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말의 이유

by 격암(강국진) 2012. 7. 19.

2012.7.19

 

세상에는 항상 말이 많기는 하지만 정치의 계절이 되면 말은 더욱 많아진다. 세상을 크게 좌지우지할 한판승부인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말은 많아지는데 오히려 그런 많은 말속에서 말다운 말은 실종될 수도 있다. 그런 때 나오는 많은 말들은 주로 다른 말들을 억압하기 위해 행해지는 것이며 원하건 원하지 않건 모든 말은 어느정도 그렇기 때문이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같은 말을 당연하다는 듯이 쓰며 물론 그런 것들은 숭고한 가치를 상징하는 것이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말의 가치나 권리에도 경계선이 있다. 누군가가 확성기로 동네를 소음으로 덮어버리면 다른 사람은 말을 해도 들리지가 않는다. 그러니까 제로섬 게임은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어느정도는 내가 말을 하면 다른 사람의 말이 그만큼 묻히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이런 것을 생각할 때 표현의 자유라는 것도 단순하게 믿을 수는 없다. 

 

말을 하는 이유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로 말을 한다. 그 여러가지 이유를 세세히 따지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크게 크게 본다면 말이란 결국 우리가 세상에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신호를 보내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예를 들어 초원에 한 부족이 있는데 왼쪽에 사자가 나타났다. 그 사자는 사람들을 죽일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자가 나타났다고 말해야 한다. 세상에 사자가 있는데 다른 부족원들은 그것을 모르는 상태는 바꿔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한다. 그 상태를 바꾸기 위해. 만약 아주 단조롭게 우리 모두가 아는 일만 벌어지는 환경이 계속된다면 굳이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기가 실제로 존재한다라는 것이기 보다는 그 사람이 위기가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생각에 세상은 응당 이러해야 하는데 -예를 들어 우리 주변에는 사자가 없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걸 바꿔보려고 세상에 신호를 보낸다. 그게 말이다. 

 

그러니까 말이란 외부세계에 대한 것인 동시에 내 내부세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외부세계는 문제가 없는데 그걸 보는 우리 눈이 삐뚤어져서 문제가 보이는 것일수도 있고 반대로 외부세계는 문제로 가득한데 우리 눈에는 그게 하나도 보이지 않아서 말 할 것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말하는 그 세계가 뭔가에 대한 생각에 따라 우리의 위기와 승리는 갈린다. 인간은 집주변에 날아다니는 모기를 없애거나 위험한 동물을 없애면서 이제 위기는 해결되었다라고 생각할 것이지만 모기나 그 동물의 입장에서는 위기와 불평등은 극대화된것이 아닐까? 노동쟁의가 없고 잠잠해지면 누군가는 그것을 위기상황의 해결이라고 느끼고 누군가는 그것을 위기와 불평등이 극대화된 것이라고 느낄수 있다. 

 

결국 우리가 뭐가 '세계'냐고 생각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말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살인자가 죽일 대상을 찾아가서는 '큰일이다 누군가가 너를 죽이려고 한다'고 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살인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우리'라던가 '우리의 세계'라던가 하는 것의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살인자는 그런 말을 안 할뿐 아니라 오히려 조용히 기척을 죽이고 죽일 대상에게 접근하려고 할것이다. 반면에 그 소식을 들은 위기에 처한 사람의 가족이나 친구는 서둘러 그나 그녀에게 위기에 대해 말하려고 할것이다. 말이란 이렇게 우리가 세계에 대해, 상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만들어진다. 

 

간단한 세상의 득과 실

 

우리가 남의 말을 들을 때에는 단순히 그 말이 사실인가 거짓인가라는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거의 의미가 없다. 사실여부와 의미는 그것과 관련된 문맥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얼마전에 끝난 인기드라마 추적자에서 살인범은 대통령이 되는데 실패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앞의 말을 빼먹고 살인범이 대통령이 되는데 실패했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사실일까 거짓일까. 그 말은 드라마 추적자에서 그랬다라고 하는 문맥에서 사실이다. 그리고 그 문맥이 아니라면 거짓이거나 기껏해야 참인지 거짓인지 논하는게 무의미한 말이 된다. 

