 신자유주의라고 하면 바로 악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진보정치세력들을 이해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FTA나 신자유주의에는 크게 반대하면서도 뼈속깊이 자유주의를 숭상하는 자칭 진보주의자가 자신안의 모순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가 단순히 다수결 투표가 아닌 이유는 그걸로 사람들이 행복해 지는데 문제가 있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자유가 칸막이 없는 평등과 대화, 경쟁으로 발전을 이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단순히 말하기에는 그럼 도대체 무슨 발전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인가하는 질문이 잊혀진 면이 있다. 즉 자유에 대한 옹호에는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발전을 가져온다라는 기대가 깔려있고 그런 기대는 한단계 더 나아가면 사람들이 핸드폰쓰고 자동차를 두대씩 가지고 넓은 집을 소유하면 행복하다라는 기대나 생각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보다 성숙하거나 복잡한 자유를 말하는 사람은 당연히 존재하며 단순무식하게 다수결투표를 민주주의로 말하는 사람만 있는게 아니다. 그러나 정치판의 난장판이 그래도 존재하듯이 보다 성숙하고 복잡한 자유를 말하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해서 단순화된 자유, 이데올로기나 종교가 된 자유라는 것에 세뇌된 대중이 없는 것은 아니며 사실상 그런 기대나 옹호가 세상의 흐름을 결정해 버리는 일이 많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 바로 미국이라는 관념의 몰락, 혹은 자본주의 사회자체의 몰락이라고 말해지는 오늘날의 현실이다. 내가 미국의 대안으로서 유럽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이같은 자유주의의 중독은 서구 역사에서 매우 뼈속깊이 각인된 것이라서 유럽인들이 역사를 뒤집기 어려울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가능성이 있다면 자유라는 것의 가치를 서구사회에서 배웠지만 그만큼 중독이 된 것은 아닌 비 서구사회에 오히려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대안은 무엇일까.

 

그럼 대안은 무엇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생태주의적 관점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생태주의적이라는 단어하나가 무슨 뜻을 가지는 것인지는 물론 글하나로 심지어 책한권으로도 다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유를 믿을 때 자유는 자명한 것이라 설명이 필요없지만 그와 약간 다른 것을 말하려면 길고 때로 어려운 논의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때 생태주의라는 단어는 또다른 엉성한 이데올로기나 종교가 되어 자유라는 종교보다 오히려 조악한 것이 될 것이다. 

 

그래도 몇가지는 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먼저 중요한 것은 미국적인 것에 대한 대안은 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참많다. 대안은 반미도 친미도 아니다. 아이스크림을 먹어왔는데 누가 아이스크림말고 자장면을 먹자고 했다고 하자. 그랬을때 자장면은 '비아이스크림계' 음식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착오가 있다. 아이스크림말고도 먹을 수 있는 것은 무한히 있다. '비아이스크림계' 음식이라는 단어를 쓴다는 것은 이 사람이 아이스크림말고는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현실에 대한 대안을 반미로 정리해 버리는 것이 그런 것이다. 조금이건 많이건 다른 것뿐이다. 그것은 미국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며 자유나 평등의 가치를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대안이 반미는 아니지만 미국적 삶에 대한 비판은 계속 될수 밖에 없다. 왜냐면 많은 사람들이 그걸 유일한 삶의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세뇌되고 고정되었기 때문이다. 박제가 되고 이데올로기가 된 자유나 평등이라는 단어를 깨부시고 선입견이 없어진 관념을 다시 세울 필요가 있다. 그것도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박제가 되고 이데올로기가 되겠지만 그건 피하기 어려운 과정일 것이다. 

 

생태주의의 핵심은 지속가능한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http://blog.daum.net/irepublic/7888246 ) 왜 이게 필요한가에 대해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고찰따위는 하지 말도록하고 보다 작은 것을 보도록 하자. 한국도 노령인구가 늘면서 이 지속가능하다라는 단어에 관심이 높아졌고 앞으로 점점 더 그럴것이다. 요즘은 의학이 발달해서 지금 60이 안된 사람들은 적어도 백살까지는 산다고 봐야 한다. 이말은 은퇴하고도 거의 반세기를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건 엄청난 것이다. 아버지가 은퇴하고 30년이 지나면 이번에는 자식도 은퇴한다. 자식에게 기댈 수 있을까? 결국 중요한 문제는 삶의 질을 유지하면서도 유지비가 안들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아파트에서 버글거리면서 큰 조직에서 출세하고자 경쟁에 몰두하는 도시적 삶은 분명히 아니다. 작은 공동체, 개인적 자아찾기가 절실해 진다. 물질적으로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도 그렇다. 정신적으로 안정적이 되지 못해도 인간은 죽는다. 그렇다고 물론 세계적이고 국가적인 공동체나 조직을 부정하는 것은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말이다. 우리는 결국 다원화 세계를 성공적으로 유지시킬 철학과 관점이 필요하다. 즉 큰 조직화를 붕괴시키지 않으면서도 작은 다양성이 같이 공존할수 있게 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다원화 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은 오래되었지만 그 대안이 제대로 세상이 뿌리 박는 것은 거리가 먼 것같고 대안이란게 확실히 있는데 사람들이 몰라준다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서양적냄새가 풍기는 생태주의라는 말에만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도 화이부동이란 말을 쓰고 화쟁사상이라는 전통적 사상도 있지 않은가. 

 

문제는 그런 버무려 얼마나 설득력있고 깊이있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는가에 있다. 시도하는 사람은 많다. 장일순의 한살림운동도 그런 예가 되는게 마땅하다. 그러나 어떤 강한 힘이 어디선가 자라나올 것인가는 아직 확실치 않다. 생각에는 그게 한국사회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흐름이 될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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