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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우리는 왜 웃는가.

by 격암(강국진) 2012. 6. 4.

2012.6.4

웃음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흔하다. 예를 들어 잘 웃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라면서 사람들은 좀 더 많이 웃어야 한다는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웃음은 공식적으로는 본래의 생물학적 존재이유가 무엇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반사작용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인지 웃음에 대한 이론들은 이미 있는 것들도 미심쩍어보이는 것들이 많다. 웃음에 대해 브리테니커 사전을 참조해보면 웃음은 아리스토텔레스나 데카르트 베이컨등에 의해 놀라움과 추함, 증오, 기형들과 연결되어져 설명되어졌었다고 한다. 생의 철학으로 유명한 베르그송의 웃음에 대한 설명이 가장 뜻밖이었는데 그 부분을 그냥 인용해보겠다.

 

베르그송의 견해에 의하면 웃음은 사회에 의해 비사회적인 개인에게 가해지는 교정적(矯正的)인 형벌이다. "웃음에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이웃을 모욕하고 결과적으로 교정하려는 공언되지 않은 의도를 발견한다."  

 

이런 자료들을 읽어보면 베르그송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뜻밖에 웃음을 부정적으로 표현했던 것을 알게 된다. 웃음이란 천한 것이며 남을 비웃기 위해 승리한자가 패배한자를 조롱하기 위해 남의 고통을 즐기기위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런 설명들도 어느정도의 진실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일본 코메디영화 월컴 백 맥도널드나 유명한 미국 코미디 드라마 빅뱅이론 혹은 인기좋았던 한국의 코미디 영화 과속스캔들같은 것을 떠올려 보자. 그러면서 우리가 웃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옛사람들의 지적도 뭔가 거기에 실재로 존재하는 것을 가르키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웃음에 대한 진실이 이러하다면 설사 웃는 행위가 건강상 좋은 것이라고 해도 뭔가가 찜찜한 기분이 남게 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비웃을 수록 장수하게 되니 더 많이 비웃어주세요라고 누가 권한다면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는 웃기게 하는 것들

 

하지만 웃음에 대한 부정적인 설명들에는 매우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 우리는 웃음은 언제 터져나오는가라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예를 들어 한 상황을 묘사해 보자. 옛날 만화영화중에 로드러너라는 만화가 있었다. 이 만화는 로드러너라는 새를 끊임없이 쫒는 코요테가 등장하는데 코요테는 종종 다음과 같은 상황에 빠진다. 로드러너만 보고 쫒다가 보니 절벽 바깥쪽에 발을 디뎠는데 아직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지 못한 상황이다. 만화이므로 코요테는 바로 절벽밑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대개는 로드러너가 넌저시 이봐 발밑을 봐 하는 식으로 신호를 보내고 그제서야 자신의 상황을 깨달은 코요테는 아래로 혼비백산하면서 떨어진다. 이런 상황이 뭐가 웃기는 것일까? 웃기는 것은 절벽아래로 떨어진다는 고통자체가 아니다. 웃기는 것은 코요테의 무지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관객들은 코요테의 무지를 알고 있다. 이봐 로드러너만 볼 것이 아니라 네 발밑도 봐야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조금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여기 입사 년도에 따라 선배 후배를 나누고 매우 그것을 강조하는 직원이 하나 있다고 하자. 그런데  하루는 그가 대학을 삼수를 해서 늦게 늦게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온 후배를 만나고 있었다. 나이는 많지만 회사깃수를 강조하는 그는 거침없이 그 신입사원앞에서 거드름을 피고 있었다. 그때 한 회사 선배가 그 대화에 낀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선배는 그 늙은 신입사원의 친동생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호칭은 마구 꼬이기 마련이다. 신입사원은 그 선배사원에게 선배님 선배님 꼬박 꼬박말하는데 그 신입사원에게 형이라고 부르는 최고참 사원은 그걸 보면서 기분이 좋지 않다. 이렇게 되면 선후배 관계 열심히 따지던 그 사원은 곤란한 처지에 처하게 되고 그런 상황은 흔히 사람들에게 웃음을 이끌어 낸다.

 

시스템 에러와 웃음

 

이런 예들에서 우리는 하나의 답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시스템에러를 발견할 때 우리가 웃게 된다는 것이다. 시스템에러란 질문은 있는데 답이 없는 상황이다. 어떤 시스템이 존재해서 그 시스템이 정해진 상황을 처리하게 되어 있는데 그 시스템안에서는 답이 없는 상황이 발생할 때 그리고 우리가 그 시스템의 문제를 꽤뚤어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웃게 된다. 

 

로드러너만 보고 뛰어가는 코요테의 문제는 다른걸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후배 열심히 따지는 사람이 처한 곤경은 그가 그렇게 강조하는 위아래를 구분하는 시스템이 내적인 모순상황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웃음도 마찬가지다. 코메디에 종종 등장하는 것은 인간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곤란한 상황들이다. 예를 들어 자매가 시집을 갔는데 결혼한 남편의 나이가 거꾸로 라서 시집간 집에서는 형님동생이 거꾸로 된다던가 하는 상황을 극속에서 만들어 내면 우리는 곤란해 하는 자매를 보고 웃게 되는 것이다. 

