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3
세상은 어떤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가
타이페이 이야기라는 대만 영화가 있다. 영화자체는 나에게 큰 인상을 주지 못했지만 영화속에서 일반인에게 던지는 질문하나와 그 답들이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당신은 언제 행복한가 라는 질문이었는데 그것에 대해 대만인들이라고 생각되는 많은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있을 때 나는 행복하다라는 답을 했다. 즉 대만인들은 그 질문에 대해 가족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라는 답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일본에 산다. 그리고 일본 드라마나 만화를 보면서, 일본에 살면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거듭 느끼게 되는 일본인의 답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대만인의 답과 비슷하지만 또 좀 다른 그것은 우리는 동료와 함께 할 때 행복하다라는 것이다. 물론 세계 어느나라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살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렇게 대만인은 이렇다라던가 일본인은 이렇다라는 말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나는 일본인이 진짜로 그럴 때 행복하지는 모르겠다. 다만 일본사회에서 동료와 함께 할 때 우리는 행복하다라는 이 메세지가 거듭 거듭 반복되는 것만은 사실인 것같다.
예를 들어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 가보면 온통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자라는 말로 도배가 되어있다. 한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일본학교의 아이들은 교칙으로 정해지지 않은 것도 똑같이 똑같이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도 동료 혹은 친구들이 서로가 다르다고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이유다. 물론 한국이나 미국이라고 해서 동료와 혹은 동급생과 사이좋게 지내자라는 것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상당히 다르다고 느껴진다. 모나지 않게, 튀지 않게라는 정서는 한국에도 있지만 일본은 한국보다 더 그런 정서가 강하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한국 드라마나 영화속에서 강조되는 것은 역시 가족이다. 그러나 한국도 빨리 변하고 있기 때문에 애매한 점은 있다.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라는 드라마가 90년대에 한국에서 장기흥행했는데 이 드라마는 '평범한' 대가족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여러가지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드라마는 결코 크게 외치지 않지만 가족 안에서 우리는 행복하다라는 행복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드라마라고 볼 수가 있다. 가족을 유지하는데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세상은 결국 가족이 존재하기에 그럭저럭 살만한 곳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드라마들은 이젠 아주 드물다. 이제 한국 드라마안에서 가족의 존재감은 미미하거나 훨씬 더 크게 망가져있다. 불륜과 출생의 비밀로 얼룩진 가족이거나 폭력적인 부모나 아이들, 약물이나 알코올 중독에 빠진 가족들이 다른 가족원들을 괴롭히는 이야기가 대세를 이뤄 드라마나 영화만 보고 있으면 이 세상의 가족이란 가족은 대개 다 큰 문제를 가진 가족처럼 보인다. 이것은 사실상 가족이데올로기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즉 문제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가족을 긍정하는 태도에서 가족에는 좋은 면도 있지만 대개는 소용없거나 지옥을 만들어 낼 뿐인 족쇄라고 가족을 이해하는 태도로 태도가 전환되고 있다. 종종 이런 믿음은 가족은 내게 지옥이었어라고 외치는 출연자의 대사를 빌려 시청자에게 전달된다.
마지막으로 미국인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지나가자. 미국인의 행복 이데올로기는 꿈을 쫒는 일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는 자신의 꿈을 추구함으로해서 행복해 질 수 있다라는 것이다. 그 꿈은 야망일 수도 욕망일 수도 있고,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지만 어떤 목표를 향해 뛰고 그것을 성취하는 것이 인생의 의미라는 메세지는 미국 문화물에 가득하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미국에서 삶의 가치가 타인에게서 나오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꿈을 위해 뛰는 일이 행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기억할만한 두 가지 일
다 좋은 일이고 사람마다 다른 것을 믿을 수 있으며 일본이니 한국이니 대만이니 미국이니 하고 이렇게 저렇게 말했지만 반드시 어느나라사람은 이렇다라고 하는게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아니다. 나는 단지 몇가지를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첫째로 이 세상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혹은 대인접촉을 통해, 혹은 책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행복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다. 행복이데올로기란 오히려 역사적 경험을 통해 알아낸 선조들의 지혜라고 말해야 할것이다. 다만 행복이데올로기는 반드시 절대적이지 않다. 그래서 사회마다 틀리기도 하다. 그리고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들은 항상은 아니더라도 대부분 공존하지 못하고 서로 충돌한다.