 

우리가 다른 대화를 할때도 마찬가지 문제가 있다. 진실성여부는 문맥에 달려있다. 그런데 우리는 결코 우리가 가진 모든 문맥을 다 말하고 난 뒤에 말을 할 수가 없다. 다 말하기는 커녕 그것의 백만분의 일도 말하지 못한다.  첫째로는 사실상 그 문맥이란게 무한하기 때문이다. 무한하지 않다고 생각해도 엄청나게 길다. 우리가 부동산거래가 뭔지 화폐가 뭔지 자본주의 사회가 뭔지 모르는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고조선시대의 사람을 현대로 데려와서 그 사람에게 전세금을 내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에 있다고 하자. 그 사람에게 전세금 주세요 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할 때 이 사람에게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을 설명해 주자면 엄청난 일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우리는 그 의미를 평생 공부해서 알게 되었으며 우리는 물론 그 의미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더 생각을 많이 한 사람의 눈에는 그것의 의미가 또 달라보인다. 한국사람이 평생을 미국에서 살아도 미국인에게는 외국인으로 느껴질만큼 뭔가를 안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말을 주고 받는 다는 것이란 상상이상으로 많은 것을 공유하고 많은 것을 같은 것으로 알고 있는 전제하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때문에 인간에 대한 기본적 상식이 너무나 다른 사람과의 대화는 우리의 말문을 막히게 하며 그렇게 남의 말문을 막히게 잘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토론의 달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예리한 질문에 남들이 답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과는 너무 다른 정신세계에 있는 저 사람에게 이야기 할 때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막막해서 말을 못하는 것인데 말이다. 

 

문맥을 다 밝힐 수 없는 또다른 이유는 말에 의미를 줄 문맥과 전후사정이 길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는 게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말해줄 것이 많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 알지도 못한다. 유치원생 딸이 나는 커서 아빠랑 결혼하고 싶어라고 말한다면 그녀는 나는 아빠가 좋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며 어른들이 가지는 통상의 결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는 결혼이란 말을 통해서 단순히 좋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고 있는 것일테지만 그녀가 그것을 제대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다. 그녀가 속해 있는 세상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기 떄문에 어떤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그녀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살기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 영원히 아버지가 젊은 상태일수 없다는 사실도 깨닫고 있지 못할 수 있다.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계속 자신이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깨닫지 못한채 주변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 산다. 아주 간단한 것은 살면서 깨닫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의 무지를 수십년이 되어도 깨닫지 못하고 심지어 사람이 죽고 눈물과 피가 흘러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깨닫지 못하기도 한다. 칼도 무섭지만 담담하게 그건 어쩔 수 없었다라거나 그건 최선의 선택이라거나 라고 말하는 것도 무서우리만큼  큰 상처를 주는 행위다. 예를 들어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조선은 열등해서 일본이 키워준거야라고 말하면서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자식이 자살할때까지 자식을 몰아치면서도 자식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식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부모도 있다. 이건 서너살 먹은 아이들의 이야기도 일자무식의 교육받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도 아니다. 

 

이렇게 말이 복잡하고 어렵다. 그래서 세상은 말장난을 하는 사람이 많고 말이나 글이 권력이 되어져 왔다. 그 세상을 난장판에서 구원해 보겠다는 것이 세상을 제대로된 말의 반석위에 올려놓겠다는 지식인의 시도다. 예를 들어 법이 그렇고 윤리가 그렇다. 살인을 하면 이런저런 벌을 받고 도둑질을 하면 이런저런 벌을 받으며 간음을 하면 이런 저런 벌을 받는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여러가지 상황을 살인이라던가 도둑질이라던가 간음이라는 말로 정리하거나 배제한다. 배고파 죽어가는 사람을 모른척한것은 살인이 아니고 칼로 찌르면 살인이다. 이웃집 여자의 허벅지를 눈으로 구경하는 것은 간음이 아니고 마음으로 깊히 서로 사모하는 것은 간음이 아니고 둘이서 섹스를 하면 간음이 된다. 이렇게 세상일에 선을 그어서 정리하고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정리하고 나면 좋은 것은 이제 말이란것이 좀더 단단한 반석위에 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간단하니까. 객관적이고 표준화가 되었으니까. 그런 것은 모두 세상에 대한 단순화다. 단순하고 명쾌하니까 좋은 것도 많다. 그러나 이런 조직화는 동시에 말이란 것이 가지는 한계때문에 쓸데없는 구분을 만드는 면이 있다. 살인을 하지 말라고 하는 법밖에 없으면 이 법은 살인이 아니면 다 괜찮다는 메세지도 만든다. 세상에 천cc 이천cc하고 특별한 배기량의 자동차만 있는 이유는 그것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시스템이 있기때문이다. 유형화되고 성문화된것이 마찬가지로 그렇게 규격화된 인간을 만들고 경계위에 서있는 인간들을 억압한다. 그렇기 떄문에 효라는 말은 진정한 효자가 사라질 때 나오고 충이라는 말은 진정한 충신이 사라질 때 나온다고 하는 것이다. 

