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4.10
나는 두달쯤 전에 생태마을, 유지가능하게 살아가는 철학 (http://blog.daum.net/irepublic/7888246) 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거기서 내가 생각한 것은 생태마을이라는 것의 핵심은 저효율 고비용구조의 삶에서 고효율 저비용구조로의 삶으로 전환하는 철학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무한한 자원이 있다면 우리는 그 자원을 아끼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숲이 그렇고 물이 그러하며 부자집에 태어났다면 돈도 그러한 것이 될지 모른다. 돈이 무한정으로 있다면 돈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중에서 작은 것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가 않다. 필요한 자원중의 하나가 끊기면 우리는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자원이 부족해 지는 때가 없도록 신경쓰고 살아가는 삶. 이것이 유지가능한 삶이다.
사실 필요한 것의 목록은 끝도 없다. 돈같은 물질적 준비도 필요하지만 사회적 공동체적 가족적 인간관계도 중요하며 무엇보다 내 머릿속에 어떤 사고를 품고 살아가도록 준비하는가 내 몸을 어떻게 훈련시키는가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걸 하나하나 구비하려면 물론 매우 부지런하게 살아야 하지만 그 이상으로 과연 무엇이 더 가치있는 것인지를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노자에 보면 나만 홀로 어리석은듯 하고 남들은 다 똑똑하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똑똑한 사람들이란 대개 인생에서 필요한 것의 목록을 매우 작게 잡고 그것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이다. 여행을 가는데 먹어야 하니까라면서 쌀만 엄청나게 준비하는 식이랄까. 옷이나 로프나 랜턴같은 것은 관심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더 많은 쌀을 위해 미친듯이 뛰지 않는 사람을 가르키면서 종종 비웃는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너무 쉽게 확실한 것으로 확신한다. 물론 하나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특히 자신을 보호해줄 존재가 존재하는 젊은 시절에는 더 그렇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인식하고 소중히 여기는 태도가 필요하다. 삶에 대한 감수성, 더 넓은 시야가 매우 소중한 이유다. 그렇지 않을 때 무엇이 자신을 성공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커다란 오해가 있을 수 있다.
왜 유지가능한 삶이 중요한 가.
우리의 삶을 둘러싼 환경은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한다. 특히 현대사회에서는 더 그렇다. 우리는 심지어 지구반대편에 가서 사는 일도 쉽게 쉽게 한다. 몇백년전만해도 많은 사람의 삶이란 그저 자기가 태어난 동네에서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고 따라하며 많은 것들이 관습이란 이유로 정해져있는 변화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가 않다. 별별 미친 것같은 사고들이 돌아다니며 그들은 우리의 사고를 마찬가지로 미친 짓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환경은 종종 급변한다. 마치 오늘은 전쟁터에 있었는데 내일이면 갑자기 세상이 평화로운, 거의 지루한 농촌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럴 때 우리가 삶의 조건에 대해 오해하는 것은 문제를 일으킨다. 비타민부족으로 죽어가면서 원인을 이해못하는 사람처럼 낯선 환경에 가거나 환경이 갑자기 변해서 우리가 힘들어질 때 우리는 우리가 사는게 왜 이렇게 힘든지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유지가능하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한 주제일 수 있다.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 다시 말해 어떤 생명체도 어떤 국가도 영원히 유지가능하지는 않다. 우리가 그렇게 대단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살아있는 우리는 되도록 길고 오랜간 행복하고 쾌적하게 살고 싶다. 이런 목표를 달성해 보자는 것이 유지가능한 즉 지속되는 삶이란 문제다.
오늘날 지속되는 삶이란 말이 더더욱 중요해지는 두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첫째로 지구가 좁아지고 있다. 지구가 인간으로 채워지면서 소비가 미덕인 시대가 끝나간다. 석유자원이 한계를 들어내면서 에너지가 비싸진다. 식민지개발로 신세계개발로 돈을 버는 개척자시대, 산업혁명의 시대는 오래전에 끝이 났다. 전세계의 정부가 다 빚더미에 있어서 국민연금도 언제까지 믿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질문에는 경제난을 겪는 그리스 노동자들에게 물어보면 우리는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10년이니 20년이니 하는 일본의 예를 보자. 경제성장의 시대가 끝나고 일본사람들은 자급자족하는 삶, 작은 공동체를 유지해서 그 안에서 서로 돕고 사는 삶을 유지해 오고 있다. 일본이야기를 길게할 여백은 없지만 작은 텃밭을 가꾸고 자기 땅위에 지은 독립주택에서 살아가는 삶은 일본에서 보편적인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인간 수명의 증가때문이다. 오늘날 살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백살정도까지는 살아갈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극단적인 주장에 따르면 60세 미만정도의 사람은 과학발전의 결과로 돈만 있다면 영원히 살아갈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되는 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왕성한 40대 이전의 삶이후에도 50년 이상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삶중에 청장년 20년정도를 제외한 80년은 너무 약하거나 조심해서 살아야 하는 그런 시대가 된것이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건 유지가능한 삶의 형태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자의 타의에 의한 자살밖에는 선택의 길이 없다. 자살이란 단어가 너무 극단적으로 느껴진다면 오랜기간 고통스러운 삶을 유지하게 된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바꿔보자. 실제로 많은 노인들이 오늘날 한국에서 자살하고 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괴롭게 살아가고 있지만 말이다.