가족이나 동료를 강조하는 것은 당신의 꿈을 추구하는 가치와 충돌할 수 있다. 당신이 행복은 역시 돈이야라고 한다면 물론 그것은 다른 이데올로기와 충돌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선택이 된다. 다른 것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선택은 스스로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세상에 대해 생각한 끝에 이뤄져야 마땅하다. 그렇지 못하고 그저 주변 사람의 상식에만 따른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복이데올로기에 빠진채,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선택하고, 남들이 출세하려고 하니까 나도 출세하려고 한다던가, 남들이 결혼하니까 나도 결혼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일이 진행되어 비로소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를 깨달을 무렵쯤에는 너무도 많은 제약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가 어떤 교리의 신자라는 것을 깨닫지도 못한채 광신도로 활동하거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가족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비판적이지 못하고 어떤 특정을 이데올로기를 당연한 것으로만 여길 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가족을 맹신하게 하거나 혹은 필요이상으로 가족을 미워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당신은 당신이 가진 잠재적 행복의 가능성을 파괴할 수 있다. 엄청나게 중요한 어떤 것을 싸구려 물건과 바꾸게 만든다.
사실 이 세상에는 남의 가치판단이 들어있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나 기사를 듣지 않아도 우리의 옷, 집 그리고 자동차에서 먹고 입는 모든 것에는 종종 우리를 세뇌하는 어떤 주장이 들어있다. 그 주장은 우리가 어떤 특정한 행복이데올로기의 맹신자가 되게 하고 어떤 행복이데올로기에는 강하게 반대하고 그것을 혐오스럽게 생각하게 한다.
두번째로 말해보자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을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은 정말 나의 것인가? 나는 뭐가 있으면 행복하다고 믿는가. 내 가슴에서 이것이 솔직한 답이라고 말해지는 그 답은 뭘까. 알게 모르게 우리를 지배하는 그 답을 스스로에게 물어서 그 답을 찾고 나면 한편으로 당신은 그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물론 당신은 앞에서 말한 몇가지의 것들을 믿는 행복이데올로기의 신자일수 있다. 가족, 민족, 국가를 믿거나 동료를 믿거나 꿈을 추구하는 것을 믿을 수 있다. 아니면 당신은 솔직히 말해 지금 멋진 연인이나 배우자를 원하고 있을 수 있다. 그것만 있다면 당신은 행복할 수 있다라고 믿는다. 솔직히 당신은 유명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당신을 우러러본다면 당신은 행복할 수 있다.
그도 아니면 당신이 원하는 것은 그저 늙어죽을 때까지 먹고 살 수 있는 돈일지 모른다. 당신은 자식을 원할 수 있고 당신은 어떤 과학적 업적이나 사회적 업적을 원할 수 있다. 당신은 역사에 남을 문학작품이나 그림을 완성하면 행복할 수 있다. 당신은 어떤 질문에 집착하여 그 질문의 답을 알 수만 있다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스릴일지 모른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일자체 일 수 있다. 즉 무수한 실천속에서 무수한 일거리속에서 세상과 부딛히는 것일 수 있다.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면서 믿는 것이 의식하지 못하면서 믿는 것보다 좋다. 의식하지 못하면서 믿는 것은 광신이 되기 쉽다. 즉 자기가 뭘 믿는다는 것을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이 당연하다고만 생각한다. 그것을 의식하는 것은 당신의 인생이 왜 지금 그렇게 되었는가를 이해하는데 좋은 설명을 제시해 줄지 모른다. 이제까지 당신은 무수히 교묘한 핑게를 만들어 왔지만 따지고보면 결국 당신은 뭔가를 믿고 그것이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내가 뭔가를 간청하는데도 들어주지 않았고 친구가 좋은 기회를 주는데도 그것을 거부했으며 왼쪽으로 선택했으면 좋았을 때에 오른쪽으로 방향을 트는 선택을 내렸다. 혈연이라고 생각되면 무엇이든 허용되지만 혈연이 없으면 그 사람은 기본적으로 믿을 수 없는 사람여겼다.
나의 행복 이데올로기
나로 말해보자면 나는 상당히 관념적 인간이었고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는 인간이며 그건 지금도 그렇다. 즉 나는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같다. 그러한 이해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자 이젠 조금 더 현실속에서 생각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즉 내 몸을 가꾸고, 내 아내와 아이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하는 식으로 내 주변의 것부터 나의 내부와 조화를 이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행복이데올로기를 이따금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그런거 없는데 하는 사람이 제일 위험하다. 거듭말하지만 그나 그녀는 뭔가를 너무 믿고 있어서 자신이 뭔가를 믿는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행복이데올로기를 어느정도라도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너무 지배당하는 것도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
'주제별 글모음 > 생활에 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악과 선의 탄생 (0) | 2012.03.25 |
---|---|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당연한 것일까. (0) | 2012.01.26 |
확실한 것이란 무엇인가 (0) | 2012.01.03 |
우리를 지키는 일,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일 (0) | 2012.01.01 |
우리는 불행 워크숍이 필요하지 않을까. (0) | 2011.12.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