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당연한 것일까.

by 격암(강국진) 2012. 1. 26.

2012.1.26

 

우리가 어떤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 때 우리는 그 믿음에 반대되는 것을 종종 매우 사악하고 어두운 것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현대의 서양인들은 중세시대를 암흑으로 말하고 요즘의 한국사람들은 조선시대를 매우 나쁘게 말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가 과거보다 훌룡하다는 것은 정말 당연한 것일까?

 

발전이라는 이상

 

과거와 오늘을 비교할 때 내 눈에 크게 들어오는 것은 현대인들이 가지는 발전에 대한 신앙이다. 오늘날의 세상은 비록 지금의 세계는 완벽하지 않지만 발전이 그걸 해결할 수 있으니 참고 발전을 위해 힘쓰자고 하는 말로 가득 차있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던가 매일 매일을 시간을 아껴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같은 말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듣는가. 이런 말들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마치 종교적 세뇌처럼 높은 연단에 있는 누군가 대단한 분들에 의해 자꾸 반복된다. 

 

발전이라는 말은 어느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가장 근원적인 가치가 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그렇게 고귀하다는 개인의 자유도 발전의 개념을 가지고 옹호되어 진다. 자유로운 사회가 가장 빠른 철학적 정치사회적 물질적 발전을 가져오기 때문에 자유를 위한 댓가는 치룰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결론은 간단하다. 우리는 발전해야 하고 그 반대인 발전의 정체나 퇴보는 악이라는 것이다. 발전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제 자리에 있어서는 안되고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한국인들이 과거의 조선을 볼 때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조선 시대의 주류적 사상이었던 유교는 말은 오늘날 보수라는 말과 이음동의어처럼 쓰인다. 조선은 틀려먹은 나라다. 왜냐면 실용적인 지식이나 기술의 발전을 억압하고 시대, 부질없이 패를 갈라서 추상적인 일에 대해서 말싸움이나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즉 조선이 잘못된 주요한 이유는 거기에 발전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아무리 그것이 좋은 이야기라고 해도 이것은 하나의 믿음이며 이데올로기다. 다른 모든 것이 그렇듯이 절대적이지 않다.무엇보다 발전은 현재를 부정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의 상태가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면 발전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즉 우리는 불행해야 하고, 불만을 가져야 한다. 그냥 이대로가 괜찮다는 만족을 하면 곤란하다. 그러므로 현대사회는 우리에게 자기 만족을 해서는 안된다고 계속 설교하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현대사회에 우울증이 흔한 이유가 아닐까? 발전을 위한 이런 자기 부정이 깊고 깊어져서 자신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에 이르르면 곤란하다. 우리는 공부를 더 잘하고 싶고 빵을 더 잘들고 싶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공부를 못하거나 빵을 못만들면 나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는 식의 사고에 빠지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알듯이 그런 일은 아주 쉽고 흔하게 일어난다. 

 

우리가 행복하려면 뭐가 되려고 노력하는게 아니라 지금의 자신이 이미 충분히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게 필요하다. 남의 말이나 이념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자기나름의 가치판단의 기준을 가지려면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답이 자기 가슴속에 있다고 믿는 사람은 발전이라는 이상을 무제한적으로 믿지 않는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나는 나이며 그런 의미에서 변하는 것은 없다고도 생각한다. 발전이 충분하지 못하여 내일을 아직 준비하지 못한 나는 내일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나로서 그 내일을 만나면 된다고 믿는다. 

 

도서관에 가면 헤아릴수 없는 수의 책이 있다. 그것들을 읽는 것은 좋은일이고 기쁜 일일것이다. 하지만 발전의 이상에 맹목적인 사람은 그 책을 자기머리에 다 집어넣기전에는 자기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책을 읽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미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다 자기안에 갖춰져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관점으로 책을 읽는다. 