 

개그콘서트에서도 비슷한 형태를 얼마든지 본다. 예를 들어 한사람이 나와서 우리집은 정말 깨끗한 집입니다. 꼭 방문해 주십시요라고 말하는데 그다음에 누가 바로 이야기하기를 정말이예요. 이 집은 너무 깨끗해서 탁자도 없이 바닥에서 밥을 먹어야 한다니까요 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웃는 것이다. 우리집은 깨끗하다라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지만 통상 사람들이 예측한것과는 다른 진실을 폭로함으로서 말이 가지는 시스템이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에러를 일으키는 상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치 풍자는 매우 재미있는 코메디 소재다. 그 이유는 물론 정치인들의 행동에 일관성이 없어서 그들이 위선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쉽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들은 정치풍자 코메디와 욕설하기를 구분하지 못한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호랑이라고 부르던 개구리라고 부르던 쥐라고 부르던 그것 자체가 코메디가 되어 사람들을 웃기는 것은 아니다. 즉 남을 모욕하는 것이 코미디나 풍자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핵심에는 그 정치인을 그런 별명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어떤 공감대가 있어야 한다. 그런 별명이나 어떤 코메디가 보여주는 상황이 현실상황을 잘 요약하고 대표하는 면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잘 요약된 그 현실상황은 어떤 모순이 존재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 모순의 존재가 웃음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물론 코메디가 현실을 전부 보여줄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그 코메디에 공감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공감할 것이다. 

 

여담이지만 세상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거나 적어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에 대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바로 최효종을 고발한 강용석같은 사람말이다. 코메디언은 현실의 모순을 지적하는데 강용석은 그걸 욕설로 들을만큼의 감각밖에는 없다. 허공에 매달려있다가 떨어지는 코요테를 보고 사람들은 웃는데 그건 사람들이 코요테의 어리석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걸보고 누가 코요테라는 동물을 학대하고 있다라고 말한다면 이사람은 코요테의 어리석음을 이해할수 없을 정도의 어리석은 수준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코메디언을 고발하는 정치인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한국사회의 부끄러운 면이 되는 것이다. 

 

당신은 웃고 있는가.

 

웃는 것은 건강에도 좋고 그걸 본 사람이 기분 나빠하는 일만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해될것도 없다. 그러니 웃는 행위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깔깔거리며 웃다가도 웃음의 본질에 대해 생각을 이따금 해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우리가 코요테를 보면서 웃는 것은 코요테의 어리석음, 코요테가 로드러너를 쫒는 방식이 가지는 모순점을 꽤뚫어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어떤가. 만약 누군가가 스스로에 대해 정말 통쾌하게 웃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순간 자신의 무지했던 것에 대해 깨달은 사람일 것이다. 바로 자기가 코요테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웃게 된다. 

 

우리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정리해 둔 시스템이라는 것이 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학교나 회사에 간다. 선생님이나 부모님이나 상사의 명령에 순종하거나 혹은 반항하며 남들이 양복을 입을 때 나도 양복을 입는 식으로 남이 차를 탈 때 나도 차를 타는 식으로 어느정도 사회적 규칙을 지키거나 그것에 반항하면서 살아간다. 

 

우리에게는 여러가지 일들이 예기치않게 일어난다. 그래서 고생한 것들이 헛수고가 되고 우리의 희망은 망가지고 우리는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 스스로가 불행하다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기 때문에 뭔가 또 다른 것으로 그것을 가리려고 한다. 그러한 행동들은 또다시 어딘가에서 무리한 부분을 만들어 내어 나중에는 뭐가 어디서 어떻게 꼬인건지도 모르게 꼬이고 우리는 늘상 바쁘게 사는데도 돌아보면 뭐든지 허겁지겁이었다던가 아니면 박탈감과 공포속에 살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늘의 번개는 신이 내려보내는 것이라는 것을 믿는 토인이 있다고 하자. 그가 도시에 와서 전깃불을 보고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한다면 도시인들은 그것을 보고 대개 웃을 것이다. 그러나 토인들도 땅에 줄을 그어놓고 그것을 사고 팔며 물을 돈주고 사먹는 도시인의 모습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마찬가지로 배를 잡고 웃지 않을까? 우린 이런 생각은 대개 하지 않는다. 

 

남을 웃기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세상을 통찰한 만큼 사람들을 웃길수가 있다. 진정한 코메디는 그래서 교육적이며 이를 생각하면 코메디를 보면서 한바탕 웃는 일은 한층 더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우리는 저거 저거 뭐하는 거야 라고 말하면서 탁자라도 한번 두들겨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코미디언의 희극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자신과 세상 사람들의 삶에 대해 통찰하고 한바탕 웃을 수가 있다면 그것은 더더욱 좋은 일일 것이다. 저거 저거 뭐하는 거야 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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