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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한을 가진 한국인, 정을 가진 한국인

by 격암(강국진) 2014. 6. 23.

14.6.23

최근에 1993년에 나왔던 임권택감독의 영화 서편제를 봤습니다. 이 이야기는 원작이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이며 지금도 뮤지컬로 만들어져서 상연되고 있습니다. 2014년에 다시 본 서편제는 그저 담담하게 보기엔 너무 슬픈 이야기였으며 단순히 슬픈 것을 넘어 무섭게까지 만드는데가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는 그저 슬프다고 하지 않고 한이 맺혔다라고 하지요. 

적어도 나이가 40이 넘은 사람들은 한국인의 정서는 한이라는 말에 익숙할 겁니다. 누가 시작한 말인지는 몰라도 예전에는 참 자주 돌아다니던 말이었습니다. 한국인의 정서는 한이다. 한국인의 정서는 한이다. 이 서편제안에서도 노래를 잘 부르려면 한이 있어야 하고 그 한을 넘어서야 한다는 대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저는 전부터 왠지 이 말이 싫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서편제를 다시 보면서 내가 왜 그말을 싫어했는지 알게되었습니다. 그것은 한이라는 정서의 본질이 삶과 세상의 부당함에 대한 공포와 인간에 대한 불신이라는 것을 보다 또렷히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이라는 것은 그냥 살다가 보면 이득을 볼 때도 있고 손해를 보는 일도 있다같은 것이 아닙니다. 한이라는 것은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회복될 수 없게 상실하는 경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한이란 그런 경험에 대한 공포이며, 그런 무시무시한 짓을 저지르는 것이 인간이다라는 메세지입니다. 

 

한이라는 참으로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공포가 한국인들의 슬픈 역사에 기반해서 나온 것이라는 점, 즉 실제로 어떤 세대, 어떤 사람들에게 그 공포는 간접경험에 의한 예측이나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는 점은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가볍게 나는 한이라는 단어가 싫다라고 말한다면 그 분들은 너는 현실을 아직 모른다라던가 팔자가 좋으니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라는 핀잔을 듣게 될지 모릅니다. 그건 마치 아파서 쓰러져 꼼짝도 못하는 사람에게 어서 빨리 일어나지 않고 뭐하냐고 냉정하게 말하는 것처럼 들릴 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한의 정서의 오묘함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한의 예술적 승화같은 말은 서편제에서도 나오는 말입니다. 

 

물론 관점에 따라 한이란 상처입은 사람들을 지켜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생을 무자비하고 무참한 전쟁터처럼 파악할 때 회복할 수 없이 난도질이 되어버린 나의 인생도 특이한 것은 아니며 약간은 더 참을 수 있는 것으로 변할 것입니다. 게다가 미약하게나마 한의 승화, 한의 극복을 이야기함으로써 인간의 승리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의 정서를 미화하는 것은 그 근본에 이르면 인간은 혹은 조선놈은 어쩔수 없다. 무서운 짓을 저지른다. 그저 돈이나 좀 빼앗고 모욕이나 주는 것이 아니다. 상상도 할수 없는 바닥없는 추락을 하게 된다. 이런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는 효과가 분명히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관점과 효과도 있는 반면 한의 정서는 절망과 패배의 선언이며 우리안의 사악함에 대한 변명이 되기도 하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슬픔은 상호비교할수 없는 것이지만 물론 크나큰 슬픔은 한국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흑인노예들의 아픔은 우리만큼 절절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으며 프랑스혁명시대의 민중의 아픔은 아픔이 아니라고 할 수 없고 일본도 하층민의 삶에 아픔이 없었겠습니까. 과거 식민지였고 지금도 그다지 못사는 나라들은 물론이고 지금 잘사는 부자나라에서도 서민들에게 슬픔은 어느나라에서나 넘쳐나도록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이야기가 항상 한의 정서같은 것으로 흘러가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레미제라블과 같은 작품을 생각해 봅시다. 레미제라블은 서편제와 같은 이야기와 이보다 다를 수 없게 다릅니다. 그래서 그 두개의 이야기는 애초에 비교될 수 없는거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이 두개의 이야기는 모두 하층민, 천대받는 사람들의 슬픔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깊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단지 그 슬픔에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극단적으로 달라지기 때문에 이 두개의 이야기는 애초에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일뿐입니다. 

