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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주체적인 삶과 한국 그리고 한류

by 격암(강국진) 2018. 12. 31.

2018.12.31

 

주체적인 삶이란 자주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지금부터 나는 남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내 주관대로 살겠다라고 결심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서너살 먹은 아이가 자기 고집대로 뭐든지 하려고 하는 것도 주체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주체적인 삶이란 우리의 결심따위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 주체적이라는 것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만들고 쌓아서 이룩되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태어날 때부터 딱 던져져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씩 만들어 지고 확장되어져 온 존재다. 어떻게 말하면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 대처하는 프로그램이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이런 프로그램을 생각해 보자.

 

경우 1 : 사탕이 보이면 입에 넣는다. 

 

이 프로그램은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 경우 1의 경우에는 어떻게 판단하는가가 정해져 있지만 그 이외의 모든 경우에는 답이 없다. 내 맘대로 한다고?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나는 뭘 내 맘대로 하는가. 

 

또 다른 프로그램을 보자. 

 

경우 1 : 사탕이 보이면 입에 넣는다. 

경우 2 : 경우 1 이외의 경우에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한다.

 

이 프로그램은 앞의 것보다는 개선된 것이다. 적어도 멈춰서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다지 자주적이지 않고 자유롭지 않다. 대부분의 일에 대해서 그저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예들에서 프로그램은 우리의 정신을 상징한다. 나는 우리가 이런 단순한 프로그램이라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 프로그램들의 예를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뭐든지 내 맘대로 한다는 결심 따위는 주체적인 삶과 아주 작은 관련만 있다는 것이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데 떠오르는대로 맘대로 막 하면 그게 주체적인 삶인가? 아무 것도 모른다면 차라리 엄마나 선배같은 주변 사람이 시키는대로 하는 것이 더 현명한 판단이 아닐까? 

 

문제는 여기에서 나온다.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나 시공간이라는 환경안에서 우리의 정신을 구축해야 한다. 다시 말해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대비와 고민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대비와 고민이란 그야 말로 방대한 것이라서 어떤 의미로 어떤 인간도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히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건 마치 인류가 이룩한 모든 문명적 성취를 처음부터 혼자서 다 이룩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애초에 한국인인 나는 한국어를 스스로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주체적 생각이란 말인가. 나는 사회가 나에게 준 개념들을 제한되게만 검증하고 쓴다. 그럴 수 밖에 없다. 그 개념들의 합리성은 오직 사회공동체에 의해서만 보증되는 것이다. 누구나 어떤 사회적 권위를 받아들이고서야 세상을 살 수가 있다. 유한한 나 개인으로서는 그 모든 말들의 실체를 다 고민하고 검증할 수 없다.

 

그러나 완전히 주체적이 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해도 정도의 문제라는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민족은 자신의 삶의 철학을 전혀 검증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대로만 받아들인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나 민족은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어떤 사람은 부지런히 세상일과 자신이 쓰는 말들에 대해서 고민하고 검증한다. 그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하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말을 검증해서 쓰고 때로는 작게 나마 말들을 만들고 변형시켜서 자신의 언어로 만들어 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겨우 손톱의 때만큼 더 주체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래 이제부터 주체적으로 사는거야 라고 결심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닐지라도 겨우 그걸로 뭐가 되겠는가? 자신을 쌓고 만들어야 그때부터 진짜 주체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프랑스 철학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공감하면서 그것을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꾸려 나간다고 하자. 그런데 프랑스철학이란 당연히 프랑스 사람의 역사와 사고가 누적되어 만들어 진 것이며 프랑스어로 된 것을 번역해서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프랑스 사람이 똘레랑스를 말한다던가 민주국가를 말한다던가 기표와 기의가 어떻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어떤 의미로 우리는 영원히 그 말들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느낄 수 있는 때는 우리가 프랑스철학을 넘어서서 우리가 그들의 생각과 표현에 얽매일 필요가 없고 기본적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구축한 사고에 의해서 행동하기로 결정한 후에야 가능하다. 결국 우리가 프랑스철학에 얽매이는 한 우리는 우리의 사고에 혼동을 느끼면 프랑스 시민 혹은 프랑스 철학자의 행동을 보고 그냥 따라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답은 그들의 행동이니까 말이다. 

