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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애완견과 우리의 삶

by 격암(강국진) 2012. 6. 25.

2012. 6. 25

 

주말에 아이가 행사가 있다고 하여 데려다 준 끝에 시간이 생겨서 그 부근 주택가를 산책한 일이 있었다. 주택가를 따라 이런 저런 집들을 보면서 걷다 보니 어느 집에 매여져 있는 개 한마리가 보였다. 그러고보면 몇년 전에 개고기 논쟁때문에 시끄러웠다. 그래서 인지 애완견을 보면 그때 생각이 나곤한다. 다른 사람이 개고기를 먹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개인의 취향이다. 오히려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매우 부도덕한 일이 아닐까? 이렇게 이어진 나의 생각은 금새 과연 공평하다던가 사랑한다는 것이 뭔가하는 것에 닿았고 그때쯤 무렵에는 다시 차로 돌아가야할 시간이 되고 말았다.

 

개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얼까

 

어떤 사람이 매일 개를 두시간씩 산책을 시켜준다고 하자. 개를 키우지 않는 나로서는 매일 같이 개를 위해 두시간씩 시간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개를 그만큼 사랑할 주인도 드물것이며 설사 그만큼 사랑한다고 해도 대부분의 경우 개를 위해 날마다 두시간을 쓴다는 것은 지나치게 인생의 낭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사 2시간씩 개를 위해 쓴다고 해도 그게 의미하는 바는 그 개는 22시간은 혼자서 매우 비정상적인 상황에 놓여진다는 의미가 아닐까.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인은 농장에서 살거나 수렵을 하면서 살고 있지 않다. 개를 놓아서 키우면 십중팔구 개를 잃어버릴것이기 때문에 개는 지나치게 좁은 곳에 살거나 목줄에 매여서 살아야 한다.

 

다시 말해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매일 두시간의 시간투자가 가능하다고 해도 그리고 그 시간이 매우 개에게 행복한 시간이라고 해도 그 개로서는 22시간의 감옥생활이 남는다는것이다. 개의 삶이란게 뭐 그렇지 않냐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서둘러 그렇게 말하지 말기 바란다. 바로 그 부분이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에게 먹이를 주고 잠잘 곳을 준다. 놀아도 주고 추우면 옷까지 입혀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특히 주인없는 개들이 거리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역시 나는 좋은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법하다. 내가 없으면 저들이 죽어가지 않는가. 역시 나는 좋은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좀 기다려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애초에 개를 먹을 것도 아니며 개를 어떤 실용적 목적에 쓰거나 하지 않을것이라면 -즉 당신이 양치기개가 필요하다거나 시간이 너무나 많고 외로움을 줄여줄 동반자가 필요한 노인이 아니라면- 개는 애완의 목적으로 키워지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현대에 개가 이렇게 많이 살 리가 없다. 현대인들이 사는 도시는 동물에게 적당한 환경이 아니다. 오늘날 수없이 존재하는 개는 모두 애완견산업이라는 산업이 돈이 되니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즉 소위 개를 사랑한다고 하는 그 사람들의 요구때문에 수많은 개들이 만들어 졌다.

 

그렇게 해놓고 그 개들을 내버리면 그 개들이 살아남을 수 없는 현실을 보고는 역시 나는 개에게 잘해주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아닐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애완견을 키우는 사람들, 그래서 애완견산업을 만들어 낸 사람들은 지구상의 개들의 행복에 대해 책임이 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개키우는 사람들이 키우다 버린 개들이 잔혹하게 죽어가는 것에도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은 매우 무겁다. 단순히 내가 키우는 개가 당장 죽지 않는다라는 사실만으로 나는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당신은 생명이 뭔지 정말 고민해 보고 있는가.

 

누군가의 정당한 몫

 

우리가 이야기를 좀 돌려서 생각해 보자. 여기 노동자가 있다. 이 노동자에게 월급을 주고 일자리를 주는 고용인은 스스로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 사람을 해고한다면 이 사람은 얼마지나지 않아 비참한 삶을 살게 될 것이고 심지어 죽을지도 모른다. 그걸보면 역시 나는 좋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겨우 굶주림을 면하고 비인간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그 노동자의 현실이라고 해도 그야말로 애완견처럼 대우받고 있다고 해도 그 고용인은 나야 말로 정말 노동자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자신은 날마다 사치스러운 일을 하고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결코 그 자신을 착취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똑같은 일은 바로 식민지를 침략한 제국주의자들에게도 일어났다. 가난한 나라를 침략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식민지 국민들을 돌봐주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착취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앵벌이로 아이를 착취하는 깡패도 스스로를 아이들을 돌봐주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전체를 보면 한 사회의 산업구조가 어느 일개인의 책임은 아니더라도 그 노동자가 거기서 그렇게 살게 된 것에는 구조적 역사적 이유가 있다. 그 노동자가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놓고 이제 그 노동자가 굶어죽지 않을정도로 대우를 해주면서 스스로를 좋은 사람으로까지 생각할수 있는 것에는 뭔가가 꺼림직한 면이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위치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이다.