 

레미제라블에서 배고파서 훔친 빵하나때문에 감옥에 갖힌 장발장은 신부의 도움을 받아 새사람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공장노동자의 딸 코제트를 위해 헌신하지요. 서편제에서는 스승에게 쫒겨나 떠돌이 소리꾼으로 살아가는 유봉이 피하나 안섞인 두 아이를 키우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런데 장발장과 유봉을 비교하자면 장발장은 자기를 도와준 신부를 배신했던 과거에 대해 부끄러움은 있을지언정 다시 성공하고 나름 행복하게 삽니다. 반면에 유봉은 자기의 동문들에게 허세를 부리며 니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실은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장발장은 공장에서 일하던 한 여인의 딸 코제트를 위해 헌신합니다. 하지만 유봉은 소리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은 있지만 인생에 대한 깊은 좌절 속에서 술로 세월을 보내고 심지어 양딸에게 약을 먹여서 일부러 장님으로 만듭니다. 장님으로 만들고서도 노래를 시키고 유봉이 죽자 유봉의 양딸 송화는 이 남자 저남자에게 소리도 팔고 몸도 파는 유랑생활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도망간 동생 동호를 기다리는 것이 삶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송화를 이렇게 까지 만든 것은 유봉입니다. 그리고 그런 유봉을 송화는 용서합니다. 그러나 송화도 유봉도 뚜렷한 행복과 안식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레미제라블을 봐도 민중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당연히 민중을 괴롭게 하고 슬프게 하는 것은 부자들이상으로 용기없고 비열하고 돈을 밝히는 다른 서민들입니다. 그러나 고초속에서도 주인공들은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이 되는 어떤 것을 포기하지는 않는 끈기와 희망을 유지하며 종국적으로는 승리합니다. 혁명의 완수, 세상의 변혁이라는 목적에 도달하건 안하건 그리로 걸어가는 인간을 그립니다. 

 

그런데 서편제의 인물들은 한의 승화라는 단어를 쓰면서 거의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표현합니다. 딸을 아낀다면서 그 딸의 눈을 멀게 하는 아버지와 그 오랜 시간 고생하면서 노래를 배웠지만 이제 이남자 저남자의 노리개감이 되어 살아가며 후미진 시골방에서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누나, 그 누나는 어렵게 어렵게 동생을 만나지만 노래를 불러서 한을 승화시킬뿐 서로 내가 누나고 내가 동생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헤어집니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삶이 너무 기구해서 그리워하던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면서 서로 자기라고 말도 하지 못합니다. 송화는 그것을 서로의 한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의 상처는 감내할 수 없다는 공포에서 나온 것일 것입니다.

 

서편제에서의 한의 승화에서 어쩌면 어떤 분들은 예술의 완성이나 인간의 진정한 승리를 보았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모든 비극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계속되기를 포기하지 않고 유장하게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 해석에 가슴 깊게 공감하는 사람은 아주 소수일것입니다. 어렵게 만난 남매인 송화와 동호는 결국 한번 웃어보지도 못합니다. 문제는 송화와 동호가 아니라 그걸 보고 읽는 시청자와 독자입니다. 그들에게 서편제라는 이야기가 뭔가가 문제입니다. 서편제식의 한의 이야기에서 남는 대부분의 것은 결국 앞에서 말한 무시무시한 한의 본질입니다. 삶이란 결국 죽을때까지 제대로 한번 웃어볼 수도 없는 그런 것이라는 패배의식입니다. 삶이란 희망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공포입니다. 서편제를 보다가 아내에게 저는 이런 말을 하지 않을 수없었습니다. 이런걸 보면 국악배우던 학생들 다 도망가지 않을까?

 

이것은 기본적으로 한국의 지성계, 예술계의 패배의식일 것입니다. 현실의 아픔이 반드시 아픔으로만 기록되지는 않고 그걸 기록하는 사람의 마음이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술과 진리가 언제 승리한 적이 있다더냐라는 자조가 이야기와 음악과 그림속에서 거듭 반복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분노와 공포는 결국 확고한 패배로 가는 길입니다. 결국은 스스로 행복하게 살수 있는 길, 말만 아니라 진정 안빈낙도같은 것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한을 기록한 이야기에는 마당놀이같은 것에서 보여주는 해학, 양반들에게 당하고 살았을 것이 뻔한 노비들이 양반을 희롱하고 나름대로 세상을 즐겁게 해학적으로 살아간다는 수준의 삶의 달관도 없습니다. 