한마디로 왕성하게 배우고 활기차게 경쟁할수 있는 시기가 한참 지나고 나서도 우리는 오랜동안 살아가야 한다. 유지가능하게 살아가는 지혜가 왜 안중요하겠는가. 이것은 당연히 노후 생활의 준비라는 주제와 관련되는 것인데 나는 오늘날에는 젊은 사람도 생각해볼 문제가 아닌가. 한다. 하나의 삶의 패턴은 어느날 갑자기 준비되고 시작될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건강이 노후 생활의 준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중의 하나인데 젊어서 부터 관리해 두지 않은사람이 갑자기 건강해 질것인가. 그러나 실은 건강이란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당신은 어떤 삶을 지속하고 싶은가.
나는 우리가 삶을 생각하는데 있어서 잊지 말아야 하는 첫번째 원리는 바로 우리가 생명이라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이란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령같은 것이다. 환경과 생명은 잘 분리되어지지 않는다. 마치 바다와 파도가 갈라지지 않으며 위쪽없는 아랫쪽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너무 강해진 것은 관념적이고 과학적인 사고가 현대를 지배하는 폐해중의 하나다. 생명은 물질이 아니라 현상이다.
생명이 뭐냐 하는 것을 논하는 것은 이 글의 주제는 아니며 다른 글들에서 논한바있다. 다만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란 존재는 우리의 환경과 그리 잘 구분되는 존재가 아니라서 우리의 삶은 결국 우리 주변의 환경의 삶이기도 하고 따라서 지속되는 우리의 삶이란 우리 환경의 지속과 무관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막연히 환경이 중요하다같은 말을 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잘보고 생각하고 선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낸 후에 우리가 해야 할일은 우리가 어떤 생명이 되고 싶은가를 결정하고 확인하는 일이다.
이름과 실재는 종종 같은 것이 아니다. 이걸 같은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종종 실수를 저지른다. 예를 들어 청와대에 앉아서 모든 사람이 대통령이라고 불러도 그가 하는 행동이 도둑놈이라면 그는 도둑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교수라고 불러도 그가 하는 행위가 사기꾼에 가깝다면 그는 사기꾼인 것이다. 실은 직함이나 이름에 매달리는 사람이 세상에 많아서 세상에는 너를 판사라 불러줄테니 깡패를 해라라고 하는 식의 거래가 많이 있다. 그러면 판사라는 감투를 쓰고서 깡패로 살면서 자신이 판사라고 불리는 것에 행복해 하면서 사는 것이다.
이 말은 하는 이유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인간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지렁이가 될지 바닷게가 될지 인간이 될지 아니면 또다른 어떤 생명체가 될지를 선택할 수 있다. 선택한다고 해서 당장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렇게 되려고 노력해야 그렇게 되는 것이다.
갑각류의 삶
여러가지 생명체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여 존재를 유지한다. 우리가 어떤 전략을 쓰는가에 따라 우리는 다른 생명체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게같은 갑각류를 보자. 인간은 몸안에 뼈가 있지만 갑각류는 외부를 뼈로 덮은 형태다. 이렇게 하면 사실 외부의 환경과 자신을 더 잘 구분할수가 있고 따라서 더 안전해 지는 면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주변에서 게나 절지동물만 보게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몸을 딱딱한 외피롤 덮으면 환경에서 주어지는 불확실성에 더 잘 대처하는 것같다가도 (즉 환경적 변화를 딱딱한 외피로 무시한다.) 커다란 환경적 불확실성에 (즉 그 뼈를 부실 강력한 타격이 가끔 오면) 오히려 더 약하다.
개나 고양이 같이 겉으로 피부를 가지고 안으로 골격을 가진 동물들의 전략은 반대다. 피부는 갑각류의 갑옷보다 훨씬 약하지만 그대신 민감한 촉각을 발달시킬수 있을 뿐만 아니라 커다란 타격에도 치명적인 상태가 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단단한 껍질은 안쪽을 잘 보호하기는 하지만 가끔 있는 커다란 타격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피부는 보호능력이 떨어져서 평상시에 상처를 계속입게 만들기는 하지만 보다 민감한 신체를 가지게 하고 커다란 타격도 견뎌낼수 있는 것이다.
왠 게이야기인가 하겠지만 예를 들어 여러분이 노후준비라고 하면서 땅과 돈을 모으는 일에만 집중한다면 당신은 갑각류의 삶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어떤 지식이나 어떤 기계적인 과정에 절대적으로 의지한다면 당신은 갑각류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확실히 우리의 인생에 보호를 주고 우리 인생의 큰 문제인 미래의 불확실성을 어느정도 해결한다. 그것들은 당신의 껍질이 된다. 문제는 그 껍질 아래서 당신은 보다 둔감해지고 그러다가 드문일이지만 어떤 타격으로 그 껍질이 깨지면 그것은 아주 치명적인 일이 된다.
