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3
확실하다는 것은 뭘까. 먼저 몇개의 문장을 던져 놓고 시작해 보자.
진짜로 확실한 것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
뭔가가 보이는 것은 그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확실성이란 우리의 믿음에 기반한 검증을 통해 만들어 지는 것이다.
진짜로 확실한 것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
전에 환각을 깨는 법이란 글에서 나는 박스 바깥의 발상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예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예를 가져와 보자.
여러 증인들이 여러가지 진술을 내놓는다. 그렇다면 범인이 누구일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답은 증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증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가능성은 확인하지 않고 증언들을 서로 짜맞추려고만 한다. 그러니까 증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는 발상은 이 경우 박스바깥의 생각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이 바로 보이지 않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증인이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라고 증인들에 대해 의심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즉 이미 의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자신이 증인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라고도 의식하지 않는다. 사실 내가 뭔가를 믿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안 믿을 수도 있는데 믿는다는 뜻이다. 진실이 아닐 수도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뭔가를 믿는다라고 의식한다. 정말로 믿는 사람은 자신이 뭔가를 믿는다고 생각자체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박스바깥의 생각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정말로 확실한 것은 그걸 보거나 확인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보고 보고 또 볼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것들은 점점 더 확실해져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인식에서 사라진다. 보이지 않게 된다. 정말로 확실한 것은 우리가 볼수 없다.
이것은 추상적인 것이기만 하지 않다. 우리 눈에도 핏줄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망막에는 그 핏줄의 그림자가 항상 맺히게 되는데 그 그림자는 우리가 볼수가 없다. 항상 망막의 같은 자리에 생기는, 같은 그림자이기 때문에 인식과정에서 그 그림자는 지워져 버린다. 그렇다면 우리가 벽의 한 점을 계속쳐다본다면 그 벽은 사라질까?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우리 눈이 끝임없이 흔들거리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우리 눈은 마치 수전증이 있는 사람이 들고 있는 비디오 카메라처럼 흔들리면서 세상을 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변화가 없는 것들이 우리의 인식에서 사라져 버린다.
진짜로 확실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확실하다고 믿는 다는 생각조차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보이는 것들은 모두 불확실성때문에, 불확실하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다.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사람이나 혹은 손을 움직여서 탁자위의 커피잔을 쥘 수 있는 사람에게 당신은 어떻게 자전거를 탈 수 있는가, 혹은 어떻게 손을 움직이는가라고 물으면 대부분 대답이 궁하다. 우리는 그걸 생각해서 하는게 아니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된다. 우리는 생각에 잠겨서 산책을 한다. 산책을 하면서 우리의 발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를 일일이 생각하면서 하는게 아니다. 몸은 거의 저절로 움직인다.
그럼 확실한 것이란 무엇일까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확실한게 참 많다. 탁자위의 컵이 있다는 사실, 오늘 아침에도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사실, 집에 돌아가면 우리 가족이 있으며 그들은 내 상상력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 확실하지 않은가? 그런데 확실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면 그런 것들은 사실 확실한게 아니란 말인가?
짧게 말하면 답은 '그렇다'이다. 우리에게 느껴지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제 아무리 확실하게 보이고 느껴져도 그것이 보이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불확실성이 그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지고 느껴지게 만든다. 전혀 불확실하지 않은 것은 진짜로 확실한 것은, 진짜로 그렇다고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가 보거나 느낄 수가 없다. 심지어 남이 그걸 보고 알려줘도 반드시 보이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의 망막위에는 핏줄의 그림자가 있다고 알려준다고 갑자기 우리 앞에 그 그림자가 보이게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사실을 매우 강력하게 피력한 것으로 들릴 것이다. 나는 우리가 알고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다, 실은 불확실하기 때문에 보이고 느껴진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당신이 철학자나 뇌과학자가 아니라면 중요한 점은 이러한 문장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가하는 것일 것이다. 이건 그저 저기 별나라에서 핵분열이 일어난다는 이야기처럼 나의 일상과는 상관없는 일일까?
나는 여기서 보이지 않는 확실성을 다르게 부르기 위해 게임의 법칙이라는 말을 도입하고 싶다. 우리가 장기를 두고 있다면 우리는 장기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어떻게 장기를 둘까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장기의 규칙을 바꾼다라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즉 장기라는 게임에 있어서 장기의 게임은 '진정으로 확실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계속 장기를 둔다면 우리에게 장기의 규칙은 확실한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장기의 규칙은 '보이지 않게 된다'. 장기라는 게임에서 확실해 보이는 것은 내가 곧 적의 진지의 한 쪽을 부수게 될 것이라던가, 적의 공격이 강력하여 내가 거의 게임에 지게 되었다라는 사실 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보이지만 실은 100%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게임을 하는 것이다. 항상 생각지 못한 기발한 방법이 등장하는 것이 게임을 하는 재미이며 불확실성의 증명이다.