 

죄를 지으면 벌에 처한다고 하면 살인죄나 좀도둑이나 다 벌에 처해지니 좀도둑을 할 사람이 살인을 해서라도 자기 죄를 숨기려고 한다. 그래서 이젠 살인죄와 좀도둑을 구분하면 그 안에는 또 구분되어야 할 상황이 있다. 예를 들어 고의로 살인을 했는가 아니면 실수로 했는가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수란건 또 뭘까. 자동차로 살인을 한 것과 칼로 살인을 한 것은 왜 달라야 할까. 또는 왜 같아야 할까. 이렇게 법이 많아지고 복잡해지면 다시 본래의 혼돈으로 돌아간다. 세상에 질서를 세우자고 법이며 윤리를 말로 만들었는데 세상에 맞추다가 보니 법이며 윤리며 시스템이 너무 복잡해져서 그것에 전문가가 된 사람이나 그 전문가를 고용하는 사람만 자유롭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법이며 시스템에 의해 차별당한다. 

 

더 나쁜 것은 그런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법이나 윤리나 어떤 관념 어떤 말들을 세상 그 자체로 보게 되는 경향이 크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다수결, 말하는 것은 자유'같은 구호나 관념을 절대로 흔들릴 수 없는 세상 그 자체로 보게 되어서 그 노예가 된다. 그리고 물론 그들의 눈과 귀에 보이고 들리는 위기는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에 대한 위기다. 그들은 정의의 칼을 들어 위기를 만들어 내는 자들을 쳐내려고 하지만 과연 그 악이 실존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눈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들은 물론 그들의 눈과 귀에 보이고 들리는 위기에 대해 말을 하지만 그 말이 허상에 대한 것 일 수도 있다. 외부에서 보는 김일성은 독재자이며 무능한 통치자인데 북한주민들은 너무나도 고맙고 위대한 지도자로 보듯이 위기란 머릿속에 든것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자신이 악을 행한다고 생각하면서 악을 행하는 사람은 두렵지 않다. 그러나 자신이 선을 행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 100% 순수한 선으로 살아간다는 사람은 오히려 두려운 법이다. 내가 다 해봐서 다 안다고 하는 사람이 무서운 법이다. 종교적 원리주의자들이 무서운 이유이며 무엇보다 그들과 대화가 불가능한 이유다. 그들은 관념의 노예인 것이다.  그것도 인간이 만들어 낸 관념의 노예다. 

 

종교적 광신도만 그런게 아니다. 흔히 스스로를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중에도 원리주의자같은 사람들은 많다. 그들도 누군가가 쓴 책에 나오는 관념으로 세계를 보고 그것에 빠져있으며 스스로는 세상을 지키고 세상을 좀더 좋게 만든다고 말하지만 사실 작은 가족도 행복하게 만들 힘이 없다. 민주주의가 뭔지 아는가, 사민주의가 뭔지 아는가, 복지가 뭔지 아는가 하고 그들은 질문을 던지고답한다. 그들은 작은 머리로 세계를 파악하려 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쓸데없는 참견장이고 어떤 때는 놀라울만큼 무신경하다. 그들은 글자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남이 쓴 글자에. 