 

발전을 강조하는 태도는 우리로 하여금 변하는 것에만 주목하도록 한다. 통잔의 잔고가 어제는 이만큼 이었는데 오늘은 이만큼이라는 식이다. 우리는 전에 20평짜리 집에 살았는데 지금은 40평짜리 집에 산다. 우리는 전에 차가 하나였는데 이제는 두 대다. 우리는 전에 해외여행을 꿈꿀 수 없었는데 지금은 해외여행을 간다. 이렇게 측정하기 쉬운 변화를 수치화하고 우리는 발전하고 있다고 흥분하며 더더더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 시키는 것에 맹목적으로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가치있는 것이 수치로 측정가능하지는 않다. 그래서 누군가가 국민소득을 만불 더 올리겠다고 하면 삶의 질은 망각되는 경향이 있다. 20평짜리 집에서도 가족이 화목하게 살 때 행복했던 것, 가난해도 좋은 이웃과 지내던 때가 행복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40평짜리 집에 살겠다면서 일중독이 되거나 위험한 부동산 투기에 빠져서 빚에 허덕이며 산다. 행복을 수치로 측정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환경문제도 그렇다. 내가 가진 것에 주목하다보면 공유하는 것들에는 신경이 덜 쓰이게 된다. 국민소득의 증가보다는 내 통장잔고가 더 중요하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예전에는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었던 홍합같은 조개가 어느새 다 사라져도 그러한 문제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생각해 보니 요즘 비싼 요리라고 말해지는 것, 요즘 비싼 자연체험 캠프라고 말하는 것이 예전에는 그저 자연스럽게 우리 주변에 다있던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우리는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 공자나 부처나 예수의 말을 아직도 읽고 묵상한다. 그것들중에 후일에 다른 사람이 첨가한게 있다고 해도 그런 것들은 매우 낡은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정말 가치가 없을까? 오랜동안 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발전이데올로기에 빠진 사람에게 과소평가되어야 할까?

 

발전이 없던 시대

 

발전이 나쁜 것은 아니다. 과거를 잔뜩 미화만 하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다. 다만 그것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우리의 눈을 가리게 되면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시대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러다 보니 우리 시대의 어두운 면에 주목하자고 할 뿐이다. 발전이라는 것에 목매지 않았던 시대에 대해서도 한번 좋은 쪽으로 생각해 보자고 말할 뿐이다. 

 

발전이 없다는 것은 암담한 것이라고 하겠지만 농부로 태어나거나 대장장이로 태어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을 생각해 보자. 기술적 발전이 매우 느리던 이 시대에 이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배워야 하는 기술이나 지식이 얼마나 될까. 아버지를 돕고 어머니를 도우면서 아이는 힘을 쓸만큼만 몸이 커지면 알아야 할 일은 이미 거진 다 알게 될것이다. 그리고 나면 크고작은 일들이 좀 있기는 하겠지만 올해는 내년과 같고 내년은 후년과 같을 것이다. 작년과 올해 내가 아는 것이 큰 차이가 없다고 해서 한해를 낭비했다고 하지 않을 것이고 고작해야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세월을 느낄 것이다. 

 

현대인은 어떤가. 유치원부터 입시전쟁에 끼어들더니 평생교육의 시대다. 대학에 대학원까지 졸업하는 사람도 많거니와 취업을 해도 공부는 끝없이 계속된다. 세상이 빨리 바뀌니 자칫하면 그 변화에 뒤져서 언제 온집안 재산이 다날아가거나 허망한 꼴을 당할지 모른다. 천안함사건이 나면 국민들은 배에 대해 공부하고 황우석 사태가 나면 줄기세포에 대해 공부하며 FTA니 4대강이니 뉴타운 개발이니 하는 것으로 세상에 배우고 공부해야할 일이 끝이 없다. 

 

그런 공부들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닐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런 환경은 그저 떠밀려서 살아가는 삶을 만드는 것이다. 즉 그런 공부가 내부적으로 축적되어 뭐가 되는게 아니다. 현대인들은 수백년전이나 천년전의 농부가 얼마나 험난한 삶을 살았는가라고 쉽게 말하지만 바로 그 현대인은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공부해야 하고 항상 긴장에 쩔어서 살아야 한다. 게으른 것은 악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가장 가치있는 일때문에 그렇게 바쁜 것일까. 지혜로운 사람은 바쁘지 않다는 말이 있다. 과연 현대인들은 지혜로운 것일까. 발전은 좋지만 뭐가 발전하는 가가 중요할것이고 무엇을 위한 발전이건 그것때문에 삶이 온통 다 없어지고 만다면 그게 정말 좋은 것일까. 현대인들은 발전이라는 무서운 채찍이 당신을 마구 후려치는데 당신은 나는 발전이 좋아 발전이 좋아하고 말하는 매조키즘 환자인가? 