 

또다른 예를 들자면 서구권에서 당연시 되는 개인주의적인 관점이 있다. 즉 환경의 영향은 일단 개인의 성질에 비해서 사소하고 나중에 생각하면 되는 어떤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사회가 있기 전에 개인이 있고 문맥이 있기 전에 팩트가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이다. 그런데 이런 것도 우리가 그들의 철학을 배우다 보면 그냥 사고의 한 특징이 아니라 자명한 사고의 방식으로 여기게 되어 버린다. 

 

철학적 주도권을 가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칸트가 유럽철학의 중심으로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독일은 다른 나라에게 종속되어 사고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유럽의 중심으로 떠오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과학이나 음악같은 분야도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독립적 사고가 없는 곳에 인류 문화의 첨단에 서는 발전이 있을 수가 없다. 미국도 실용주의라는 자신들의 철학을 전개하고서야 비로소 유럽에 대한 종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세계의 슈퍼파워가 될 수 있었다. 

 

오늘은 다스베이다라는 팟캐스트를 듣다보니 진행자인 김어준이 우리나라의 언론사 기자들은 돈을 받는 것도 아닌데 마치 우리가 미국이라도 된 것처럼 미국 사람의 입장에서 사고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들이 바보라고 비판한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는 주된 이유는 결국 그 기자들이라는 사람의 사고의 중심에는 미국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사고가 중국중심적이었던 조선시대에 우리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가졌던 것처럼 이제 우리나라는 미국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식인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한국 대학에서 유학파 교수의 대부분은 미국에서 박사를 받은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지식인의 시야는 미국 중심적인 것이 당연하고 거기에서 벗어난다고 해봐야 유럽중심적이거나 일본중심적이다. 일본중심적 사고는 물론 일제 식민지 시대서 부터 내려온 전통에 따른 것이다. 한국의 개혁이 지지부진한 이유의 뿌리에는 바로 정신적 엘리트들의 무능이라는 문제가 있다. 돈과 권력과 정보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무능하며 그들의 머리는 오염되어 있고 주인의식이 부족하다. 

 

우리 눈이 우리 중심적인게 아니라 미국 중심적이고 서양 중심적이며 심지어 일본 중심적이고 중국 중심적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필연적으로 한국을 팔아 먹는 매국을 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판단하는 때도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것같은 정치가나 기업인들이나 법조인들이나 지식인들을 종종 본다.  재벌들이 나오는 막장드라마에 중독되어 재벌중심적으로 사고하는 빈민들이 빈민을 희생시켜 재벌들을 부자로 만드는 일이 좋은 일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한국에서 주체적인 사고를 하려면 오히려 학벌이 높을 수록 어렵다. 왜냐면 앞에서 말한대로 대학이야 말로 진정으로 외국에게 더 많이 장악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사실 문학이건 대학이건 언론이건 한국에서 권위를 자랑하는 것중에 한국의 역사적 뿌리에서 자라나온 것이 얼마나 있는가. 다 일제시대로부터 이어져온 것이거나 미국같은 곳과 연결되어 권위를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고로 채워진 곳에서 우리가 주체적 삶과 사고를 배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이제껏 한국교육과 학문의 핵심은 흔히 '이해는 안되겠지만 무조건 많이 외워'라던가 '더 발전한 저들을 배우자'라는 것이었다. 실은 지식인의 정점에 있다는 교수들 조차도 이공계건 인문계건 비주체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수 밖에 없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우리나라에서 누가 교수가 되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렇다. 주체적 사상가가 되려고 시도하는 한국인은 대개 사이비 약장수쯤으로 내몰리기 쉽다. 감히 어디서 주체를 논하는가 외국의 누구누구가 이랬다 저랬다라는 말을 줄줄이 늘어놓아야 옳은 것이다. 