 

세계와 우리는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가 바다에 있을때면 물에 빠져죽기전에 배에 올라타거나 육지로 상륙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산에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들짐승들에게서 우리를 지키기 위해 불을 피워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우리는 같은 세상에 있는데 생각이 달라서 해답도 다르고 그래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짜 세상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런건 애초에 없는 것일까. 아니면 객관적 경험에 따라서 우리는 마침내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진짜세상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우리가 말하는 세상의 적어도 아주 중요한 부분은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우리 동네의 사람들은 모두가 착하다라고 말했을 때 즉 우리는 아주 착한 사람들에 둘러쌓여 있다라고 말했을 때 이것이 객관적으로 참인가 거짓인가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적어도 의미가 한정적이다. 왜냐면 그것은 우리 마음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은 우리의 마음에 달린것이다. 우리가 모두가 착한 사람이며 우리는 지금 천국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지금 세상은 천국이 될 것이며 반대로 한다면 그렇게 될것이다. 모든 생각은 물론 영원하지는 않다. 모든 사람이 지금 우리는 천국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당장 천국에 살게 되겠지만 그러한 생각을 영원히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우리내부에는 의혹이 생길것이고 불신이 생길것이며 결국 그 천국은 깨어지고 만다. 지옥도 그렇지만 말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어떻게 되는가만 중요하다면 우리는 애초에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인간은 어차피 죽어서 없어지는 존재가 아닌가? 천년뒤에는 우리의 살과 뼈가 세상의 어디에 흩어져있을지 모르게 퍼져있을텐데 꿈이니 욕망이니 하면서 살아야 할 필요가 없다라고 할거라면 세상에 말이란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믿음은 변하지만 동시에 적건 길건 수명을 가진다. 우리가 천국을 믿을 수 있으면 그 믿음이 유지되는 동안은 우리는 천국에 살 것이다. 결국 이 세상이 객관적으로 어떤 곳인가를 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이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다. 그것은 때로 우리의 상처와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 되어서 조선놈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는 둥, 세상에 믿을 놈은 하나도 없다는 둥 하는 믿음으로 표현이 되고 그것은 때로 우리의 기쁨의 표현이 되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너무 기쁘며 세상이 사랑으로 충만한 것이 매순간 느껴진다는 믿음의 표현이 되기도 한다. 

 

맺는 말

 

말을 하는 것도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세상에 달려있다. 한국의 문제가 경제에 있다고 생각하는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빼고는 모두가 한국의 문제는 일본에서 동방신기가 얼마나 인기가 있는가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해보자. 경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 거의 말을 할 수가 없다. 세상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방신기만 계속 떠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대화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느끼게 될것이다. 

 

누군가가 독이 들은 음식을 먹으려고 해서 그것에 대해 경고의 말을 하는 이유는 독을 먹지 않으면 살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변사람에게 너희들은 늙어죽을 수도 있다고 경고하지는 않는다. 늙어죽는게 당연하니까. 피할 수 없는 것이니까 그런 경고는 황당하기만 하며 그런 말은 필요가 없다.

 

한국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꾸는게 중요하다. 같은 꿈을 꾼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꿈이 만들어 낸 세상이 넓고 넉넉하면 우리 모두가 각자 자유를 가지고 다르게 살면서 자기가 있을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꿈을 찾고 그런 꿈을 같이 믿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적어도 한동안 행복한 꿈을 꾸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서구가 만들어낸 자본주의의 꿈이나 어메리칸 드림이 그렇듯이 언젠가 그 꿈이 한계를 들어내고 파탄을 낼지라도 우리는 꿈꾸는 것이 필요하다. 꿈이 우리를 우리이게 한다. 

 

그런 꿈이 없으면 우리는 서로를 적으로 악으로 상처로 인식하게 된다. 그게 아니면 서로에 대해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해야할 말은 사라지고 정보는 오히려 숨겨야 하는 것이 된다. 

 

정치의 계절, 세상에 말은 많다. 그 말들이 아무쪼록 한국사람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꿈에 대한 말이었으면 한다. 한국사람을 넘어 세상사람 모두가 넉넉하게 들어가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말이었으면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되면 좋겠다. 세상에 눈물과 상처가 참많다. 이 눈물과 상처는 전부가 아니라면 적어도 대부분 꿈의 부재나 좁은 세상을 꿈꾸는 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만들어 낸 것이다. 

 

 

'주제별 글모음 > 생활에 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악몽  (0) 2012.07.30
사랑하는 사람  (0) 2012.07.26
애완견과 우리의 삶  (0) 2012.06.25
우리는 왜 웃는가.  (0) 2012.06.04
지속되는 삶에 대한 단상  (0) 2012.04.1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