장기라는 게임을 언급했으므로 이번에는 문화적 게임을 이야기해봐야 겠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에도 게임의 법칙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게임의 법칙을 잘 알고 있을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우리는 이 게임의 법칙을 잘 지키기 때문에 잘 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 게임의 법칙을 잘 지키면서도 그 게임의 법칙이 뭔지 대부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하는 문화적 게임은 하나만 있는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게임을 바꿀 때 우리는 잠시 게임의 법칙을 약간 인식하지만 곧 그것은 우리의 의식저편으로 사라지고 만다. 무엇이 게임의 법칙인가는 보편론적으로는 전혀 확실한게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걸 인식하고 의문을 던지고 어떤 사람들은 그걸 보는데 실패한다.
예를 들어보자. 영화를 찍을 때, 해변가에서, 공중 목욕탕에서 우리는 각각 약간씩 다른 게임의 법칙을 가지고 있다. 어떤 여자에게 당신에게 돈을 줄테니 키스하게 해달라고 하면 그 여자는 화를 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여자가 영화를 찍을 때는 키쓰씬이 나와도 거부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영화배우가 매춘을 하는 여자와 같다고 말하는게 절대 아니다. 다만 게임의 법칙에 따라, 물리적으로는 같은 일이 허용가능한 일이 되고 불가능한 일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공중목욕탕에서 그것은 더욱 두드러 진다. 공중목욕탕에 잠수복을 입고 간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길거리에서 벌거벗고 다니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이 부끄런 일로 생각한다. 졸업식장에 나체로 참석한다던가 국회의원이 국회에 나체로 등원한다던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공중목욕탕에 가면 게임의 법칙이 달라진다. 그리고 이제는 지나치게 자신의 나체를 의식하는 사람이 오히려 눈쌀을 치푸리게 만드는 별난 사람이 된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장기나 공중목욕탕은 아무래도 좋다. 당신은 지금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가. 당신이 그 게임을 하고 있다면 당신에게 그 게임의 규칙은 보이지 않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당신이 목욕탕에 있을 때와 학교수업중일 때 서로 다른 게임을 하는 것처럼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게임은 당신의 행동을 조종하고 있지 않을까?
보다 큰 게임들
내가 무슨 게임을 하고 있다는 건지. 나는 자유롭게 살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도덕경의 첫마디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도라고 말해진 도는 도가 아니다.
도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도덕경을 읽으면서 그 책이 전부 도에 대해 설명한 것은 알겠는데 어디서도 도가 없는 것같다. 누군가에게 도가 뭔데?라고 물으면 그사람의 대답은 모르겠다가 아니라면 매우 기괴하게 들리는 말이다. 왜 도는 보이지 않을까? 우리는 방금 보이지 않지만 너무도 확실하며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게임의 법칙에 대해 듣지 않았는가? 다시한번 생각해보자. 왜 도는 보이지 않을까?
여기 다른 게임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플라톤의 게임이며 과학이라는 게임이다. 그둘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 핵심적 부분을 공유하는 게임이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은 플라톤철학의 주석에 불과하다라고 말한다. 현대과학은 서양문화에서 발전해 나온것이며 서양인의 사고 방식은 플라톤의 철학에 기댄바 크기 때문에 과학과 플라톤철학은 긴밀한 관련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과학이라는게 왜 게임일까? 과학은 객관적인 세계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 첫번째 조건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처럼, 진리의 세계가, 모두에게 꼭같이 진리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플라톤이 철학이고 과학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과학이 미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면 오해의 소지가 너무 커서다. 내가 여기서 몇줄로 과학의 본질에 대해 고민한 것을 늘어놓을 수는 없다. 다만 객관적 세계의 존재라는 것이 당연하고 확실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것 역시 하나의 게임의 법칙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게임의 법칙이라는 것은 틀렸다는 말일까? 당신이 장기를 두는 한 장기의 법칙은 틀리지 않다. 과학의 법칙을 준수하는한 과학은 틀리지 않다. 다만 과학이 유일한 게임으로 아는 것을 탈출하지 않는한 당신은 과학이라는 게임의 법칙이 만들어 내는 세계안에 갇히게 된다.