 

그럼 이런 기술적 발전이 없던 시대에 사람들은 뭘 믿고 살았을까. 사람들은 정신적 각성이 좋은 세상을 만든다고 믿고 살았다. 즉 종교 안에서 통합되기를 바랬고 유교적 덕성을 길러 좋은 세상이 오기를 바랬다. 사람들은 발전보다는 수련을 믿었다. 즉 개인적 수련을 통해 개개인이 좋아지면, 군왕이 군왕답고 백성이 백성다우면 좋은 세상이 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보수적 세계는 물론 그 나름의 문제가 있다. 권위주의가 늘어나면서 개개인의 정신적 각성이 도덕적 권위가 주는 명령에 생각없이 복종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래서 예의범절 열심히 따지고 누군가 잘난 사람들이 남의 도덕적 판단을 대신해 준다. 누구는 열심히 일하고 굶는데 무능한 누구는 바보처럼 돈을 써댄다. 그런 경직된 사회를 무너뜨리는 것, 거기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발전하자는 외침이었을 것이다. 발전은 확실히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발전하지 않는 것을 지나치게 어둡게 말하는 경향이 있고 발전을 너무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 

 

맺는말

 

오늘날은 거꾸로 발전이데올로기의 해악이 극에 달해 있다.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의 현재를 보라. 최근의 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중 64%가 현금천불이 없으며 사천오백만 이상의 미국인이 식품쿠폰 같은 것을 보조받는 생활을 한다고 한다. 뛰어난 미국인도 많고 거대한 제국인 미국의 여기저기는 아직도 화려하고 따뜻하지만 망가진 부분도 눈에 많이 띤다. 미국인의 도덕적 부패이야기도 많다. 다른 예도 있지만 나는 어린애같은 미국인을 지적해 보고 싶다. 미국은 아버지나 어머니의 이름을 그냥 막부르는 일이 있다. 초등학생이 아버지를 국진아 이렇게 부르는 식이다. 워낙에 어린 시절부터 독립과 자유를 강조하는 풍토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 결과가 뭘까. 피터팬이다. 아이들은 너무 자유롭고 너무 독립적으로 커서 마치 어릴 때부터 버려진 고아같다. 그렇게 자립을 강조해서 더 성공하는 엘리트들도 있겠지만 자기 방종에 빠져서 고등학생이 신문도 못읽는 사람도 미국에는 많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발전이라는 사회적 이상에 버림받은 아이들이다. 

 

요즘 세계 무역문제와 세계 경제난 문제도 답이 없어서 사람들이 고민한다. 마치 너무 약을 먹어서 약발이 듣지 않는 환자처럼 세계는 이미 너무 많은 거품과 욕망을 소비하여 약발이 듣지 않는데 더더큰 거품을 일으켜 보려고 한다. 바로 발전하는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국민소득이 올라가고 빌딩과 다리가 만들어 지는 나라말이다. 그게 한계에 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현재다. 

 

이럴때 시대가 필요한 혁명적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다시 자기성찰일 것이다. 자기 내부를 들여다보고, 자기 욕망을 들여다보고, 거기에서 친구와 가족을 찾고 세상을 찾는 일일 것이다. 자기 수련을 강조하는 풍조일 것이다. 또다시 난 더 큰 거품을 만들어 낼수 있다는 거짓 선지자가 세상을 더 큰 쓰레기 더미속에 빠지게 하기 전에 발전이라는 개념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예술을 바꾸고 과학을 바꾸고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때 새로운 문화가 유행하고 사는 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조선을 쳐다본다면 거기에는 다른 시각도 있을 것이다. 우리시대가 너무 당연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아야 하지 않을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