 

이제까지는 부정적인 이야기가 가득했지만 나는 긍정적인 이야기로 이 글을 마치고 싶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이제 엄연한 선진국중의 하나가 되었다. 한류가 세계 여러곳에서 인기를 얻고 있기도 하다. 철학적 주도권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칸트같은 철학자 혹은 아인쉬타인같은 과학자만을 떠올릴지도모르지만 문화가 팔린다는 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 우리가 수동적으로 문화와 정신을 수입만 하는 곳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한국사회는 어느 정도의 주체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그것도 점점 더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 대중의 힘이며 한민족의 저력이다. 우리는 대중문화라는 분야에서 바라보면 영국이나 프랑스나 미국을 떠올릴 정도의 문화강국으로 성장했고 더욱 커져가고 있다. 문화상품이란 다르게 말하면 정신적 매력을 말한다. 즉 우리의 사고방식에 매력적인 부분, 합리적인 부분이 없으면 그것이 상품이 되질 못한다. 아름다운 배우가 한국에만 있겠으며 멋진 컴퓨터 그래픽이 한국에만 있겠는가. 뭔가 한국이 만들어 낸 어떤 부분이 세계적 보편성을 가지고 삶에 대처하게 해주기 때문에 음악이건 영화건 드라마건 팔리게 된다. 이것은 분명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부분이다. 반도체나 자동차를 파는 것도 대단한 것이지만 사실은 문화적 경쟁력이란 것이 더욱 대단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의 문제일뿐 중국이 한국의 노하우를 배워가면 과거에는 일본문화물이 인기가 있었고 홍콩 문화물이 인기가 있었듯 한류는 지나가고 중국 문화가 세상을 채울 거라고 생각하는 것같다. 그럴 수도 있다. 중국은 분명 대단한 잠재력을 지닌 나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뒤집어 말할 수도 있다. 중국은 저렇게나 거대한 내수시장과 돈을 가지고도 문화적으로는 매력을 풍기고 있지 못하고 일본의 인기도 떨어져 버린 면이 많다. 

 

그것은 중국과 일본이 모두 어떤 한계를 넘어서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오히려 정신적 변방이었던 한국이 조금씩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과연 중국과 일본이 한국만큼 자국의 역사를 직시하는 날이 올까? 일본은 나라에 생기가 없어서 정말 완전히 망하기 전에는 새로운 변화가 없을 것같고 중국이 세계적 보편성을 가진 문화적 매력을 가지는 날이 정말 올지는 알 수가 없다. 유튜브도 페이스북도 못하게 닫아 걸고 커진 나라가 그런 걸 시도하다가 거꾸로 망할 수도 있다. 최근에는 시진핑이 아예 종신으로 권력을 가지려고 한다. 그게 될까? 그들이 양자컴퓨터를 만들고 인공지능을 발달시켜도 사람과 문화가 그래서는 오히려 스스로를 해치게 될지 모른다. 즉 스스로 발전시키는 경제와 그들의 정치가 언젠가는 정면충돌해서 자해를 하게 될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한류가 강해질 수록 한국 사람이 사는 것이 편해진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의 외모가 새로운 미의 기준으로 평가되고 한국 음식이 새롭게 평가되며 한국식의 우정과 사랑이 새롭게 평가된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 수록 우리는 파리사람이나 뉴욕사람 혹은 런던 사람이 어떻게 한다더라 같은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그저 자신있게 한국 사람으로 행동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외국인들이 한국인들은 이렇게 한다더라라고 참조하는 일이 생긴다. 한국인의 주체성은 분명 확대되고 있다. 이 힘이 종국에는 한반도의 평화도 가져오고 경제적 번영도 가져오게 되리라 나는 믿는다. 

 

다만 아직도 숙제는 많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대로 지식과 권력과 돈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의 무능과 비주체성이다. 단순히 그들이 착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한국 사회의 주인인척 하면서도 실제로는 주인같은 사고조차 하지 않는다. 마치 한국을 털어먹고 도망갈 도둑처럼 사고하는 면이 있다. 진정한 엘리트 정신은 주인의식에서 나오고 그래서 외국에서는 전쟁나면 엘리트들이 먼저 나가서 싸우는 것이다. 내 나라니까 그렇다. 한국의 엘리트들은 전쟁나면 제일 먼저 도망갈 것같은 사람들 투성이다. 진보도 마찬가지다. 주체성은 별로 없고 외국의 권위를 너무 따라 하려고먼 한다. 이게 한국의 위기고 한국의 숙제다. 이런 비주체성이 대중이 모처럼 만들어 내는 좋은 에너지를 끝없이 낭비하게 하고 있는 것이 한국의 상황이었다. 그것이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한계를 정했고 지금의 문재인 정권을 흔들고 있기도 하다. 아무쪼록 앞으로는 좋은 흐름이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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