당신이 게로 살기로 했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은 없다. 당신은 당신이 삶을 지속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뿐이니까. 다만 당신은 당신이 당연한 삶을 사는게 아니라 그런 전략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런 삶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고 그 삶이 지속가능하지 않게 되면 그것은 당신이 잘못된 전략을 선택한 탓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당신은 게가 되기로 선택한거라는 것을 알필요가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같은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다른 생명들
세상에는 그러고 보면 스승이 참많다. 우리는 그것들에게서 삶을 지속하는 지혜를 배운다. 지렁이는 땅을 파고 들어간다. 지렁이는 눈도 없고 단순하지만 가장 변화없는 환경인 땅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지속할 수가 있다. 새는 몸을 가볍게 하고 하늘을 날기 때문에 살수가 있다. 하늘을 난다는 것은 굉장한 능력이니까 공짜일수 없다. 대개의 새는 그래서 잡히면 죽는다. 즉 약하다. 사자에 날개가 달린 동물은 상상의 동물이지 실제로는 근육질의 몸이 하늘을 날기는 어렵다. 즉 새는 몸이 약한대신 하늘을 날아 피할 능력이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가장 큰 뇌를 가지고 가장 민감한 감각능력을 발휘한다. 인간이 개나 벌이나 새보다 감각기관이 덜발달되었다고 말할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착각이다. 현대의 도구를 활용하면 당연히 인간은 어떤 생명체의 감각기관보다도 더 넓은 범위의 것을 보고 듣는다. 현대의 도구를 활용하지 않아도 인간은 다른 어떤 생명보다 더 넓은 세상을 인식한다. 바로 지능과 기억력때문이다.
인간은 역사를 기억하고 그것들을 인과적인 관계나 일반론같은 이론으로 축약한다. 언어를 발달시키고 다른 인간과 같이 지식과 기술을 축적시킨다. 그렇게 해서 다른 어떤 생명체도 따를 수 없는 거대한 세계를 인식한다. 나는 인간찬양론을 펼치려는게 아니다. 이 글의 문맥에서는 게나 지렁이에 대한 비하적인 의미는 없다. 다만 이것이 인간이라는 생명의 생존술이라는 것이다. 맹자는 소인과 대인을 구분하면서 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자기를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글에서 내가 말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대인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며 소인은 지렁이로 살기로 결정한 것이다.
거듭말하지만 나는 인간찬양론을 여기서 펼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지렁이나 게나 새로 사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 되는 경우도 많이 있을 것이다. 다만 지렁이가 되기로 했다면 지렁이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고 인간이 되기로 했다면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렁이나 게면서 인간인척하다가는 죽고 만다. 인간으로 살기로 했으면서 지렁이나 게를 부러워해봐야 헛 짓이며 인간으로 생존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인간으로 살기를 선택하고 그것을 위해 준비를 할수 있는 그런 정도의 자유만 가지고 태어났다. 준비가 없고 수련이 없으면 인간으로 살게 되는 것도 쉽지 않다. 즉 삶은 지속되지 않는다.
삶의 동심원
이런 그림을 생각해 보라. 원하나를 그리고 더 큰 원을 그바깥에 그린다. 이렇게 동심원을 여러개 그려나가면서 원의 중심을 둘러싼 여러개의 환경적 요소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런 그림에서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원의 중심에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더더욱 바꿔질 수 없는 것이다.
지속되는 삶을 꾸려가고 싶다면 우리는 먼저 중심에 가까운 동심원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잘 챙길 필요가 있다. 가장 작은 동심원은 나의 정신과 나의 몸이다. 돈이나 지위같은 것보다 가족이나 자기 정신이 더 소중한가는 각자 생각해 보라. 물론 상식적인 답은 있지만 절대적으로 이건 이거다라고 말할수는 없다. 뭐가 더 중심에 있는가는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이 어떻게 이뤄졌는가에 대한 그림, 이야기에 달려있다. 다시말해 나는 어떤 생명이 되기로 결정했는가에 달려있다.
물고기가 물을 빠져나오면 죽는다. 지렁이는 땅밖에서 위험하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포기하는 쪽이 더 행복을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여자에 빠져 인생을 허비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행복을 빨리 깨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관계를 어떤것으로 인식하고 발전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생명인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생명이 되기로 했는가를 생각하고 삶의 동심원의 중심에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그것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것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맺는 말
여기까지는 많은 부분이 너의 선택이라는 이야기였고 당연히 나에게는 나의 선택이 중요하다. 나는 어떤 삶을 살기로 결정한 것일까. 나는 세상의 여기저기, 여러학문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가족과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좋다. 또한 나는 변하지 않는 것은 따분하게 생각한다. 나는 가장 골치아픈 인간의 삶을 살기로 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제 인간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떤것이 필요할까 하는 질문일 것이다. 글이 길어졌으므로 그 질문에 대해 차분히 생각하는 것은 다음기회로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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