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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주의에 대한 단상

by 격암(강국진) 2012. 3. 8.

2003년의 천성산 도룡뇽사건은 기억에 남는 사건이다. 특히 오늘날 제주도 강정마을의 구럼비바위 지키기가 해군기지 건설반대의 일환으로 주장된 것과 비교된다. KTX 경부고속철도사업이 한창이던 2005년, 지율스님과 환경단체들이 정부의 환경평가서에 도룡뇽이 빠져있다고 하면서 소송을 제기했고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 재판으로 인해 생겨난 손해가 2조니 150억이니 하는 말은 많이 있었고 도룡뇽때문에 국책사업이 중단되었다라는 말로 단순하게 정리하여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룡뇽의 가치가 뭐라고 생각하는 것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극우 시사지로 알려진 한국논단에서는 오늘날 녹색 파시즘이 설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 도룡뇽 사건을 좋은 예로 든다.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593 ) 결국 환경단체는 나찌같은 놈들이야라는 말을 길게 쓴 이 기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생각할 점을 어떤 식으로건 제시해 주긴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기사의 결론이나 논조가 공감가지 않는다고 해도 오늘날 환경단체나 생태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이며 그런 기사에서 빠진 중요한 부분이 뭘까를 생각해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첫째로 빠진 부분이다. 물론 천성산의 공사는 진행되었고 공사진행 중단으로 인해 많은 돈을 쓰게 되었다. 이 공사의 정당성을 믿는 사람들은 이러한 돈을 헛돈을 쓴 것이라고 주장할테지만 과연 그런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태나 환경의 문제라기보다는 민주사회에서의 절차의 문제다. 

 

노무현 정권하에서 KTX 공사는 도룡뇽때문에 멈췄다. 그리고 제주도 강정마을의 구럼비바위 지키기는 이명박 정권하에서 전혀 멈추지 않고 불도저처럼 지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사비를 낭비시킨 노무현 정권, 돈을 절약하는 이명박정권이라고 결론 내릴수 있을까?  (부안 문제도 생각해 볼만 하다. 부안의 경우도 노무현 정권하에서는 멈췄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때라면 또 진압이 있을 뿐일 것이다. 그로인해 문제는 지리하게 오래동안 사회적 비용을 지출 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것이 그런 것이라면 이명박 정권이 불도저처럼 밀어부친 4대강공사들이며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세빛둥둥섬이며 인천 서울간 뱃길 조성사업 같은 것들, 인천시 개발문제 같은 것들이 다 문제가 안된다고 말해야 한다. 

 

이명박 정권하에서 밀어부치기를 한탓에 사회적 비용은 엄청나게 지불되고 있다. 민주국가는 그 핵심이 공감대조성이다. 사람들이 어느정도 납득을 해야지 답이 옳다고 해도 사람들이 납득하지 않으면 잘하고 있는게 아니다. 그런데 공감대 조성이란건 투명한 정보공개와 공정한 평가 과정같은 것을 전제로 이뤄지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어딘가에서 빨간불이 켜지며 스톱사인을 아무리 외쳐도 홀로 외로이 밀어부치는 불도저가 존재한다면 공감대고 뭐고 없다. 그럴때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질수 있는가. 박정희나 전두환 독재때 그랬듯이 국가를 운영하다보면 사람 몇십 몇백명쯤 죽을 수도 있다고 그냥 넘어가면 되는가. 그게 넘어가 지는가. 

 

그러므로 환경문제냐 아니냐를 이전에 누군가가 문제를 주장하고 법원이 판단하여 정지시킬만한 공사를 정지시키는 행위는 낭비가 아니라 돈을 절약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회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그렇게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은근히 독재를 주장하는 것이다. 국민적 공감대를 뭐하러 조성하는가. 내가 다아는데. 그냥 밀어부치면 된다고 하는게 바로 독재다. 

 

둘째로 생태주의가 파시즘이 될수 있다는 지적은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사실 모든 무슨 무슨 주의는 다 파시즘이 될 가능성이 있다.  생태주의에 관련된 주장들에 대해 내가 심층적으로 공부를 한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아주 다양한 종류의 생태주의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중 많은 것들은 어떤 의미에서 종교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내말은 신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가치관을 형성하는 종교처럼 생태주의적 주장을 함에 있어서 자연이라던가 지구라던가 거대 생태계 따위의 관점에서 생태적 주장을 풀어나가는 경우가 많고 적어도 그렇게 생태주의를 이해하는 사람은 세상에 많다는 것이다. 

 

이런 거시적 관점은 위험도가 있다. 그것은 마치 수천년의 역사를 조망하거나 우주적 규모의 탄생과 소멸을 이야기하느라 개개인을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오류같은 것이다. 어느 분야나 다양한 사람이 있는데 환경론자중에는 인간과 짐승사이의 가치에 차이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이런 판단이 생기는 것은 우리가 뭔가 거대한 것의 일부로서 우리자신을 보는 관점을 택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지만 이런 관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거기에 빠질때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소한 것들을 모두 정말 사소한 것으로 무시하는 결과가 올수 있기 이는 바로 폭력적 전체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없지 않은 것이다. 

 

나는 진정한 의미의 생태주의는, 다시 말해 내가 좋아하는 방식의 생태주의는, 그렇게 우주에서부터 시작해서 개인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내부에서 부터 시작해서 밖으로 퍼져가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즉 우주적, 지구적 질서에서 시작하여 우리 작은 인간의 현실을 인식하는 순서를 따르는 대신에 우리가 우리의 환경과 어떻게 합쳐지는가, 우리의 감수성과 우리의 일상적 가치판단은 어떻게 이뤄지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연장되어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대개 바깥으로 부터 안으로 향하는 생태주의에 빠지기 쉽다. 그쪽이 훨씬 대단해 보이기 때문이다. 

 

생태주의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지는 꽤 되었지만 사람들의 고민의 깊이가 따라주지 않으면 그것은 괴상한 형태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상이 되어 결국 패퇴되고 말지 않을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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