 

이것은 한국에서 하루키같은 외국 소설가의 작품이 엄청나게 팔리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한국토종작가는 과거에는 더욱 그랬으나 지금도 대부분 여전히 한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 자기를 상실한 이야기를 쓰거나 그것을 살짝 가려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한국의 책읽는 젊은 세대에게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것을 한국의 창작동화라고 부르는 것을 읽었을때도 느꼈습니다. 가난해도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이야기가 많은 미국이나 유럽의 동화와는 달리 한국의 동화는 종종 짙은 그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물론 서편제 한편의 영화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1990년 초반까지의 한국영화와 소설은 대부분 다 그랬으며 오히려 서편제는 한의 정서에 파뭍힌 시대의 마지막 영화에 가깝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한국영화들을 즐기게 된 시기는 훗날 노무현 정부에서 문화부장관을 하기도 했던 이창동감독의 데뷔작 초록물고기라는 영화와 함께 시작됩니다. 1997년에 나온 이 영화는 조폭의 졸개가 되어 두목의 애인과 사랑을 나누다가 죽는 막동이를 보여줍니다. 폼안나는 삶을 살고 결국은 조폭두먹에게 살해되는 막동이의 삶은 여전히 한을 떠올릴 만큼 비극적이지만 초록물고기와 서편제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서편제의 남매는 서로에게 말도 못하지만 막동이는 이 세상에게 '이씨팔!'하고 욕설 한마디를 내뱉을 감정을 표현할 인간, 그래도 조폭두목에게 대항하는 인간으로 그려집니다. 즉 비극의 주인공이라도 한의 정서에 빠져들기 보다는 능동적으로 저항하는 인간인 것입니다. 죽음을 당하더라도 제대로 저항했다는 것은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마지막 한조각의 자기는 잃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도피로 공포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를 직시한다는 것은 그 공포가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초록물고기의 주인공인 한석규는 찍는 영화마다 인기를 얻었습니다. 후일 그 인기는 송강호로 이어집니다만 그들의 작품속 모습은 강한 악을 베트맨이나 스파이더맨처럼 멋지게 무찌르지는 못하더라도 공포에 저항하고 그렇게 하는 자신에게 최소한의 사랑은 유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적 한국영화의 새로운 시대는 이렇게 활짝 열립니다. 한국영화는 백만돌파가 충격적인 관객이었던 시대에서 천만관객 돌파의 시대로 가게 되고 한류라는 말이 퍼집니다. 대장금의 캐릭터도 잘난 왕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승승장구했거나 비천한 신분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한을 삼키는 캐릭터가 아니었습니다. 한국영화의 변화의 시대가 정권교체의 시대였던 김대중-노무현 정권시절과 겹쳐지는 것은 우연한 일만은 아닙니다. 즉 부분적으로나마 한이라는 이름의 공포가 극복되자 세상은 변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의 정서는 분명 정치적 결과도 만듭니다. 분노와 공포는 우리에게 우리는 극한의 상황에 있다, 이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다, 아니 그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존재할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다라고 외칩니다. 그런 극한의 상황은 우리의 선택을 흑백론적으로 만듭니다. 극한의 상황이니 극한의 방법이 동원되어야 하는 것이죠. 논리도 정의도 사실 극한에서는 잊혀집니다. 극한의 상황에서는 이기기위해, 살아남기 위해 뭐든지 해야 합니다. 합리적이고 인간적이고자 하는 목소리는 비현실적이라던가 순진하다는 비웃음을 듣기 쉬워집니다. 

 

사실 극한의 상황을 말하는 속에서 잊혀지는 것은 인간 자체입니다. 즉 이 세상은 따뜻한 인간들, 좋은 인간들의 연대라는 사실,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은 망각되고 모두가 이기기 위해 악귀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해집니다. 그렇게 되는건 피할수 없고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됩니다. 모든 극단적 탐욕과 악도 그저 인간이 원래 그렇다 정도로 파악됩니다. 그리고 물론 그러는 가운데 합리적인 삶이나 선택같은 것은 완전히 실종됩니다. 

 

한의 문제라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제 부유해진 한국에서는 이미 그런 문제는 과거의 일이라고 할지 모릅니다. 요즘은 특히 젊은 세대에게 한이라는 단어는 이제 생소한 단어가 되기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 한국인의 정서는 한이다라는 말은 전처럼 사람들입에 반복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중년이나 노년층에서 한의 정서는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인구구조를 생각할 때 그것은 개인적 아픔의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크나큰 사회적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어떤 사회로 남아있으며 어떤 사회로 변해가는가 하는 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즉 여전히 그 커다란 공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엄청난 숫자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공포가 한국을 유지하고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다만 그들은 사회활동과 문화활동에서 있어서 소극적이기 때문에 인터넷과 미디어를 통해 보는 세상에서는 종종 크게 부각되지 않습니다. 대개 선거때나 여론조사때가 되어야 그 존재를 드러냅니다. 그들은 잘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분리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고 유튜브나 블로그나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정보를 얻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세상과 그들에게 보이는 세상은 다릅니다. 그 양쪽의 사람들이 많은 소통을 나누는 세태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소위 빨갱이 컴플렉스라고 불릴만한 것을 가진 분들은 대부분 한의 정서라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전쟁을 경험하거나 그 직후의 세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상실의 트라우마를 겪습니다. 그걸 어떤 사람들은 또 악용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의 상처와 공포를 뒤집어서 이 세상은 공포스러운 곳이라는 것을 계속 상기시킵니다. 결국 한의 정서는 정권이 교체되는가 마는가 하는 수준의 문제입니다. 