 

이런 것까지 생각하면서 어떻게 살 수 있냐고 말할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 현대야말로 이런것을 생각지 않으면 지옥이 되고야말 세상이다. 왜냐면 현대란 정말 거대한 사회가 전문화되어 움직이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가서 직접 누군가의 등에 불을질러 그 사람을 태워죽이는 일을 할 리는 없다. 그러나 내가 종이위에다가 도장하나를 찍으면 그 도장은 누군가에게 뭔가를 시키고 다시 누군가가 그 다음일을 하는 거대한 연쇄작용을 한끝에 누군가가 불에 타죽게 될 수도 있다. 그 종이는 선거용지일 수 있고 아파트 계약서일수도 있으며 경찰에게 신고하는 신고용지일수도 있다. 최종적으로 그를 죽인 사람 조차 내가 죽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나는 단순히 그저 직업에 따라 명령에 따라 그렇게 할 뿐인 것이다. 내가 미국이나 일본이나 한국이나 영국에 충성하는 국민이고 그런 나라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해서 많은 이득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국가가 저지르는 죄악이 나와 무슨 상관이겠는가. 나는 그저 성실한 기업가나 직업인이나 시민일 뿐인데. 내가 아동노동착취로 만들어진 장난감을 산다고 해도 아동노동착취와 내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나는 그저 일개 소비자이고 그나마 내가 이 장난감이라도 사주니까 저 불쌍한 아이들이 굶어주지는 않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현대는 많은 일들이 매우 전문화되어 추상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직접적 대면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상식적인 감정을 가지기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세상의 구조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급속도로 당신은 누군가를 지독하게 착취하거나 살해하면서 스스로를 좋은 사람, 세상을 위하는사람으로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를 거지로 만들어 놓고서 동전하나 주면서 나는 너무 마음이 약해라고 말하는 그런 사람말이다. 

 

맺는 말

 

나는 애완동물이라는 개념에 반대한다. 그렇다고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는 말속에 무수히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뭉뚱그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사람이란 여러가지 상황에서 자기 세계에서 산다. 언제나 그렇듯이 중요한 건 지금 이순간 내가 뭘할 것인가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나는 애완동물을 키우지 않는다라는 행동으로 세상에 내 느낌을 표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느낀다. 나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동물을 죽이고 먹으며 미식을 즐길지언정 동물을 애완용으로 키우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생명에 대해 지나치게 모욕적인 일을 하는 것이라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개를 사랑해요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싶지는 않지만 동시에 그들이 말하는 사랑이란게 뭔가를 생각해 본다. 그 개들은 정말 그렇게 살고 싶을까. 물고기를 사랑한다고 사막에 데리고 가서 달리기를 시키고 운동화를 사주면 그건 학대에 불과하다. 설사 강아지에게 먹이를 던져주니까 그 강아지가 너무 좋아한다고 해도 강아지가 그렇게 행동하도록 하는 상황에 놓이게 만드는 과정에 나는 정말 관련되고 싶지 않다.

 

이것이 어디 개에 대한 것뿐일까.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가 세상에 가진 책임을 망각한다. 그건 내 책임이 아니라고 너무 쉽게 말한다. 내가 성공하는 것은 내 노력과 희생의 탓이지만 남의 성공이나 불운은 그저 운이거나 그가 스스로 100% 책임져야 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개를 '사랑'하는것과 어떤 개가 예쁜게 털이 다듬어져서 개장안에 들어가 가격표가 붙어서 진열되어 있는것과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공평이란 것은 누군가에게 그가 응당히 받아야 마땅한 대우를 해주는 것을 말하는것일 것이다. 우리는 과연 세상에 공평한 것일까. 우리는 너무 쉽게 자기 얼굴에 금칠을 하고 나는 좋은 사람이야, 나는 세상을 사랑해라고 쉽게 말하면서 세상을 목줄에 매인 개처럼 만드는 것은 아닐까. 

 

에이 귀찮아. 이런것까지 생각하면서 어떻게 살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가지를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아마도 항상 당신이 개를 키우는 개주인의 입장만 가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니까, 즉 개의 입장이 아니고 개주인의 입장이라고만 생각하니까 그렇게 쉽게 말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당신을 개로 생각하면서 먹다남은 음식이나 주고 목줄로 매어 놓고서 스스로 말하길 나는 정말 인심이 좋고 개를 사랑하는 사람이야라고 말한다면 그때도 그렇게 말할 것인가. 당신이 다른 사람이나 다른 생명의 정당한 몫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은 당신의 정당한 몫이 무엇인지 고민해 줄까? 내가 다른 생명의 정당한 존엄성을 생각하지 않는데 온세상이 나라는 생명의 존엄성을 생각해 줄까. 갇혀서 지내다가 주인이 오면 반가워하는 애완견은 개의 입장이란게 뭔지 알고 있을까. 우리는 정말 개의 입장에는 처해있지 않은 것일까. 내가 생각해야 다른 사람도 생각하고 여러사람이 생각해야 거기서 세상이 바뀔 힘이 나온다. 

 

이렇게 생각하면 애견산업이 발달된 서구에 앉아서 개를 먹는 사람을 야만인이라고 불렀던 프랑스의 한 여배우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을 한 것이다. 한국에서 식용으로 도살되는 개의 수보다는 서구에서 키우다가 싫증난 장난감처럼 길거리에 버려진 끝에 잡혀가서 도살되는 개의 수가 훨씬 많다. 그녀는 자신이 매순간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지르면서 사는가는 전혀 모르면서 -예를 들어 거위를 끔찍하게 학대해서 만드는 거위간 포와그라따위를 즐기거나 그렇게 하는 사람들과 애정을 나누면서- 나는 정말 동물을 사랑하는좋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애완견을 키우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개를 키우는 사람이라고 해도 다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나는 우리가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살자고 말하지도 않는다. 나를 포함해서 누구나 어떤 문맥에서는 매순간 죄를 짓고 살고 있으며 뒤짚어 말하면 세상의 사랑과 희생에 기대어 살고 있다. 다만 어느정도는 그걸 생각하면서 사는게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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