막시즘과 프로이드를 생각해 보자. 그들은 게임의 어떤 부분을 지적했고 그때문에 세계는 깜짝 놀라게 되었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은 인간은 자유가 아니라 경제적 환경에 의해 정신적 지배를 받게 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 지적을 받고 깨어난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경제적 환경을 인식하게 되었다. 보이지 않던 사회의 착취구조가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것일까?
프로이드가 지적한 것은 우리에게는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가 있으며 이 무의식의 세계가 우리를 조정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런 조정을 받는 존재라는 게임의 규칙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게 되자 우리 자신의 행동과 동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게임의 법칙이 이제 달라진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정신병으로 인한 범죄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게 된것은 우리안에 우리가 인식하는 우리만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긍정하게 된 결과다.
그럼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는 것은 뭔가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는 것,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는 우리의 믿음에 근거해서 만들어 진 것이다. 그 믿음이 바로 게임의 법칙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모두가 확실하지는 않다. 어떤 것은 보다 확실하고 어떤 것은 불확실하다.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는 것은 우리의 믿음에 기반한 검증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탁자위에 컵이 있다. 그건 확실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손을 뻣으면 만질 수도 있다. 환각현상의 예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눈을 믿는다. 많은 검증을 통해 우리가 본것이 정확하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단지 보는 것만 그럴 것인가. 우리는 친구들이나 가족의 성격을 보고, 여러가지 사회현상을 본다. 그러한 사람들의 성격이 실존한다는 것은 많은 경우 꽤 확실하게 느껴진다. 여러가지 사회현상이 실존한다는 것은 많은 경우 꽤 확실하게 느껴진다. 우리의 믿음에 근거해서 여러가지 검증을 통해 그것들이 실존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빨갱이, 황빠, 노빠, 수구세력, 재벌은 실존한다. 88만원세대도 실존하고, 왕따도 실존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들은 물론 실상도 허상도 아니다. 문맥에 따라 양쪽 다가 될 수있다.
우리가 영국이나 미국이나 일본에 살게 되면 우리는 둘중의 하나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는 그들 사회에 완전히 포섭되어 그 사회의 문화적 게임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즉 나와 그 외국 사회간의 구별이 사라지고 나는 완전히 새로운 게임에 빠져든다. 또 하나는 한국과 다른 문화를 경험함으로 해서 한국이라는 사회와 외국이라는 사회 어느쪽에도 속하지않고 각각의 사회가 가지는 게임의 법칙 모두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는 외국에 살아도 나를 지키게 되고 오히려 한국인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이 더욱 강해지는 결과가 있기도 하다. 나를 지키지 못하면 거기에는 한국도 미국도 일본도 없다. 그저 자기가 보는 단일한 하나의 게임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목욕탕에서 벌거벗고 앉아서 목욕탕 창문밖을 쳐다보면서 옷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비웃고 괴상한 인간으로 격하하는 일과 비슷한 일들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강조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확실성에 대해 말하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한가지는 언급해야겠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코기토 에르고 숨 [cogito, ergo sum]).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확실히 존재하는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는 것은 뭘까. 나의 슬픔이나 기쁨이란 뭘까. 데카르트는 나는 확실히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확실하다는 말은 함부로 쓸 일이 아니다. 진짜로 확실한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있다. 나라는 것도 결국 성장하고 변화해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확실하게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나라는 것이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는 나라는 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맺는 말
장님에게 무지개를 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눈을 뜨라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뿐이며 그 말들은 무지개 자체가 아니다. 진짜 게임의 법칙은 영원히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 보인다고 하더라도 장기를 두면서 바둑두는 사람에게 너의 규칙은 틀렸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게임이 우리가 기대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는가의 문제이지 옳고 그른것의 문제가 아니다.
외국 이야기를 하고 한국이야기를 할 때 꼭 저 외국이 좋으니까 그렇게 하자라는 말을 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한국이 뭔지, 한국의 게임의 법칙이 뭔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한국이 아닌 것 즉 외국을 봐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한국이다. 중요한 것은 한국을 명상하는 것이다. 당연하다고만 하지 말고 이러저러한 게임의 법칙과 관습은 왜 생겨났을까를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한국뿐일까. 우리 가정, 나 자신의 게임의 법칙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이름에 휘둘려서 꼴사납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가 길거리인데 나만 혼자 목욕탕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확실한 건 없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모두 불확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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