 

한국에서 유달리 종교에 기대는 사람이 많은 것도 이때문일 것입니다. 공포와 트라우마는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에 귀의하게 만듭니다. 때로는 그게 사이비 종교일지라도 말입니다. 또한 사실 한의 정서는 여야의 지지자를 막론하지않고 퍼져있습니다. 새누리당이건 민주당이건 진보정당이건 또한 정치따위 관심없건 그렇습니다. 이번에 이걸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식으로 모든 것을 다 걸고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일은 어디나 넘쳐납니다. 

 

한의 정서는 개개인의 삶에 파고들어서 가족을 파괴하고 개인의 삶을 파괴합니다. 공포에 질린 인간은 결국 친구를 믿을 수 없고 배우자를 믿을 수 없고 부모를 믿을 수 없고 자식도 믿을 수 없으며 스스로도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을 것은 물질같은 것뿐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비일관적 행동으로 서로를 괴롭히는 인간이 되게 만듭니다. 며느리를 괴롭히는 시어머니의 마음에, 친구를 배신하는 남자의 마음에, 부모를 배신하는 자식의 마음에, 한이라고 불리는 공포는 또렷히 남아 있습니다. 결국 개인적인 차원에서 합리적인 삶은 파괴되고 그결과 결혼이 파괴되고 가족이 파괴되고 아이와 노인은 버려집니다. 외로운 사람이 너무나 많아서 자살율은 언제나 엄청난 수준입니다. 

 

 

 

 

 

 

한이란 상실과 고통의 기억이며 잃어버린 것들은 대개 돌려놓을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설사 누군가에게 맞은 사람이 자기도 한대 때려준다거나 뭔가를 도둑맞은 사람이 그것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한의 극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의 승화나 극복이란 결국 상실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는 누구도 뭔가를 말도 안되게 빼앗기고 고통당하는 일은 있을 필요도 없고 있을리도 없다는 것을 믿게 되는 것이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마당놀이의 해학을 말했습니다만 결국 승리는 분노가 아니라 웃음에서 나옵니다. 서울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유모차를 끌고나와서 웃음의 장소를 만들어 내는 민중은 죽창을 들고 횃불을 든 민중보다 승리에 가깝게 있습니다. 김어준의 '쫄지마 시팔'이라는 말에 쾌감을 느끼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한의 극복이란 따뜻한 인간의 존재를 믿을 수 있게 되는 것, 누구도 내게서 나의 본질을 빼앗아가지는 못할거라는 믿음을 얻는 것입니다. 예술가에게 예술의 완성이 한의 승화가 될 수있 것은 그 예술이 곧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 지독한 시간도 예술을 빼앗아가지 못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그것을 제공할때도 있기는 합니다만 한의 극복은 기본적으로는 사회적 차원에서 정신 문화적 차원에서 이뤄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의 가치관에 뭐라 말을 해서는 안될 사이비 지도자들도 이 세상에는 넘쳐나도록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에 있어서 한국의 지식인은 그다지 성과를 내지 못해왔습니다. 

 

저는 윤오영의 수필집 곶감과 수필을 좋아합니다. 윤오영은 백사장의 하루에서 라는 수필을 포함한 여러곳에서 스스로 자신은 정에 관한 것을 쓰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지식이 아니라 쉬운 일상어로 일상을 그려낸 그의 수필을 읽으면 나는 크고 작은 삶의 현장속에서 미약한 생물들이나 사람들에게 정을 느끼던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의 수필들을 읽으면 그래 세상은 살아볼만한 것이야라고 세상에는 그래도 정이 있어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한의 정서를 넘어서는 글이지만 제가 아는 것이 많지 않은 까닭인지, 한국에 그런 글이 흔하지 않은 까닭인지 윤오영의 수필 같은 글은 그리 흔하질 않습니다. 그나마도 요즘은 읽는 사람이 드문 것 같습니다. 

 

요즘은 한국인의 정서는 한이라는 말은 전처럼 자주 들리지 않습니다. 그대신 한국인의 정이 사라졌다는 말은 자주 들립니다. 얼마전에 있었던 세월호 사건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이 되었던 이유중의 하나도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장애가 있어보이는 괴물같은 사람들이 한국에 넘쳐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정이 넘치는 사회가 되는 것이 한이 극복된 사회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정을 가진 한국인이 사라진다는 말은 우리의 한의 문제는 해결되기는 커녕 오히려 점점 더 심각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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